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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한(漢)·흉노 전쟁과 동아시아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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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는 훗날 정(鄭), 진(晉), 연(燕), 노(魯), 제(齊), 위(衛), 송(宋) 등으로 알려지게 된 ‘국(國)’을 받았다. 진(晉)과 같은 제후도 조(趙), 위(魏), 한(韓) 등의 공신을 책봉했는데, 그들은 경(卿) 또는 대부(大夫)로 불렸으며 ‘가(家)’를 받았다. ‘국가(國家)’라는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주(周) 부족은 원래 산시성 서부 빈(豳) 지방에 거주하다가 원시 티베트계 혹은 원시 터키계로 추정되는 융족(戎族)의 압박을 받아 동남쪽에 위치한 기산(岐山) 기슭의 주원(周原)으로 이동해 성곽을 건축하고 국가 형태를 갖춰나갔다. 돼지를 의미하는 ‘시(豕)’가 2개나 들어간 글자로 미뤄볼 때 주나라 사람들은 목축을 하고 산돼지 같은 짐승을 사냥하면서 살아가는 반목반렵(半牧半獵) 부족으로 추측된다. 주나라는 희발의 아버지 희창(姬昌), 즉 문왕(文王) 시대에 이르러 황허 유역의 패자(覇者) 상나라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해 황허의 상류 지류인 웨이수(渭水) 유역의 최강자가 됐다.

희창은 풍을 점령하고 그곳으로 도읍(豊京)을 옮겼다. 풍은 주원보다 더 동쪽에 위치했는데, 이를 통해 주나라는 선진 상나라 문화를 더욱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기원전 1384년 상나라 중흥의 영주(英主) 제19대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산둥성 취푸(曲阜)의 엄(奄)에서 황허 북안(北岸)에 자리한 은으로 옮겼다. 상나라는 주나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13대 270년간 은(殷)을 수도로 삼았다.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는 것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에 있었기 때문이다.



급속·과도한 팽창의 말로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 원인은 황허 상류 지역, 즉 서방에 대한 관심 부족이었다. 주와 소방을 포함한 이 지역 부족들은 빛깔이 아름다운 조개 등 재보(財寶)로 사용되는 산물을 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財)’와 ‘보(寶)’처럼 조개 ‘패(貝)’가 들어간 글자에서 알 수 있듯 색깔과 무늬가 아름다운 조개는 당시의 보물이었다. 상나라군은 무늬가 아름다운 조개와 노예를 획득하고자 동방으로 자주 출정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는 동방 정복에 전념하다가 주나라 동맹군의 급습에 나라를 잃고 말았다. 상나라군이 동방으로 출정한 사이 주나라군에게 배후를 찔린 데다 노예제를 채택한 터라 국민 통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으로의 지나치게 급속한 팽창이 멸망의 주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급속하고도 과도한 팽창(over-expansion)이 국가(또는 조직)의 조기 해체를 야기한 것은 진(秦)나라, 수(隋)나라, 나폴레옹 제국, 히틀러 제국, 소련을 비롯한 국가뿐만 아니라, 대우와 STX 등 우리 기업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산시성 구석의 주(周)라는 조그만 핵(核)이 허난성의 상나라를 병합해 더 큰 핵이 되고, 춘추·전국-진·한(秦·漢)-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구심력까지 갖춘 더욱 크고 강력한 핵이 됐다. 크고 단단해진 핵은 외부 이민족의 공격에 의해 깨지기는커녕 오히려 공격한 이민족을 흡수하면서 더욱 더 커져갔다.



화하족 vs 동이족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춘추전국시대 제작된 장신구. [뉴시스]

4세기 이후 흉노·갈(匈奴·羯), 선비, 저(氐), 돌궐(터키),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이민족이 계속 중국을 침공했지만, 이들은 한족이라는 눈덩이를 더 키워주는 구실을 했다. 한족이라는 눈덩이는 왕조와 시대를 거치면서 더 커지고 커져 마침내 지금처럼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은 화하(華夏) 문명(한문명)과 화하족(한족)의 강화, 확대를 가져왔다. 이는 동이족(東夷族)의 위축은 물론, 한문명의 범위와 한족 규모의 확대로 이어져 아주 멀리는 다링허(大凌河)와 랴오허(遼河) 유역을 근거로 하던 고조선에, 가까이는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가공할 정치, 문화, 인종적 압박으로 작용하는 씨앗이 됐다.

상나라, 주나라 시대와 그 이전 중국의 기후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당시 황허 유역은 아열대 내지 열대 기후로 비가 많이 왔다. 코끼리, 코뿔소, 물소가 살았다. 황허 유역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채집과 사냥을 했다. 기원전 5000년경 탄생한 신석기 양샤오(仰韶)문화가 허난성, 산시(陝西)성, 산시(山西)성 등지로 퍼져나갔다.

양샤오문화 시기 황허 유역 부족 간 격렬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땅과 하천, 목초지, 숲을 빼앗고자 죽고 죽이는 전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전쟁과 함께 종족, 부족 간 연합도 활발히 이뤄졌다. 대체로 황허 상류를 따라 거주하던 사람들이 교류와 전쟁을 통해 화하족을 형성해갔다.

황허 중하류는 동이족이 지배했다. ‘맹자(孟子)’ 이루편에 따르면 순(舜)은 동이 사람이다. 우(禹)는 ‘순’으로부터 선양(禪讓)받아 하(夏)왕조를 열었다. 실체나 왕조 교체 과정 등 하나라와 관련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우의 이름에는 ‘벌레 충(虫)’이 포함돼 있으므로 우는 뱀(蛇)이나 용(龍) 토템 집단의 수장으로 보인다.



“상(商) 주축은 동이족”

황허의 거센 물결 한족에 맞선 고조선

동이족이 사용한 청동도끼. [뉴스1]

일부 중국학자들은 뤄양 부근에서 발견된 청동기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지를 기원전 2070년경 건국됐다는 하나라의 수도로 본다. 그들은 하나라가 우(禹)부터 걸(傑)까지 17제(帝) 472년간 지속됐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에서 초기 형태의 국가가 존재한 것을 보여주는 유적은 발견됐지만, 대규모 성벽이나 문자가 확인되지 않아 그것이 하나라의 유적인지는 불확실하다. 또한 인접한 지역에서 하나라와 다른 성격의 유적도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하나라가 이곳에 존재했더라도 지배 범위와 규모는 매우 협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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