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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명장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보자기에 수를 놓는 예술가 자수장 김현희

  •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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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가 아니라 예술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호랑이를 수놓은 조선시대 무관의 흉배. 반면 문관 흉배에는 학을 수놓았다.

김현희처럼 꼼꼼하고 치밀한 완벽주의자는 대형 작품을 내는 데 불리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기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들은 스스로 정한 높은 기준에 도달하려고 혼자 무진 애를 쓰고, 그 결과 엄청난 시간을 바치거나 채 완성하기도 전에 탈진하기 십상이다. 천재 예술가의 작품이 미완인 채로 남은 것도 이 완벽주의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품이라면 예술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들이 주로 주옥같은 소품을 많이 내고, 때로 그 소품이 대작을 뛰어넘기도 한다. 김현희가 큰 작품보다 보자기를 택한 것은 아마도 그에게 남은 세월과 완벽주의, 그리고 창작 욕구를 모두 고려한 최선의 선택인지 모른다.

많은 장인이 대형 작품을 만들 때면 제자들의 손을 빌리는 것도 워낙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인데, 그게 딱히 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명장들도 자기 작품을 따로 만들면서 제자들과 함께 주문받은 작품을 만들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공예의 세계에서 ‘공방’ 작품을 제자들과 함께 만들면서 기술을 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현희에게 자수는 공예가 아니라 예술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예술작품은 그래서 협업이 불가능하다. 바탕천 염색부터 수실 염색까지 모두 그의 의도와 마음을 담아 작업한다. 그런 그이기에 간혹 아프거나 할 때 실 꼬기(우리 자수는 실 한 올을 나눠 꼬아서 다시 한 올로 합친 ‘꼰사’를 쓴다)를 도와주는 이는 두어도 같이 수를 놓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제자를 가르치긴 하나 작업은 늘 혼자 한다. 따로 공방도 없다. 집에서, 그것도 한 사람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방 하나가 그의 작업 공간이다.

그에게 자수는 처음부터 예술이었지 돈벌이가 아니었다.



“수를 가르쳐주신 윤정식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네 바느질은 팔 게 아니니 작품으로 하라’고요. 그래서 한때 꽃꽂이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자수는 돈을 위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 꽃꽂이 강사를 업으로 한 적이 있다. 꽃을 워낙 사랑하는 데다 솜씨가 좋으니, 꽃꽂이는 그에게 꼭 맞는 일이었지만-꽃꽂이 역시 화아(花兒)의 일이긴 하다-손이 잘 망가지고 꽃은 이내 시들고 마니 아쉬움이 커서 그만두고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수에만 전념하게 됐다.

수방(繡房)의 솜씨를 잇다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김현희가 쓴 책들과 그의 작품을 소개한 일본 책자들.

그는 열아홉에 스승 윤정식을 만났다. 스승을 만나기 전에도 타고난 재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이나 붓글씨에 두각을 나타냈다. 화가인 여동생도 있고 의사인 오빠는 어려서 만화도 잘 그렸다. 어머니가 손뜨개와 붓글씨를 잘했다고 하니, 솜씨는 내림인 모양이다. 군목(軍牧)인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근무하던 1946년 유성에서 태어난 김현희는 아버지의 부임지가 바뀌어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살던 마포 서강동 동회에서 윤정식 선생이 부녀자들에게 자수를 가르쳤는데, 마침 그곳에 그의 어머니가 배우러 다녔다.

“어른들이 배우는 곳이어서 어린 제가 낄 수는 없었고, 집에서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해보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윤 선생님이 집에 놀러와서 보시고는 ‘얘는 내가 끼고 가르쳐야겠다’며 저를 개인지도 해주셨어요.”

스승을 만나면서 김현희의 재능과 솜씨는 수로 집중됐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해도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분야를 찾게 마련인데, 그의 성정에는 수가 꼭 맞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작품성을 추구하는 윤 선생님의 가르침 역시 그의 마음에 맞았을 것이고, 깔끔한 성품과 외양은 제자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자가 기억하는 스승은 ‘물 긷고 연탄을 다루면서도 가르치러 오실 땐 모시옷이나 버선, 고무신까지 정갈한’ 모습이었다.

수는 예부터 아름답고 고상한 여자의 세계였고, 그래서 공주님도 수를 놓고 양반집 규수도 수틀 안에 자신을 표현했다. 서양에서도 여자의 수 솜씨는 남성의 칼솜씨와 비교될 정도로 중요한 여성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수가 꼭 여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스승 윤정식 선생은 궁수(宮繡)를 놓던 남자 박(朴) 씨에게 수를 배웠다고 한다.

윤정식 선생은 개성 사람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음에도 어린 나이에 전통 궁수를 먼저 배운 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여학교의 수예 교육은 일본 자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 여파에 시달린 우리 자수계는 한동안 그 잔재를 씻어내기 위해 장인들이 애를 써야 했다. 윤 선생이 궁수를 배우게 된 것은 개성 정화여학교 설립자 김정혜 여사 덕이라고 한다. 김정혜 여사는 부녀자 교육에 뜻을 두고 1908년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사립학교를 세웠는데, 윤 선생은 김정혜 여사가 특히 아낀 인물이었다.

“윤 선생님이 정화여학교에 다녔는지 다른 학교에 다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김 여사님이 윤 선생님을 유학까지 보내주셨답니다. 아무튼 김 여사님이 수예와 주산 등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해 온 사람 가운데 궁중 수방에서 일했던 박 씨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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