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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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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3년 8월 백제-왜 연합해군이 중국과 한반도, 일본 세력이 모두 관여한 동북아 최초의 국제해전에서 대패했다. 백제와 왜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왜의 건국에 관여했다가 웅진 시대를 전후해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백강 대해전은 660년 황산벌 전투 3년 후 발발했다. 사진은 영화 ‘황산벌’ 스틸컷.

고구려가 수·당 교체기(615~625)를 틈타 4세기 모용선비족의 전연·후연(前燕·後燕)처럼 화북으로 진출했다면 관동(허베이, 허난, 산둥, 산시 등)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베이는 고구려 영토와 접했고, 거란·해, 돌궐, 말갈 등 새외민족 수도 많았으며, 산둥반도는 랴오둥반도와 지척의 거리로 고구려 해군력으로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나 국제정세에 비춰볼 때 고구려는 전연·후연과 달리 점령지를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고구려는 후방이 튼튼하지 못하던 선비족과는 달리 랴오허-압록강-대동강-예성강 유역이라는 튼튼한 후방기지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의 실기

그럼에도 고구려가 관동의 범위를 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수백만 명에 불과한 고구려인 중 화북 점령과 통치를 위해 상당수가 떠나면 본거지가 백제, 신라, 말갈 등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가 수(隋)와의 16년에 걸친 전쟁으로 고통받았고, 남쪽의 도전 세력인 신라에 대한 반격이 긴요했다 해도 수·당 교체기에 중국 내부 동향을 수수방관한 것은 큰 실책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전란에 개입해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중국 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고구려 △중국 △돌궐계 설연타(薛延陀) 등 몽골고원의 유목국가 간 정족지세(鼎足之勢)의 세력균형을 만들었어야 했다.

영류왕(재위 618~642)을 비롯한 고구려 지도부는 중국에서 수십 년간 전란이 지속되거나 최소한 3, 4개 나라로 분열될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지나치게 소극적인 대(對)중국 정책은 당에 틈을 내줬으며, 도리어 고구려는 당의 분열정책에 놀아나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상잔(相殘)을 벌인 끝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630년 몽골고원에 자리한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키고, 인근 북방민족 수장들로부터 농경-유목 2개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가진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는 등 국력을 급속히 강화했으나 고구려는 수·당 교체기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동돌궐을 제압한 당나라가 압박해오자 631년 초가 돼서야 북부 부여성(扶餘城)에서 보하이만(渤海灣)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해 7월 당(唐)은 고구려가 조성해놓은 랴오시 경관(景觀)을 파괴했다. 경관은 고구려 침공전에서 전사한 수나라 병사의 해골을 모아 쌓은 것으로 일종의 전승탑이다. 고구려 지도부는 당의 도발에 긴장했으며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했다.



멸망 위기 직면한 신라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2010년 10월 2일 충남 논산시 논산천 둔치에서 열린 ‘황산벌전투재현’ 에서 백제5000결사대와 신라-당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현되고 있다.[뉴시스]

의자왕은 642년 8월 부여윤충(扶餘允忠)에게 1만여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합천)을 공략하게 했다. 대야성이 함락된 후 신라는 낙동강 우안(右岸) 영토 대부분을 백제에 빼앗기고, 낙동강 좌안(左岸) 압량주(경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압량주에서 수도 월성(경주)까지의 거리는 40~50㎞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는 고구려 전선에서도 밀려나 동해안 국경이 하슬라(강릉)까지 축소됐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 위기에 직면한 신라는 김춘추를 파견해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유신을 압량주 군사령관으로 임명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642년 가을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고구려 연개소문이 군사지원을 거부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매달렸다. 당나라는 태종이 직접 지휘한 645년 고구려 침공전에서 패배하자 신라를 이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랴오허와 한강 2개의 전선에서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645년 나카노오에 왕자(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 왜국(倭國)은 당나라를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大化 改新)’을 추진하면서 당나라의 동맹국 신라와 다소 가까워졌다. 압량주까지 후퇴하며 멸망의 위기에 몰린 신라의 김춘추가 직접 왜와 교섭했지만,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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