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그린피스 항해사, 휴가 땐 난민구조선 선장
삶의 벼랑에서 만난 항해사의 길
1등 항해사 진급 앞두고 ‘돈보다 의미’ 방향 선회
뱃사람, 시민운동가, 코스모폴리탄 3색 인생
한국인 최초 난민구조선장 김연식. [지호영 기자]
그의 직업은 환경 전문 비정부기구(NGO) 그린피스 항해사. 휴가 때는 난민 구조 NGO 시워치(Sea-Watch) 선장으로 변신한다. 평소에는 자연환경을 지키려는 활동가들을 위해 북극, 칠레 등 세계의 오지로 배를 몰고, 휴가를 얻으면 지중해 작은 섬 몰타로 간다. 그곳에서 시워치 소속 배 조종간을 잡은 채 생존을 위해 바다로 나선 난민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이다. 시워치 활동가 중 한국인은 김씨 한 명이다. 아시아인도 그가 유일하다. 그린피스에서도 그는 최초의 한국인 항해사다. 우리나라 청년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열고 있는, 젊은 개척자를 만났다.
아침이 두려웠던 청년
“원래는 평범해도 이렇게 평범할 수 있나 하는 그냥 보통 삶을 살았어요. 그럭저럭 대학에 다녔고, 오랫동안 백수 생활도 했고요.”딱 봐도 ‘착한 젊은이’라고 쓰여 있는 얼굴로, 김씨가 웃으며 한 얘기다. 불과 9년 전, 그는 매일 아침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게 두려운 ‘청년 백수’였다. 신문사 생활을 3년쯤 하다 ‘기자는 내 적성이 아닌 것 같다’며 제 발로 걸어 나온 참이었다. 막연히 해외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녹록지 않았다. 항공사, 무역회사 해외파견직 등에 지원했다 줄줄이 낙방했다. 서른 번쯤 불합격 소식을 듣고 나니 어느새 반년이 흘러 있었다. TV에서는 연일 청년실신(청년실업자나 신용불량자),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같은 신조어가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집에 있으면서 ‘내가 대체 왜 사표를 쓴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쥐어박고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동차 정비라도 배워보려고 무료 직업훈련소를 다니다 매력적인 광고를 하나 봤다. ‘젊은 그대, 바다를 열어라!’라는 문구 아래 전액 국비로 해기사(항해사와 기관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큰 배를 직접 몰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일?! 가슴이 뛰었다. 기자 시절 선원 출신 해양경찰에게 들은 아름다운 바다 풍경 이야기도 떠올랐다. ‘그래, 배를 타자!’고 결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5년 펴낸 자전적 에세이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에서 김씨는 이때의 결정에 대해 ‘세계를 구경하고 싶다는 꿈에 ‘도전’한 건지, 막막한 현실에서 ‘도망’한 건지 불확실하다’고 회상했다. 스스로는 전자의 의미가 컸다 해도 주위에는 분명 후자 쪽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줄곧 학내 언론사에서 활동했으며 직업도 기자였던 ‘책상물림’이 불쑥 배를 타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삶
김씨에 따르면 내놓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뱃일이 얼마나 고된지 아느냐. 요즘에는 해양대 졸업생들도 다른 일을 한다는데 왜 굳이 그 길을 가려는 거냐’고 말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김씨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항해 기술을 배워갈수록 세계 곳곳을 여행할 날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자신도 미처 몰랐을 뿐 그의 마음속엔 늘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직업’에 대한 꿈이 있었음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기자가 된 걸까.“저는 오랫동안 그게 제 꿈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제 적성에 상관없이 남들 눈에 그럴싸해 보이는 걸 고른 것이더라고요. 돌아보면 다 그랬죠. 학문이 좋아 대학에 간 게 아니었고, 영어를 잘하려고 토익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토익 점수는 900점이 넘는데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회사에서는 ‘이렇게 낯을 가리는 내가 과연 기자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갈등하는 직장인이 돼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번만큼은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한번 배를 타면 수개월씩 뭍을 밟지 못하는 ‘뱃사람’ 직업에 대한 부모의 걱정도 모른 척했다. 부산에서 6개월 동안 각종 교육을 받고, 1년간 무급 실습생 신분으로 배를 탔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는 항해사 면허를 손에 쥘 수 있었다. 한국 나이 스물아홉 살 때의 일이다.
물론 여전히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고교-대학 때부터 항해 기술을 익히고 네트워크를 쌓은 여느 항해사들에 비해 나이는 많고 경험은 일천한 상태였다. 현장 곳곳에서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기쁨’이 김씨를 춤추게 했다. 그는 세상 곳곳을 누비는 꿈을 실현하고자 매번 같은 항구만 오가는 정기 상선 대신 부정기 화물선 회사에 취업했다. ‘브라질 산토스에서 설탕을 실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내려주세요. 그다음 인도에서 석탄을 싣고 중국으로 갈 거니까 연료는 가격이 저렴한 싱가포르에서 채웁시다’ 같은 업무 지시를 하는 회사였다.
이곳에 5년간 몸담으면서 그는 32개국 46개 항구에 배를 세웠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세계 곳곳의 오지를 두 발로 걸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꾸미지 않은 삶도 생생히 접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북유럽 라트비아 벤츠필스 해변의 겨울을 떠올렸다.
“바다 전체가 파도 모양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어요. 저 수평선 끝까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아름다웠죠. 매일 보는 바다에 그렇게 감동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나 가장 큰 기쁨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온다는 걸, 그날 그 바다에서 배웠죠.”
청년 항해사, 세상을 누비다
학생들에게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에 대해 설명하고(왼쪽), 시워치 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김연식 씨. [사진제공·그린피스, 시워치]
항해사에게 ‘5년 차’는 큰 의미가 있다. ‘2등 항해사’ 경력을 바탕으로 상급 면허를 취득해 ‘1등 항해사’로 도약할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봉이 50% 이상 오른다. 배의 크기와 면허 종류 등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항해사는 5년간 열심히 배를 타서 ‘1등 항해사’로 승진한 뒤 다시 5년간 경력을 쌓아 ‘선장’으로 진급하고, 이후 10년을 더 일해 ‘도선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도선사는 연봉이 수억 원대로, 지난해 한국고용정보원이 실시한 ‘직업 만족도’ 조사에서 판사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직종이다. 일찌감치 뱃사람을 목표로 삼은 이들에게 도선사는 인생의 최종 꿈이 될 만하다. 그런데 김씨는 달랐다. 출발점부터 그들과 달랐으니, 여정에서도 다른 항로를 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5년간 배를 타면 화물선이 닿을 만한 항구는 거의 다 가게 돼요. 항해사를 시작하며 마음에 품었던 꿈을 이룬 거죠. 그동안 차곡차곡 모은 월급으로 서울에 작은 집도 한 채 샀어요. 그간의 경험을 담아 ‘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라는 책까지 펴내고 나니, 30대 초반에 인생의 절정을 맛본 기분이더군요. 이제 내가 이 생활에서 더 얻을 것이 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직 젊은데 ‘과거의 답습’만 하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죠.”
그 무렵 우연히 본 릭 워렌 목사의 테드(TED) 강연도, 뱃사람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래처럼 김씨의 귓전을 간질였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워렌은 삶을 세 단계로 나눴다. 생존 단계, 성공 단계, 의미 있는 단계. 그러면서 ‘돈이 아닌 무언가에 나를 내어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열린다’고 했다.
“그분이 강연 중 청중에게 ‘당신 손을 한번 살펴보라’고 했어요. 뭐가 있는지. ‘당신 손에 가진 것을 당신을 위해 쓰면 소득이나 지위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어느 순간 공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을 남을 위해 쓰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얘기였죠. 그 순간 내 손엔 뭐가 있나 생각했어요. 젊음, 시간, 그리고 항해사 면허가 있었죠.”
김씨는 이것을 갖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비영리 목적으로 배를 모는 일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눈에 띈 것이 배를 타고 세계 각지를 돌며 환경보호 활동을 하는 그린피스다. 그는 즉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린피스 본부에 지원서를 냈고, 2015년 10월 3등 항해사로 남아메리카 최남단 파타고니아로 항해를 시작했다.
북극의 눈물
시워치의 지중해 난민 구조 현장. 김연식 씨는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 자원봉사자다. [사진제공·시워치]
비영리단체로 옮기면서 직급까지 낮춘 탓에 연봉은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그린피스가 운행하는 선박이 과거 타던 상선보다 작은 까닭에 도선사가 되기도 더 어려워졌다. (우리나라는 6000t급 이상 배에서 5년 이상 선장으로 일해야 도선사 시험을 치를 자격을 준다. 김씨는 한때 8만t급 배에서 일했으나 그린피스가 소유한 배는 2000t급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 길을 택한 건 삶의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화물선 항해사 시절 김씨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배를 몰았다. 그의 진짜 삶은 기착지인 항구에서 비로소 시작됐다. 그린피스에서는 다르다. 매 순간이 바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2016년 불법 참치잡이 배를 추적한 일이 생각나요. 참치잡이 배도 오징어잡이 배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참치를 유인해요. 우리 활동가들이 그 배 가까이로 다가가 등을 친환경 페인트로 칠하려 했죠. 참치잡이 배에서는 고압의 물을 쏟아내 방해하고요. 이런 일을 할 때는 항해 파트의 구실이 매우 중요해요. 활동가의 안전을 지키면서 동시에 목표를 최대한 실현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죠.”
같은 해 북극 빙하 옆에서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피아노 연주를 지켜본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북극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자 이날 루도비코는 무너져 내리는 빙하 옆 보트 위에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 ‘북극애가(Elegy for the Arctic)’를 연주했다. 그린피스는 이 연주를 촬영해 세계에 공개했는데, 이 촬영팀이 탄 보트 운항을 김씨가 맡았다. 바다 곳곳에 무너진 빙하가 떠 있고, 그린피스팀이 있는 곳 바로 근처에서도 빙하가 떨어져 내리는 상황이었다. 다양한 화면을 원하는 촬영기사는 루도비코 쪽만 보며 계속 보트 이동을 주문했고, 김씨는 모두의 안전을 지키며 배를 모느라 혀를 내둘렀다. 떠내려온 빙하 조각 사이에 배가 갇혀 잠시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이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메인 화면에 이 영상이 올라 있는 걸 보고 김씨는 ‘한국에서도 화제가 될 만큼 많은 이의 관심을 끈 환경 캠페인 현장에 있었구나’하며 스스로 뿌듯함을 느꼈다고 했다.
“북극까지 가서 네이버를 보고 계신 거예요?”
기자가 물었다. 그는 “사실 저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씨의 인생행로를 보면 ‘코스모폴리탄’일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한다고 했다. 그린피스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선원법은 선원이 3개월 이상 연속으로 배 타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김씨는 3개월간 일한 뒤 3개월분의 휴가를 받아 한국에 돌아오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오면 파스타 같은 외국 음식은 웬만하면 안 먹고 해외여행도 절대 안 간다. 집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며 지낸다”며 다시 한번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국이 좋으신 분이 휴가를 쪼개 왜 지중해로 가시는 건데요”라고. 그는 “그린피스 동료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본 사진 한 장이 계기가 됐다”고 했다.
내가 선 자리에서
시워치 활동가들이 난민 어린이를 구출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 아래는 ‘시워치에서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알고 보니 그린피스 활동가 중 적잖은 이가 휴가 기간 시워치에서 일하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난민을 구하는 그 단체에서 간절히 원하는 게 배를 몰 수 있는 자원봉사자다. 김씨는 그 글을 보고 ‘세상에 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삯 없이 배를 몰 사람은 드물겠지. 그 일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이야기를 하며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 보였다.“제 손에 가진 게 있잖아요. 젊음, 항해사 면허, 그리고 정기적인 3개월간의 휴가. 사실 저는 그동안 어디 내놓을 만큼 좋은 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을 갖고 이 일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바로 시워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자원봉사 지원서의 빈칸을 채워나갔다.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 많았다. 얼마 후 몰타에 있는 단체 담당자와 화상 인터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을 목도한 경험이 있습니까/ 공황상태를 겪은 일이 있습니까/ 맨손으로 시체를 건질 수 있습니까…’
알고 보니 그는 그동안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온 거였다. 머뭇거리며 답하지 못하는 김씨에게 그 담당자는 “이런 경험이 없다고 해서 시워치 일을 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당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염두에 두라고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라고 했다. 그것이 시워치와의 첫 만남이었다.
슈퍼맨이 되고 싶은 사나이
지난해 4월 처음 찾아간 지중해 몰타에서 김씨는 왜 담당자가 자신에게 그 많은 질문을 쏟아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유튜브 등을 통해 난민 구조 영상을 수없이 찾아보며 마음의 준비를 한 터였지만, 난민들의 비명과 악취, 팔뚝에 매달리는 손길과 안타까운 죽음을 직접 경험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는 “난민구조선을 타고 출항하면 보통 2주간 배 위에 머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고통이 커져간다. 아무리 단련된 자원봉사자라도 열흘이 지날 때쯤이면 항구로 돌아갈 날만 기다린다. 하루에 많게는 네댓 척씩 난민구조선을 발견하고, 그들을 구조해 배에 옮겨 싣다 보면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어선을 개조한 시워치 구조선은 그린피스 배보다도 훨씬 작다. 그가 이곳에서 선장으로 일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가끔은 수백 명의 사람이 오직 생존을 위해 그 위로 올라탄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바로 눈앞에서 생명을 놓치는 경우가 적잖고,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자신을 살려내라고 매달리는 이를 보트로 끌어 올리며 분노를 느낄 때도 있다. 그 바다 위를 떠돌던 어느 날, 김씨는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썼다.
‘지금 솔직한 심정은 어서 돌아가고 싶다. 내 방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다. 나는 평범하고 미숙한 사람이다. 부끄러운 짓도 많이 저질렀다. (중략) 허나 지금은 조금 덜 미숙했으면 좋겠다. 잠깐 슈퍼맨이었으면 좋겠다.’
김씨는 뱃사람이다. 그가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를 말렸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지난 9년 사이, 그는 세상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경험을 했고, 많은 것을 얻었으며, 무엇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고도 그는 여전히 30대다. 그는 “내가 항해 기술을 처음 배우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나조차 ‘20대 후반에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생각,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
탐험대장의 꿈
현재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김씨는 3월 초 그린피스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다. 7월에는 시워치 난민구조선을 운항하러 몰타로 향할 예정이다.“그리고 올해 안에 시워치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을 한 권 쓰고 싶어요. 더 나중에, 나이가 든 후에는 탐험여행 전문 배 선장이 돼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는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김씨가 말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제 직업을 설명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어요. 누가 제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을 때 ‘배를 타요’라고 답하면 보통은 ‘아, 그래요?’ 하고 그만이죠. 저를 약간 낮추보기도 하고요. ‘그린피스에서 일해요’라고 하면 좀 더 호기심을 보입니다. ‘회사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어요’라고 하면 반응이 달라지고요. 일단 ‘우와~’에서 시작해요(웃음). 그런데 이게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저는 알잖아요. 저는 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일을 하는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예요.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지금 자신의 마음과 손을 들여다보세요. 그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