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개혁, 여야 86세대의 은밀한 야합 

[노정태의 뷰파인더] 한국 미래를 팔아 용돈으로 쓰겠다고 ‘합의’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5-03-27 17: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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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도입 당시 고학력, 고소득자 위주 연금 가입

    • 연금 가입 했던 이들 = 고학력에 좋은 직장 취직했던 86세대

    • 국민연금 개혁 이득 독차지, 여야 86세대 “우리가 남이가”

    “청년들의 지적은 단지 좀 더 많이 낸다는 불만이 아닙니다. 연금을 낼 때와 받을 때의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국민연금 전체에 대한 신뢰와 나아가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3월 23일 국민의힘 김용태·김재섭·우재준, 더불어민주당 이소영·장철민·전용기 의원과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 겸 당대표 권한대행과 이주영 정책위의장 등 8명의 30·40대 국회의원이 개최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이다. 3월 20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서명한 국민연금 개혁 합의에 대한 공식적인 반발이 불거져 나왔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수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 우재준 국민의힘 의원, 천하람 개혁신당 대표 권한다행, 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왼쪽부터) 등 '더 나은 연금개혁을 요구하는 국회의원' 여야 의원 7명이 3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연금개정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DB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수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 우재준 국민의힘 의원, 천하람 개혁신당 대표 권한다행, 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왼쪽부터) 등 '더 나은 연금개혁을 요구하는 국회의원' 여야 의원 7명이 3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연금개정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DB

    어느 나라건 연금에 손을 대는 일은 매우 어렵다. 수많은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가령 2023년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는 은퇴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연금개혁을 추진했다가 항의에 부딪혀 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연금개혁은 어려운 만큼 중요한 일이다. 차일피일 연금개혁을 미루던 그리스는 정부 적자의 50%를 연금이 차지하게 됐고, 결국 국가 부도에 이르렀다.

    18년 만에 여야 합의로 연금개혁이 이뤄진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일단 환영할 일이다. 여야 합의를 통 보기 어려웠던 요즘 정치 풍토 속에서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왜 청년층의 반발이 이토록 거셀까. 왜 젊은 의원들이 ‘여야 합의’로 반대하고 나선 걸까.

    ‘더 내고 더 받는’ 현행 연금개혁안은 불공정하다. ‘더 내는’ 주체는 40대 이하인 반면 ‘더 받는’ 주체는 현재의 50대 이상이기 때문이다. 역피라미드꼴이 되어버린 인구 구조를 놓고 볼 때 현재의 2030 청년들은 50대 이상을 위해 국민연금을 더 내다가, 본인들이 노인이 된 시점에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못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국민연금 문제를 단지 ‘세대 간 불공정’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연금개혁은 한국 정치적 갈등을 재구성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갈등을 다루는 일

    정치란 무엇일까. 이상적 당위가 아닌 현실 속의 정치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다. 정치란 현실 속의 인간들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두고 다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치란 ‘갈등’을 다루는 기술이다.

    미국 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정치학의 거장 E. E. 샤츠슈나이더는 저서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는 파벌·정당·집단·계급 등 사람들이 나누어지는 방식에 달려 있다. 정치라는 게임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잠재된 갈등 가운데 어떤 갈등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와 갈등의 구도는 인위적으로 변한다. 다양한 갈등의 우선순위가 변하면서 정치 구도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샤츠슈나이더의 주장에 따르면 갈등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수행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현대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잠재되어 있지만, 오직 몇몇 갈등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정치는 갈등들 간의 지배와 종속을 다룬다. 민주주의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잠재된 갈등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정치 갈등의 축은 때로 대대적으로 바뀐다. 말하자면 ‘정치적 대격변’이 벌어지곤 한다. 미국의 예를 먼저 들어보자. 미국의 민주당은 1960년대까지 백인, 그 중에서도 남부 백인을 표밭으로 삼고 있는 보수정당이었다. 반대로 공화당은 남북전쟁 당시 링컨의 소속 정당이었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듯, 미국의 동북부 산업지대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인종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구도는 린든 B. 존슨 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고 ‘위대한 사회’ 정책을 추진하면서 급변하게 된다. 1960년대 당시 미국을 뒤흔든 민권법 운동의 흐름 속에서,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남부 백인을 버리고, 대신 유색인종과 대도시의 고학력 중산층을 겨냥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반대로 공화당은 민주당이 버리고 간 유권자층을 흡수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와 농촌 등에 사는 백인의 정당이 됐고, 인종, 인권 문제 등 문화적 사안에서 보수적 정당으로 재탄생했다.

    린든 존슨 전 미국대통령. 위키피디아

    린든 존슨 전 미국대통령. 위키피디아

    ‘지역감정’도 정치적 갈등 이용한 사례

    한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당 이야기다. 1963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 전 대통령(당시 육군 소장)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당시 육군 중령)를 중심으로 창당된 공화당은 호남과 영남을 막론하고 농촌 지역에서 더 큰 지지를 받았다. 반면 그들과 맞선 민주당 구파(구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출신 인사들)는 호남과 기호 지방의 지주 세력으로 이뤄져 있었고, 대부분은 서울에 거주하는 부자들이었다. 바로 그런 면이 표심에 반영돼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지방 표심’의 힘을 빌어 박 전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서울 표심’을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지방 대 서울’의 정치 구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과 공화당이 추진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의 축을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과 기회를 제공하는 일자리가 영남에 편중되면서 호남 사람들의 박탈감이 커졌고, 반대로 영남 사람들은 호남을 향한 견제 의식 혹은 경계심을 품게 됐다. 정치권은 그러한 갈등을 자신들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며 각 지역별 ‘맹주’가 지배하는 지역 갈등 구도를 정착시켰다.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갈등의 축이다.

    이런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뤄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인위적으로 벌어진다. 존슨 전 미국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정책으로 인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 기반이 뒤바뀐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전통적 지지 기반을 잃을 우려가 있음을 알면서도 당위적으로 올바른 정책을 추진한 존슨 대통령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민주당에게 더 많은 유권자를 확보하게 해주는 결과를 낳았을 따름이다.

    영‧호남으로 나뉜 한국의 지역 갈등 구도도 같은 관점에서 짚어볼 수 있다. 수출 항구인 부산과 그 주변 영남권을 중심으로 산업 단지가 기획된 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격차 등을 정치적 차원에서 활용한 것은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 인위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이다. 1992년 12월 11일 정부 기관장들이 부산의 한 음식점에 모여 선거를 위해 지역감정을 더 부추기자고 결의할 때, 그들은 지역감정을 갈등의 축으로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국민연금 수혜자, 상위 중산층만 대변하는 ‘늙은 정치’

    그런 면에서 이번 국민연금 개혁은 한국 정치 역사상 매우 특별한 사건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갈등의 축이 전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흔히 거론되는 ‘세대 갈등’과는 또 다른 양상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고학력 고소득‧고자산 중년층이 여야를 막론하고 서로 손을 잡은 채 그 외 모든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정치적 결정을 내렸으니 말이다.

    이번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반발을 ‘2030 세대의 불만’ 정도로 묘사하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사태를 논하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갈등의 축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소득과 자산’의 문제, 더 나아가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이 처음 도입된 때는 1988년이었다. 당시에는 지역가입자 제도가 없었다. 중소기업 종업원 역시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국민연금에 가입하려면 소위 ‘번듯한 직장’을 다녀야 했다는 뜻이다. 결국 갓 사회에 진출해 좋은 일자리를 차지한 고학력층, 다시 말해 86 세대가 국민연금 제도의 최대 수혜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금개혁안을 청년 세대가 결코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초원복집 사건에 비유해 말하자면 이는 여야를 막론한 50대 이상, 특히 86세대가 의기투합해 ‘우리가 남이가!’라고 건배를 한 것과 마찬가지다. 소속 정당이 달라도 같은 연령대와 세대에 속하는 그들은 국민연금이라는 사안 앞에서 같은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번 국민연금 개혁은 ‘노인이 더 받고 청년이 더 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86세대가 더 받고 나머지 국민이 더 내는, 개혁이라기보다는 ‘개악’이라 불러 마땅한 사건이다. 앞서 2월 25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국회 앞에서 열었던 기자회견은 이번 연금개혁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참여연대, 공공운수노조로 이뤄진 그들은 소득대체율을 43%도 아닌 50%까지 높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들이 2월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거대 양당 연금개혁 졸속합의 시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들이 2월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거대 양당 연금개혁 졸속합의 시도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주지하다시피 이 단체들은 특정 세대와 특정 계층의 이해관계를 강하게 대변하고 있다. 말하자면 특수한 이익집단이다. 그들이 가장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선두에 서 있다는 것은 40%까지 낮추기로 했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3%로 도로 올리는 정책 결정이 민심의 올바른 반영과 거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샤츠슈나이더를 인용해 보자.

    “이익집단 이론의 심각한 문제점은 그것이 이익집단 체제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을 숨긴다는 데 있다. 다원주의가 지향하는 천국의 문제는 천상의 합창에서 상층계급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는 것이다. 대략 인민의 90% 정도는 이익집단 체제에 들어갈 수 없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에 가입해 있는 사람들, 진작부터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연봉과 탄탄한 복지 혜택을 누려온 사람들, 그래서 국민연금에 일찍 가입해 많은 돈을 낼 수 있었던 소수의 혜택 받은,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사람들. 이번 국민연금 개악은 여야가 합심하여 바로 그런 이들의 편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전통적으로 영세 자영업자와 저학력 저소득 노년층의 편이었던 보수정당까지 내일을 걱정하기는커녕 오늘만 생각하는 정치에 조응한 셈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번 국민연금 개혁은 대한민국의 최근 수십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곡점이다. 정치적 갈등의 핵심 축이 ‘영남과 호남’에서 ‘86세대와 그 이후 세대’로 나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갈등의 축을 ‘청년 대 어르신’ 구도로 보는 것은 사안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좀 더 크고 본질적 계급 정치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현재 국민연금의 수혜자인 상위 중산층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늙은 정치’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팔아서 자신들의 용돈으로 쓰겠다고 ‘합의’를 본 것이다.

    이것은 실로 심각한 난세다. 하지만 모든 난세가 그렇듯 영웅이 되고 싶은 이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갈등의 축에서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모아 보다 바람직한 사회보장제도를 지닌 대한민국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큰 정치인의 출현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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