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美 독립선언서 작성 주도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 강조한 이상주의자

  • 최광 대구대 경제금융학과 석좌교수·전 보건복지부 장관

    입력2025-03-0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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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이자 법률가·음악가·철학자·건축가·과학자·발명가…

    • 하루 15시간씩 독서, 24세에 변호사

    • 버지니아주 의원으로 126개 법안 마련

    • “좋은 정부란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

    • 33세에 美 독립선언서 작성 주도

    • 민주공화당 조직해 야당 지도자로 활동

    • 3대 대통령 취임 후 연방파-공화파 갈등 봉합

    • “우리 모두는 연방파이면서 공화파”

    토머스 제퍼슨 초상화. [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

    토머스 제퍼슨 초상화. [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

    많은 이가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에게 찬사를 보낸다. 미국인들은 그를 ‘걸어 다니는 도서관’ ‘위대하고 지적인 대통령’ ‘제국과 자유를 위한 주창자’ ‘예언력이 있는 사람’ ‘철학자 같은 대통령’ ‘미래 미국의 운명에 대한 대변인’ ‘대통령보다 이론에 더 뛰어난 사람’ ‘다재다능한 철학 왕’ ‘자유의 성직자’ 등으로 불렀다.

    제퍼슨은 농부이자 법률가였으며, 작가·음악가·철학자·건축가·과학자·발명가이기도 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다재다능한 사람(Renaissance man)이었다. 제퍼슨은 가문이나 풍채, 교양 등으로 보면 귀족적이었으나 때로는 평민적이었고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제퍼슨의 옷차림과 태도는 너무나 수수하고 점잖았다. 허영과 사치, 자만의 기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번은 뒤축이 닳은 침실용 슬리퍼를 신은 채 영국 대사를 접견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자신을 욕하는 사람에게 신경 쓰기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지식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제퍼슨은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도 정부에 대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명언을 많이 남겼다. 정부의 역할에 대해 “좋은 정부란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를 말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헤치는 것을 막되, 각자 생업에 종사하고 발전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땀 흘려 얻은 빵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국민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정부는 국민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정도로 커지게 된다”며 큰 정부를 경계했다. 그는 “최선의 정부는 가장 작은 정부”라며 미국, 아니 세계 최초로 작은 정부를 주창했다.

    제퍼슨 대통령 삶의 여정

    토머스 제퍼슨 묘비. [위키피디아]

    토머스 제퍼슨 묘비. [위키피디아]

    제퍼슨 대통령은 1743년 4월 13일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그는 1826년 7월 4일, 미국 독립 50주년 기념일에 향년 83세로 타계했다. 그의 묘비에는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 작성자,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자”라고 새겨져 있으며, 묘비에 대통령 직함은 새겨져 있지 않다.

    제퍼슨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부모의 권유로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했다. 10대 때부터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철학 등에서 뛰어난 지식을 갖췄다. 제퍼슨은 1760년, 17세에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College of William & Mary)에 입학해 1762년까지 공부했다. 제퍼슨은 대학에 입학해서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학업에 더 열중해 철학, 수학, 형이상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수석 졸업한 후, 당대 저명한 법률가인 조지 위스(George Wythe)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767년, 24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법률가로 활동했다. 제퍼슨은 청소년기부터 평생 독서를 즐겼지만, 특히 대학 시절과 변호사 수습 시절 7년여 동안은 하루 15시간씩이나 독서에 몰두했다고 한다. 책벌레인 제퍼슨은 6500여 권의 장서를 보유했다.

    제퍼슨은 1769년부터 1775년까지 버지니아주 의회에서 일하면서 해마다 100건 이상의 소송을 맡기도 했다. 제퍼슨은 26세 때인 1769년 식민지 버지니아주 의회(House of Burgesses)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장자 상속제를 폐지하고 종교 자유 법안을 마련했으며 사법제도를 합리화하는 등 3년간 126개의 법안을 기초했다. 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교육 법안을 작성하면서 최초로 미국 대학에서 선택과목 제도를 도입했다. 1776년 33세에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이 됐다.

    이후 버지니아주 제2대 주지사(1779~1781),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1785~ 1789) 등을 역임했다. 대사 시절 당시 미국은 영국과 무역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경제협력을 중시했고, 제퍼슨은 특히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면서 미국의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1789년 프랑스 현지에서 혁명의 시작을 직접 경험하며 초기엔 자유·평등·인권을 내세운 혁명군을 지지했지만, 점점 격렬해지는 폭력 사태에는 우려를 표했다.

    1789년 조지 워싱턴에 의해 발탁된 그는 초대 국무장관(1789~1793)에 취임했으나 존 애덤스(John Adams) 부통령과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재무장관 두 핵심 인물과 국정 비전의 차이로 말미암아 4년 만에 워싱턴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797년 부통령 취임 전까지 제퍼슨은 자신의 몬티첼로(Monticello) 농장으로 돌아가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후 해밀턴이 중심이 된 연방파와 대립이 심화하면서, 제퍼슨은 민주공화당을 조직해 적극적인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1796년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연임 후 물러나자 워싱턴 아래에서 부통령직을 수행했던 애덤스가 연방파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국무장관을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던 제퍼슨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선거인단 수에서 더 많은 인원을 확보한 애덤스에게 패배했다. 최다득표자가 대통령, 그다음 득표자가 부통령이 되는 당시의 선거 방식에 따라 차점자였던 제퍼슨은 제2대 부통령에 오른다. 같은 당에서 정·부통령이 나오지 않고 각기 다른 당에서 정·부통령이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 결과 제퍼슨이 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 애덤스 대통령의 정책에 딴지를 거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1800년 미국 3대 대통령선거에는 당시 2대 대통령이었던 애덤스가 연방파의 후보로, 공화파는 대통령 후보로 제퍼슨, 부통령 후보로 애런 버(A. Burr)가 출마했다. 놀랍게도 제퍼슨과 버가 대통령 선거인단 득표에서 각각 73표로 공동 1위를, 애덤스가 3위를 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선거 결과였다. 헌법에 따라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연방파의 대부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해밀턴은 제퍼슨과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애런 버와는 개인적 감정으로 두 사람 모두 미워했다.

    최종 결정은 연방파가 다수당인 하원으로 넘어갔다. 하원은 해밀턴의 힘에 의해 제퍼슨의 손을 들어줘 결국 제퍼슨은 정적(政敵)의 도움으로 제3대 대통령이 됐다.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800년 선거는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 패배해 대통령의 권한을 반대파에게 넘겨준 최초의 정권교체 사례였다.

    미국 최초의 정권교체와 화합정책

    제퍼슨은 1801년 미국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재선(1801~1809)을 했다. ‘미국사’를 집필한 앙드레 모루아(André Maurois)는 제퍼슨의 대통령 당선을 ‘제2의 미국 혁명’이라 불렀다. 제퍼슨의 취임과 더불어 정치사상이 현실화했기 때문이었다. 제1대 대통령 워싱턴과 제2대 대통령 애덤스가 자유를 신봉했으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고, 3대 대통령 제퍼슨은 미국 민중을 신뢰했다.

    제퍼슨은 8년의 대통령직을 마친 후 버지니아 자택 몬티첼로로 돌아가 농장에서 생활하며 농업 개혁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 새로운 농업기술을 연구하고 실험했다. 퇴임 후 제퍼슨은 당시의 많은 명사와 서신을 활발히 교환했는데, 1년에 평균 1000여 통의 편지를 썼다. 제퍼슨은 1815년 6500권의 방대한 개인 장서를 미국 국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에 기증했다.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제퍼슨은 1819년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를 창립했는데, 단순히 학교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총장으로 대학 건물의 설계, 커리큘럼 구성, 교수진 선정까지 직접 관여했다. 버지니아대는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는 최초의 공립대학 중 하나로, 자유로운 학문 연구를 장려했다.

    버지니아대 캠퍼스의 토머스 제퍼슨 동상. [Gettyimage]

    버지니아대 캠퍼스의 토머스 제퍼슨 동상. [Gettyimage]

    ‌초대 대통령 워싱턴 8년과 제2대 대통령 애덤스의 4년 도합 12년간 미국은 연방파가 집권했는데 공화파의 제퍼슨이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대통령 중심제의 미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제퍼슨이 당선되자 일부 연방파는 그동안 공화파를 사사건건 괴롭혔기 때문에 불안해했다. 하지만 제퍼슨은 취임사에서 “우리 모두는 연방파이면서 공화파”라고 하면서 정치 보복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제퍼슨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연방파가 집권하면서 범한 실정(失政)을 일절 지적하지 않았으며, 초대와 2대 대통령의 중립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천명했다. 당시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임명할 수 있는 300여 개의 직책은 대부분 연방파가 이미 차지하고 있었는데, 제퍼슨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인사를 하며 자신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특히 대선에서 패배한 연방파의 애덤스는 자신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국무장관으로 있던 마셜(J. Marshall)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전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마셜이 임기 내내 제퍼슨 행정부를 견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끝까지 그를 존경했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지 3년이 지난 1803년 말이 돼서야 공화파가 300여 개의 공직 중에서 절반 정도를 임명할 수 있었다. 제퍼슨은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고 아름다운 민주주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 정치 보복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미국 역사상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 가운데서도 제퍼슨만큼 안정된 내각을 꾸린 사람은 없다. 단지 법무장관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 2차 내각의 각료는 1차 내각과 동일했다. 제퍼슨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8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는데, 지금껏 재임 기간 중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다.

    제퍼슨의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은 그가 1777년에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초안을 작성하고 독립전쟁 후 1786년에 통과시킨 “종교에 대한 세금은 불법이며, 그것은 단지 종교의 자유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의 ‘버지니아 종교자유 법안(Virginia Statute for Religious Freedom)’을 마련한 것이다. 이 법에 따라 영국 국교회가 폐지되고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가 인정됐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기초가 되는 문헌이다.

    제퍼슨은 자서전에서 ‘버지니아 종교자유 법안’을 자신의 가장 두드러진 기여 중 하나로 꼽았다. 그래서 제퍼슨의 묘비명에 ‘버지니아 종교자유 법의 저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버지니아 종교자유 법안에 이어 제퍼슨은 미국 헌법에 제1차 수정헌법을 삽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미합중국 의회가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자유로운 예배를 금지하거나 하는 법률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체성과 운명을 둑립선언문에 담다

    제퍼슨은 변호사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33세에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미국 독립의 이상과 가치 그리고 향후 미국의 정체성과 운명을 함축적으로 담은 독립선언문을 1776년에 작성했다. 존 애덤스(J. Adams)가 제퍼슨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했기에 제퍼슨이 초안을 잡고 애덤스와 벤저민 프랭클린(B. Franklin)이 약간 수정한 후 독립선언문이 완성됐다.



    미국 독립선언문. [위키피디아]

    미국 독립선언문. [위키피디아]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에서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 비전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와 국민 참여를 강조했는데, 이는 이후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 됐다. 독립선언문은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에서 채택됐고, 8월 2일 13개 주에서 온 대표자 56명이 서명함으로써 확정됐다. 이로써 미국의 13개 식민지 주가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했다. 미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약 8년간에 걸친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을 통해서 완전한 독립국가가 됐다. 발표될 당시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독립선언문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결정체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서로 미국에서 연방헌법 다음으로 존중받고 있다.

    제퍼슨은 대학 시절 은사였던 윌리엄 스몰(William Small) 교수를 통해 영국과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자(특히 존 로크,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상을 접하게 됐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존 로크(John Lock)의 정치철학, 특히 ‘통치론(Two Treatises on Government)’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로크가 “모든 인간은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연권”이라고 주장했는데,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서 이를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창조주는 그들에게 생명,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라고 명기했다. 로크의 ‘재산’이 ‘행복 추구’로 바뀌었지만, 기본 개념은 동일하다. 로크가 “정당한 정부는 국민의 동의에서 나온다(consent of the governed)”고 한 것을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서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국민의 동의에서 나온다”고 명시했다.

    우리가 통상 독립선언서라 부르는 문건의 원문 제목은 ‘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로 번역하면 ‘아메리카 13개 주에서 공동 발표하는 만장일치 선언’이다. 오늘의 미국 국명 ‘United States of America’와는 다르게 ‘united’란 단어가 소문자로 돼 있다. united는 단지 주들의 연결을 형용하는 데 쓰였을 뿐이다. 따라서 독립선언서는 미국의 독립 선포가 아니고 북미 식민지 13개 주가 영국 식민 법률에 독립해 더는 영국 법률과 정치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글이다. 독립 선언에 이어 1787년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이 채택되고, 새 헌법에 따라 미국 연방의회가 구성됐다. 1789년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미국 건국이라는 대장정이 완성됐다.

    미국 최초, 세계 최초의 작은 정부주의자

    제퍼슨은 연방정부의 지나친 권력을 축소하고,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등 공화파의 이상을 추구했다. 제퍼슨은 정부의 힘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고 보고, 정부의 영향력이 최소화되는 작은 정부가 더 바람직하다고 봤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할 정도의 강력한 군대를 갖기보다는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대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연방정부의 힘은 가능한 한 작은 것이 미국의 장래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은 미국의 각 주는 식민지 시기에도 거의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을 정도로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연방정부가 각 주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퍼슨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과 2대 대통령 애덤스가 재임하는 동안 연방정부가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졌다고 생각했다. 1793년과 1800년에 걸쳐 정부 지출이 거의 3배로 늘었고 공채도 증가했다. 제퍼슨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스스로를 개선해 나가며 독자적이기 때문에, 개인은 기관이나 제도가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을 돌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제퍼슨은 개인의 자유와 지방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가능한 한 연방의 지배를 최소화하려고 했다. 그가 대통령 재직 중에 가장 깊이 고민한 것은 중앙정부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었다. 즉 주의 권한이 연방의 권한을 능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좋은 정부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영위하도록 하는 정부라고 봤다. 그간 늘어난 국채를 상환하기 위해 불필요한 정부 인력을 정리하고 전쟁을 회피할 것을 역설했다. 제퍼슨은 부실한 재정이 위험한 중앙 집중을 가져오고, 불필요한 세금 신설과 부정부패를 초래하며, 농업보다는 제조업과 공업에 편중된 경제를 창출할 것이라 봤다. 제퍼슨은 미국의 국채(國債)를 ‘원죄’로 여겼으며, 부채를 없애는 일을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제퍼슨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곧바로 연방정부의 관료를 대폭 줄임으로써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육군과 해군 등 정규 상비군의 규모를 절반 정도로 축소했으며, 그의 충직한 재무장관 갤러틴(Albert Gallatin)은 연방정부 세입을 연 1060만 달러로 책정하고, 육해군의 경비를 절약하면 세출은 350만 달러면 충분하다고 보고, 700만 달러의 국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했다. 제퍼슨의 취임 이후 2년 만에 국가 부채를 8억3000만 달러에서 4억5000만 달러로 축소해 부채를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제퍼슨은 대통령 주변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던 화려한 행사와 볼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일체 금지했다. 제퍼슨은 소박한 스타일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기보다는 연방정부의 중요성을 덜 부각하려고 했다. 그는 취임식 때도 혼자 터벅터벅 걸어 나왔으며, 워싱턴과 애덤스가 군복을 선호한 것과 달리 평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관례적인 취임식 기념 파티를 열지 않고 관사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제퍼슨은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을 미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생겨난 각종 과도한 제도적 장치들을 정리하는 기회로 여겼다.

    제퍼슨은 연방의회를 설득해 관세와 서부 지역의 토지 판매세만 연방정부의 세입으로 남기고 모든 내국세를 폐지했다. 이러한 일들은 미국 인구가 증가하고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나는 동안 이뤄진 것이었다. 최소한의 상비군을 제외한 군사력은 시민의 자유와 정부의 통치에 오히려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제퍼슨의 확신이었다.

    제퍼슨과 해밀턴의 밀약으로 탄생한 미국의 수도

    오늘날 미국 수도가 워싱턴 DC로 결정된 것은 1790년 제퍼슨과 해밀턴 간 밀약의 결과다. 건국 후 뉴욕시가 임시 수도로 지정됐는데 미국의 영구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펜실베이니아주와 버지니아주가 명예와 실리를 따져 수도를 자기 주로 끌어가려고 경쟁했다. 당시 독립전쟁 중 발생한 주정부의 채무를 연방정부로 이전하는 문제가 정치적 논쟁거리였는데 재무장관 해밀턴이 의회에 제출한 재정 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됐다.

    이에 해밀턴은 제퍼슨에게 자신이 제정한 법안에 찬성해 주면 수도를 포토맥 강변으로 하는 것에 북부가 찬성하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즉 해밀턴은 제퍼슨이 중심인 남부의 의원들에게 수도를 필라델피아에서 남부로 이전하는 대가로 북부가 원하는 재정 법안의 통과 동의를 받아냈고, 제퍼슨은 수도를 남부로 옮기는 것을 얻으며 재정 법안의 통과에 동의했다.

    제퍼슨-해밀턴 밀약은 연방 주요 재정정책과 정부의 중요한 결정에 대한 타협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로써 1790년 주거법(Residence Act)이 통과돼 수도가 현재의 워싱턴DC로 정해졌다. 1791년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지시로 프랑스 건축가 피터 찰스 랑팡(Sir Peter Charles L’Enfant) 경에 의해 새 연방 수도의 설계가 완성돼 오늘에 이르렀다.

    제퍼슨은 대통령 임기 중인 1803년에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했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와 서부 플로리다를 사들일 결심을 하고 전임 주(駐) 프랑스 대사 먼로(James Monroe)와 당시 현임 주프랑스 대사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에게 협상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는데, 프랑스가 자체의 군사적·재정적 이유로 방대한 지역을 미국에 팔기로 선뜻 동의해서 매입이 성사됐다.

    아메리카 대륙 동쪽의 미시시피강에서 서쪽의 로키산맥에 달하는 루이지애나는 대략 오늘날 미국의 중부 지역이다. 이 지역은 100년 넘도록 프랑스와 에스파냐(España)가 번갈아 가며 소유했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 결정은 그가 대통령 재직 중 거둔 최대 업적으로 남북전쟁에 승리한 링컨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영토 확장해 강대국 발판 마련

    제퍼슨은 나폴레옹 정부로부터 214만4510㎢(82만8000평방마일)의 땅을 1500만 달러(6000만 프랑)에 사들였다. 1에이커(4046㎡)당 3센트의 가격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원래 뉴올리언스를 사겠다고 했는데 나폴레옹은 영국에 빼앗기느니 루이지애나 땅 전부를 사라고 제안했었다. 미국 대표단은 생각지도 못한 싼 가격에 놀란 나머지 본국에 보고할 틈도 없이 협상을 서둘러 종료했다.

    나폴레옹 정부로부터 매입한 루이지애나는 212만km²에 달했는데,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의 주요 국가를 합친 면적보다 더 넓었다. 그 결과 미국의 영토가 두 배나 확대됐다.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후 제퍼슨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다. 루이지애나를 얻음으로써 미국 영토는 두 배 이상 커졌고, 미시시피강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은 물론 서부의 경제적 발전까지 도모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군사적 안전보장까지 강화할 수 있었다.

    골수 연방파는 쓸모없는 불모지를 사들인 것은 재정 낭비이며 대통령의 월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루이지애나를 매입함으로써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질 수 있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동부에 머물러 있던 미국이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고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제퍼슨의 입장에서는 루이지애나 매입은 참으로 기묘한 모험이었다. 첫째로 매입 금액이 엄청 컸다. 제퍼슨 자신이 재정 긴축주의자인데 당시 미국 예산 1000만 달러의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으로 루이지애나를 매입했다. 둘째로 매입 행위 자체가 헌법에 위배됐다. 외국 영토를 매입하고 그곳 주민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는 것은 대통령 권한 밖의 일이었다. 제퍼슨은 이러한 결정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퍼슨은 비준에 앞서 헌법을 개정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염려에서 협상에 나선 먼로와 리빙스턴에게 협상할 것을 독촉한 후 대통령이 먼저 서명했고 상원은 이를 사후에 비준했다.

    제퍼슨은 국민의 자유를 확립하는 데 어떠한 외부적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에 의한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제퍼슨을 비롯한 공화파가 꿈꾸는 미국의 미래는 덕성(德性)을 갖춘 계몽된 시민이라는 개념이 핵심이었다. 교육을 통해 국민이 판단력을 길러 각자의 견해를 자유로이 표현하게 되면 국가의 안녕과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모든 국민이 무료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공립학교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 신념 따라 역사교육의 중요성 강조

    제퍼슨이 교육의 중요성을 중시한 것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 인권 철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인권과 자유의 이념을 통해 교육이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고, 자유와 정의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제퍼슨은 공립학교 교육을 지지했고, 대학을 설립했고, 교육 자료의 보존과 확장을 강조했다.

    교육 중에서도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퍼슨이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민주주의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제퍼슨은 민주주의 사상을 중시하고,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민중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이를 행사할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역사적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둘째, 시민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제퍼슨은 시민이 자신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책임감 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역사교육은 시민의식을 형성하고,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봤다.

    셋째, 문화적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제퍼슨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와 그 문화적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의 결정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믿었다.

    넷째, 자유와 독립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제퍼슨은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데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교육을 통해 이러한 가치를 강조해 가르치려 했다. 제퍼슨은 국민이 과거를 앎으로써 스스로 미래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교육을 통해서 자유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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