2011년 10월호

“우리가 떠나면 속 시원할 텐데 왜 우리를 찾나?”

탈남(脫南)하는 탈북(脫北)자들

  • 김유림 기자 | rim@donga.com

    입력2011-09-21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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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거쳐 제3국 망명하는 ‘탈남 탈북자’
    • ‘민족의 땅’에서 받는 차별
    • “영국 가서 영어라도 배워오겠다”
    • 탈북 때처럼 소문 통해 퍼지는 탈남 정보, 탈남 브로커도 성행
    • “한국도 영국도 천국은 아니다”
    “우리가 떠나면 속 시원할 텐데 왜 우리를 찾나?”

    2002년 중국 선양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가족. 힘겹게 자유를 찾은 탈북자들이 다시 한국 국경을 넘는 이유는 무엇일까?

    7월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는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영국이나 호주로 망명하도록 도와주고 돈을 챙긴 브로커 조직을 적발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브로커 변모씨 등은 광주광역시에 대출 알선 사무실을 차려놓고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를 모집했다. 이들은 탈북자들에게 “호주, 캐나다 등 제3국은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가 잘 돼, 아이 한 명당 1500달러 이상 지원이 나온다”고 설득했다.

    죽을힘을 다해 두만강을 건넜고, 목숨을 걸고 한국에 들어왔던 그들이 다시 한국을 떠났다.

    ‘탈남(脫南) 탈북자’ 수는 정확히 집계된 바 없다.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은 지난해 “2004년 이후 영국 내 탈북 망명 신청자가 1000명 이상이고, 이 중 70%가 한국을 거친 ‘탈남 탈북자’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미국의 소리 방송(VOA)은 유엔난민기구(UNHCR) 비공개 통계를 인용해 2010년 말 영국에 사는 난민 신분의 탈북자가 581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윤여상 소장은 “2007년 전후로 탈북자 사회에 영국행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한때 영국 내 한인교회들이 탈남 탈북자 뒤치다꺼리하느라 본 기능이 마비됐을 정도”라고 전했다.

    짧게나마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는 제3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에 주민등록을 마친 탈북자가 해외로 이민하는 경우에는 난민에게 지급되는 복지기금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대다수 탈남 탈북자는 영국 등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태우고 “한국에 간 적 없다”고 발뺌한다. 만약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불법이민자 혹은 망명신청자로 전락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고려대 언론학부 오원환 박사는 2003년부터 탈북청소년대안학교 ‘셋넷학교’ 자원교사로 활동하며, 한국을 떠나는 탈북자 10여 명을 추적·연구했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20대다. 오 박사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논문 ‘탈북 청년의 정체성 연구: 탈북에서 탈남까지’를 8월 발표했다. 이 논문을 발췌·수록한다.



    ‘위장망명’이 아니라 ‘탈남’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됐다. 고향을 떠난 지는 14년이 됐다. 이미 분단은 익숙한 것이 됐고, 북쪽은 이상한 나라가 됐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나는 한국 사람이 되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촌티를 빨리 벗어야 했다. 다들 그렇게 말했다. 난 열심히 한국 사람이 됐다…. 그러나 나는 껍데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금희, 2002년 한국 입국)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한국에서 국적을 얻고 정착했다가 다시 제3국으로 망명하는 탈북자들에 대해 ‘탈남’ 대신 ‘위장망명’이라는 말을 쓴다. ‘위장망명’이라는 말에는 탈남이 한국 사회가 아닌 탈북자 집단 자체의 문제로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탈북’이라는 말에 ‘부정적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의미가 있듯, ‘탈남’이라는 표현에는 한국이 북한처럼 부정적 공간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꼭 탈북자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도 ‘탈남’을 했다. 이제 ‘탈남’을 탈북자만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탈북자들이 탈남하는 이유에 대해 구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탈북 청소년들이 중국 혹은 제3국에서 기대했던 것과 한국의 현실은 많이 달랐다. 다음은 오 박사가 탈북 청소년들을 대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한국에서 느낀 감정’을 종합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탈북자가 한국에 입국하면 “이제부터 잘살 수 있다”고 기대한다. 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다. 중국에서처럼 한족이나 조선족으로 가장하지 않아도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임금을 못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드디어 임금을 제대로 받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이 되니 중국에서처럼 말이 안 통해 답답한 일도 없다. 경찰이 ‘불법 월경자’라고 체포하는 일도 없으며, 신고 당할까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는다. 중국에 숨어 지낼 때 TV 드라마를 통해 봤던 한국 등장인물들의 삶이 내게도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가 떠나면 속 시원할 텐데 왜 우리를 찾나?”

    탈북자들은 ‘신자유주의 흐름’에 따라 한국에서 다시 영국 등 서양으로 떠난다. 사진은 영국 템스강 타워브릿지.

    그러나 실제 한국 생활은 방송 드라마에서 봤던 것과 너무나도 다르다. 드라마에서 봤던 멋진 집과는 너무나도 다른, 소형 임대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정착금을 받을 때도 “한국에도 못사는 사람이 많은데 왜 너희에게 돈을 주느냐”는 눈총을 받는다. 주민등록번호는 하나원이 소재한 경기도 안성을 기준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125’‘225’다. 중국에 여행 갈 때 비자가 안 나오기도 한다.

    학교에 가서도 북한 출신이 아닌 척 가장한다. 서울 말씨를 흉내 내고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북한 출신이 아니라 강원도 출신”이라고 손사래친다. 탈북자라는 이유로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을 늦게 받거나 적게 받는다. 탈북자가 사는 아파트는 집값이 떨어진다며 탈북자의 전입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아파트 내에 걸리기도 했단다.

    방송 드라마에 나오는 부자들처럼 되기 위해서는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와서 처음 알파벳을 배운 사람들은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어렵다. 무한한 자유가 혼란스럽다. 선택보다 주어진 조건에 익숙하던 터라, 매순간 선택은 구속만큼 어렵다.”

    탈북자들은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한민족과 더불어 살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기대는 좌절로 바뀐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찢어진 청바지 입고 노란 머리 염색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분명 생김새는 동양인인데…지하철에 여자가 앉아 있고 남자가 서 있는데 여자가 ‘야 힘들지, 네가 자리에 앉아. 내가 네 무릎에 앉을게’ 하면서 남자가 자리에 앉고 여자가 무릎에 앉는 거예요. 지하철에서. 노인들도 다 보고 있는데….”(김하늘, 2004년 한국 입국)

    이밖에 통일에 대한 인식 차이, 북한 말씨에 대한 거부감,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탈북자의 한국 정착을 어렵게 한다. 경제적 불안과 빈곤도 문제다. 2007년 탈남해 영국에 정착한 유재우(가명)씨의 말이다.

    “한국 사람도 월급 제대로 받으면서 애 하나 키우기 힘들잖아요. 저희들도 그런 게 보이잖아요. 그 사람들이랑 나랑 비교하면 진짜 어려운 거죠. 그러니까 앞길이 캄캄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2009년 탈북자 실업률은 8.7%다. 2005년 27%에 비해 크게 낮아졌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탈북자의 비정규직 비율이 갈수록 오르고 있고 1년 미만 근무가 전체 고용의 70%를 차지한다. 많은 탈북자가 한국 고용시장에서 불평등을 경험했다.

    “처음 식당일 했어요. 주방보조 하는데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싫어할까봐 중국 동포라고 했는데, 사장님이 신문 광고에는 120만원 준다고 해놓고 110만원 주는 거예요.” (김정희, 가명, 2002년 한국 입국)

    “아빠가 북한에서 대학을 나오셨는데 이력서에는 남한 출신으로 ‘40년간 농장에서 근무’라고 쓰는 거예요. 북에서 아무리 능력이 있었어도 이게 현실인 거예요.” (최금희)

    탈북 취업자 70%가 1년 미만 근무

    국내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탈북자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다. 북한인권정보센터가 발표한 ‘최근 직종별 취업 현황 조사’에 따르면 ‘기능·기계조작·조립·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탈북자 취업자가 61.4%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서비스·판매직’(26.5%)이었다.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하는 탈북자 비율은 11.5%에 불과했다.

    사회적으로 직업에 ‘귀천(貴賤)’이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블루칼라’ 탈북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불만을 느낀다. 셋넷학교 박상영 대표 교사는 “영국에서 탈북자들은 한국에서 하지 않았던 궂은일을 한다”며 “한국에서는 똑같은 한국인이니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서 못하는 일인데, 영국에서는 기꺼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탈남한 정남영씨는 “북한에 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한국에 살면 욕심이 많아진다”고 말했다. 유재우씨의 말을 들어보자.

    “중국에 있을 때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어요. 한국 오면 컴퓨터 한 대 준대요. 저는 그거 때문에 한국 온 거고 크게 바라는 거 없었어요. 근데 한국 오니까 정신력이 바뀌데요. 뭐든 하나하나 뒷일(미래)을 생각해야 하니까. 중국에서 한국 올 때는 컴퓨터 한 대면 됐지만, 한국에서 영국 올 때는 ‘돈 벌자’ ‘편안하게 애 낳고 살자’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정체성 혼란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 등 제3국에 숨어 있을 때는 공안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 신분을 숨겨야 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는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고향, 출신, 말투를 숨겨야 한다. 탈북자 최금희씨의 말이다.

    “인정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 눈빛 이상하게 안 봤으면 좋겠어요. 나를 금희라는 한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탈북자 최금희, 아오지 탄광의 최금희….”

    “한국 사람보다 열 배 노력해라”

    탈북자들은 한국 정착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탈북자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 위해, 또한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 탈북자는 영어라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영어 때문에 좌절하면서, 탈북자들은 스스로 한국 대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못하면 취직을 못하고,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영어를 못하면 서류에서 떨어지잖아요. 면접 볼 때도 영어로 인터뷰하니까….”(김하늘)

    “대학을 들어가도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성적을 위한 공부를 했다. A학점을 받는 친구가 마냥 부러워 공부했으니 성적은 당연히 오르지 않았다. C를 받으면 교수님을 찾아가 ‘북에서 왔기 때문에’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야 했다.” (최금희)

    “교수님들이 강의 시간에 다 영어를 쓰시고…한국애들은 수업시간에 필기도 안 하고 수업시간에 자도 A플러스 받는데 저는 자지도 않고 선생님 메모 하나도 안 놓쳤는데 C나 받고…어차피 늦은 거 3~4년 진짜 영어 배워오면….” (고미희, 2006년 탈남, 미국)

    한국 사회는 속도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사회다. 북한은 일을 더 한다고 해서 배급을 더 많이 받는 사회가 아니지만 한국은 다르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한국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탈북자들에게는 벅차다.

    “한국에 있을 땐 괜히 급해지고, 항상 눈뜨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노력하는데도 한국 사람들은 계속 다그치는 거예요. 너희는 한국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그걸 자꾸 강조하기 때문에 더 바빠지는 거예요. ‘한국 사람이 한 발 걸을 때 너희는 열 발 걸어라. 그래야만 살 수 있다’ 이렇게….” (성일권, 2007년 탈남, 영국)

    한국에서 영어를 못하면 좋은 직업을 갖기 힘들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는 ‘경제적 배제’로 이어진다. 결국 탈북자들은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비교적 잘 했고, 좋은 성적을 냈던 주영민(가명)씨 역시 미래의 경제적 불안 때문에 탈남했다.

    “한국을 떠난 이유 첫째는 장모님한테 손 내미는 게 싫어서예요. ‘돈 다 대줄테니 대학 다니라’고 하더라고요. 남자는 대학 꼭 나와야 한다고. 그리고 한국에서 자식 하나 키우려면 힘들잖아요. 그게 두 번째고. 사람이 태어나서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하잖아요. 근데 한국은 그런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진짜 여유를 가지려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앞이 보이지 않아서….” (주영민, 2007년 탈남, 영국)

    소문 듣고 브로커 통해 탈남

    탈남은 ‘입소문’을 통해 확대된다. 이 배경에는 탈북자 사회 특성이 녹아 있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와서도 결속력 강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다수 탈북자가 매주 일요일 탈북자 교회에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북한 사정에 대해 얘기한다. 때로 북한에 있는 가족과 통화하거나 가족에게 송금도 한다. 설이나 추석에는 고향 음식과 문화로 그들만의 동질성을 확인한다.

    한국에서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은 탈북자 사회 내 내부 결속력을 강화한다. 특기할 점은 탈북자 공동체 내 소통은 대부분 입소문 등 비공식적 방법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2007년 전후로 한국 사회 탈북자 공동체 내에는 이러한 소문이 떠돌았다.

    “영국에 가면 정부에서 돈도 좀 많이 주고, 집을 엄청 큰 거 준다, 월급도 한국보다 세게 받을 수 있다는 소문들은 있었죠. 이층짜리 집을 공짜로 준다는 거예요. 먼저 온 사람들이 허풍을 많이 쳤죠. 그리고 신사적인 나라다. 복지가 잘돼 있다. 근데 런던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게 아니었죠.” (성일권)

    ‘소문’은 탈북자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한 가지 예를 보자. 현재 한국 다수 대학이 ‘특례입학제도’를 통해 탈북자들이 대학에 쉽게 진학하도록 돕는다. 국립대의 경우 탈북자 학생의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고 사립대는 정부와 대학이 반반씩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한때 탈북청소년들 사이에 ‘이런 제도가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탈북청소년들은 ‘제도가 없어지기 전에 빨리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며 대학 입학을 서둘렀다. 제3국에서 한국에 입국할 때 ‘결정적 정보’들을 소문을 통해 들었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2008년 2월 영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북한 탈북자의 지문정보를 요청했다. 당시 영국에는 탈북자 850여 명이 체류 중이었고, 그중 450명에 대한 신원확인 절차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 경찰은 “탈북자의 신분 확인용으로 지문 정보를 사용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지문정보 제공을 거부했다. 하지만 법제처의 ‘법령해석 심의위원회’는 “정보 제공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는 영국 정부가 신원조회를 의뢰하면 그에 대해 한국 정부가 ‘확인’해준다.

    2008년 전후로 “영국 정부가 한국 측에 의뢰한 지문정보 결과에 따라 한국에 정착한 사실이 있는 탈북자를 추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한국 및 영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때문에 난민 지위를 획득한 탈남 탈북자나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탈남 탈북자들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영국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에 불만을 가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차가운 시선과 편견만 갖던 한국 사회가, 왜 탈북자가 사라지면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영국으로 간 탈북자들의 송환을 돕느냐”는 말까지 나온다. 재영조선인협회 김주일 회장이 2010년 10월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한 말이다.

    “탈북자들이 막상 한국에 와보니 한국 사회가 맞지 않거나 적응 못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탈북자 2만명 시대를 맞아 그 숫자에 걸맞은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탈북자들이 선택할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영국, 미국, 어디든 직접 살아보고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면 돌아갈 기회를 열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한국보다 해외가 낫다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 정부에서 지문정보를 넘겨줘 영국 정부의 조회를 도와주면 영국과 한국 간의 외교문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지문조회 협력으로 한국에 돌아가게 된 탈북자들은 반한(反韓) 감정을 갖고 살아가겠죠. ‘내가 언젠가 선진국에 가서 살고 싶었는데 한국 정부 때문에 귀환당했다’는 반한 감정 말입니다.”

    ‘망명신청자’

    2010년 영국은 신규 망명신청자 35명을 포함한 난민 신청 탈북자 100여 명에 대해 망명 신청을 모두 거부했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면 영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전에는 내무성 이민국인 홈 오피스에서 알선해준 장소에서 대기하면서 인터뷰 심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린다. 이때 법적 지위가 ‘망명신청자(asylum seeker)’다.

    2008년경 탈남 탈북자 사이에는 또 하나의 소문이 퍼졌다. 탈북자의 망명 신청이 증가하자, 영국 정부가 인터뷰 심사에 배석하는 영어 통역자를 한국 출신이 아닌 북한 출신으로 기용해 인터뷰가 더욱 까다로워졌다는 것. 최민철씨는 “인터뷰 때 통역한 북한 여성이 평양말투로 조목조목 깐깐하게 꼬투리 잡을 생각으로 질문을 해왔다”고 말했다. 결국 ‘망명신청자’ 상태를 못 벗어난 최민철씨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정부 공동주택 내 4평짜리 방 한 칸을 배정받았다. 최민철씨는 1주일마다 정부로부터 33파운드(약 5만6000원)를 받았다. 33파운드 내에서 식비, 교통비를 해결해야 한다. 그가 머무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일주일간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 16파운드다. 영어로 의사소통도 안 되고 생계비도 근근이 살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외부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최민철씨는 한국을 떠난 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다른 탈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와보니까, 일단 영어가 안 되니까요. 한국에서는 말투가 달라서 그렇지 언어 소통은 되잖아요. 근데 여기는 아예 영어를 모르니까. 돌아간 사람도 많이 봤죠. 그럴 때마다 나도 첨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도 많이 들고요.” (손남영)

    탈남 탈북인들이 말하는 ‘영국에서 살기 좋은 점’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처럼 바쁘게 살지 않아도 된다. 둘째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망명신청자는 일을 하거나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따분한 생활’을 해야 한다. 망명 심사 과정이 길어지면서 집에 있는 시간도 길어지고 인터넷에서 한국 드라마 시청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외롭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낀다. 다음은 미국의 소리(VOA)에 방송된 어느 탈남 탈북자이다.

    “탈북자 가운데 극히 일부는 이제 영국 생활에 적응해 보따리를 풀었지만 대다수는 보따리를 다시 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 주재 한국대사관에는 한국행을 위해 여권을 다시 발급받으려는 한국 국적 탈북자가 늘고 있습니다.”

    “한국도, 영국도 천국은 아니다”

    영국 사회에 잘 적응한 탈북자도 있다. 2007년 여름 탈남한 유재우씨는 2개월간 망명 신청 심사 기간을 거쳐 난민 비자를 받았다. 유재우씨는 같은 탈남 탈북자 출신인 아내와 스코틀랜드 내 15평형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는 직업훈련학교에서 소개받은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일을 한다. 그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북한 억양이 훨씬 강해졌다. 한국에서는 가능하면 서울 말투를 흉내 내려 했다면 영국에서는 북한 말투를 떳떳하게 사용하는 것. 그는 한국에서 북조선 출신임을 숨기려 했지만 영국에서는 그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영국에서 북조선 출신임은 차별 요인이 아니다.

    “나만의 기술을 좀 더 튼튼하게 다져가고 가게 하나 차려서 편안하게 살려고요. 놀러도 가고 여행도…. 아이 셋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에요.”

    그들은 영국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영국은 다인종 사회고 수많은 난민이 함께 살고 있다. 망명 신청이 수용되고 난민 비자가 발급되면 그때부터 이민국이 아닌 직업 센터(Job center)에서 난민에게 수당을 주고 새로운 임대 주택을 제공한다. 500~1000파운드 정도 차등 지원이 이뤄진다.

    2007년 탈남한 주영민씨 역시 “영국에서는 자녀 셋만 낳아도 정부 지원으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하면 자녀들도 멸시받지 않고 편히 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민 지위를 받지 못했거나 영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탈북자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실정이다. 지금도 영국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최민철씨의 말이 그들의 처지를 대변한다.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지. 꼭 어디에 와 있냐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여기에 없어요. 환상인 거죠. 중국에서 한국에 올 때처럼….”

    탈남 탈북자 추적 연구한 오원환 박사

    “탈북자, 한국 사회에서는 소박한 꿈도 사치다”


    “우리가 떠나면 속 시원할 텐데 왜 우리를 찾나?”
    “탈남한 청년들의 꿈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정규직이 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잘 기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탈북 청소년들이 다시 국경을 넘는 걸까요? 바로 한국 사회가 탈북 청소년들에게 소박한 꿈마저 꿀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려대 언론학과 오원환 박사는 2003년부터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셋넷학교에 영어 자원봉사 교사로 일하며 탈북 청소년들과 인연을 맺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오 박사는 탈북청소년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그들에게 영상 제작 기술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관계였던 탈북자들이 갑자기 영국으로 건너가 난민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탈남 문제를 단순히 탈북자 개개인의 적응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탈북자들은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한국에 왔지만,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다시 한국을 떠납니다. 동질감을 느끼고 싶지만,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는 언제나 이방인입니다. 결국 한국에서의 적응을 포기하고 ‘모두가 이방인’인 영국으로 떠나는 겁니다.”

    오 박사는 탈북자의 이동 과정을 ‘디아스포라(diaspora)’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디아스포라란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세계에 흩어지면서도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이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민족의 이산(離散)을 뜻하기도 한다.

    1990년대 들어 북한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탈북자 수가 늘어났다. 1차적인 ‘탈북 디아스포라’는 북한이라는 ‘조상의 땅’에서, 한국이라는 ‘조상의 땅’으로 이동하는 특수한 형태였다. 오 박사는 “최근 한국에서 미국, 영국 등 제3국으로 탈남하는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탈북자 디아스포라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며 “2007년경 서양으로 망명한 탈북자가 확고한 난민 지위를 획득하는 2012년 이후부터 서양에도 탈북자 디아스포라 문화가 확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 박사는 최근 탈북자 정책에 경제용어인 ‘이격도(離隔度)’를 도입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격도란 주가와 이동평균선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오 박사는 “한국 사회와 탈북자들이 경험한 북한 사회는 괴리가 크다. 지금까지 탈북자 정책은 한국 사회는 그대로 있고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100% 맞추는 방식이었다”고 지적하며 “남북한 문화 이격도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와 북한 사회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함께 줄여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탈북자 학생 대학 입학 대환영? 28.4% 중도 탈락!

    “우리가 떠나면 속 시원할 텐데 왜 우리를 찾나?”

    서울 중구 남산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

    탈북자 장모(28·남)씨는 2006년 서울 모 사립대에 입학하던 날, 학교 정문 앞에서 펑펑 울었다.

    “2000년 북한을 탈출해 꼬박 4년간 중국에 숨어 있었어요. 언제 공안에 잡혀갈지 모르는 초긴장 상태에서도 저는 늘 한국 생활을 상상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좋은 직장에 들어가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장씨는 2003년 한국에 들어와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한국 애들도 가기 힘들다는’ 명문대에 입학했다. 손에 잡힐 듯하던 장씨의 꿈은 대학 첫 수업과 동시에 산산이 깨졌다. 교양수업 교과서는 영어 원서였다. 한국에 와서 처음 알파벳을 배운 장씨는 책 제목조차 읽을 수 없었다. 교수님 강의도 몇 단어 빼고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같은 과 친구들은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장씨에게 다가왔지만 점차 멀어졌다.

    “남한 아이들은 친해지면 늘 ‘두만강을 건널 땐 어땠어?’ ‘정말 북한에서는 밥도 못 먹어?’ 하면서 가슴 아프거나 자존심 상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불편해졌고 과 활동을 피하다보니 시험기간에 필기 노트 하나 빌릴 친구가 없었습니다.”

    학교, 학과에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담당 부서가 아니다”라며 나 몰라라 했다. 결국 장씨는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하고 편의점, 건축사무소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 소송 홍정욱 의원이 작년 서울·경기 지역 10개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탈북자 전형으로 입학한 475명 중 135명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탈북 대학생 퇴학 비율은 28.4%로 10개 대학 평균 퇴학률(4.5%)의 6배에 달했다. 특히 한국외대의 경우 탈북자 전형으로 입학한 111명 중 34명이 중도 탈락했고, 24명은 휴학 중이다. 입학한 학생 중 절반만 실제 학교에 다니는 것. 한 대학 관계자는 “탈북 재학생 다수가 1학년이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 중도 포기율이 높아진다”고 귀띔했다.

    탈북자 학생들은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중앙대, 숭실대, 건국대 등의 탈북자 학생의 평균평점은 2점 초반으로, 일반 전형을 통해 입학한 학생 평균 평점보다 1점 이상 낮았다. 즉 대다수 과목에서 C학점 이하의 성적을 받은 것. 특히 중앙대의 경우 탈북자 전형으로 입학한 전체 25명 중 6명이 학기 학점 평균 2.0 미만을 받아 학사경고를 받았다.

    들어올 땐 쉬워도 나갈 땐 어렵다

    탈북자 학생들이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탈북자가 입학하는 과정이 너무 쉽다는 지적이다. 서울대의 경우 탈북자 전형으로 입학할 때도 대학수학능력시험 2과목에서 2등급 이상을 받아야 한다. 어느 정도 학력 수준이 있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다수 대학은 서류와 면접만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그렇다보니 탈북자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고교 검정고시만 통과하면 대학은 누워서 떡 먹기”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2008년 탈북자 전형으로 모 전문대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한 오모양은 탈북자 친구들에게 “왜 더 이름난 대학에 가지 않느냐”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오양은 “북한 요리를 할 줄 아는 내 장점을 살려 요리연구가가 되기 위해 전문대에 진학했는데, 탈북자 친구들은 나를 이해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한 탈북자 교육단체 관계자는 “탈북자 아이들은 12년간 남한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는지 아무리 말해줘도 모른다. 그저 한국 사회에서 살기 위해 학벌은 ‘슈퍼패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 준비 없이 대학에 갔다가 오히려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를 탈북자 개인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학교에서 책임을 지고 탈북자 교육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 한국외대의 경우 학교에서 영어를 잘하는 학생과 탈북자를 1대1로 매칭해 무료 영어교육을 해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대다수 학교가 ‘탈북 학생 AS 정책’을 세우지 못한 실정이다. 서울 모 사립대 중어중문학과 김모씨는 “1시간짜리 학교수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시간 이상 따로 공부한다. 학교가 ‘학생 멘토’를 붙여주거나 교수님이 탈북 학생을 위한 특별 수업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같은 대학 성모씨는 “대부분 탈북자가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에서 검정고시를 본다. 같은 대학 학생이라도 남한 아이들과 같이 영어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며 “대학에서 탈북자를 위한 영어교실을 열어주거나 토익시험비를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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