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이 사라진 시대…美가 마두로 생포한 이유
노동자 불만 읽은 트럼프, 그런데 한국은…
혁신안 발표한 장동혁호(號), 시대정신은 외면
‘윤석열 늪’에 허우적거리며 與에 산업화 의제 잠식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025년 11월 25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추모관에서 분향하고 있다.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마두로 정권이 자국민을 경제적으로 핍박하고 있고, 미국에서 대규모 마약 판매를 기획하고 방조했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진짜 이유로 베네수엘라 원유를 꼽는다. 베네수엘라에 원유가 많이 매장돼 있다는 건 익히 알려졌다. 예상 매장량은 3000억 배럴 안팎으로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다.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5분의 1 수준이다.
제조업이 사라진 시대…美가 마두로 생포한 이유
셰일 혁명으로 세계 최대 원유·천연가스 수출국이 된 미국이 베네수엘라 원유를 탐낸 건 단순히 탐욕 때문이 아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서부텍사스유나 셰일 오일은 경질유다. 이름처럼 ‘밀도가 낮은 기름’으로, 주로 휘발유 등 연료를 만드는 데 쓴다. 반면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는 기름은 황 함량이 높고 점성이 매우 큰 중질유다. 경질유와 섞어서 연료로 활용하는 한편 부산물로 아스팔트·시멘트 등을 만들기도 한다.미국은 과거부터 원유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른바 ‘석유 고갈론’이 부상하면서 원유 수입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 건 베네수엘라산 중질유였다. 미국 기업들은 이에 맞춰 남부지방에 중질유 정제 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던 중 2010년대 셰일 혁명이 일어나 신규 공급원이 급증하며 사업성이 떨어졌다. 설상가상 2019년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제재로 원유 수입이 중단되며 많은 정제 시설이 가동을 줄이거나 멈췄다. 지역 경기는 침체됐다.
흔히들 트럼프 대통령을 미치광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전략은 일관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겠다는 것. 그는 낙후된 미국 제조업을 재건하고 노동자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중질유 정제 시설이 대거 위치한 텍사스·루이지애나는 북동부 ‘러스트벨트’와 함께 트럼프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다. 베네수엘라산 중질유 수입이 재개되면 이 지역에 활기가 돌 것으로 예상된다. 더군다나 관세정책이 물가상승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11월 중간선거가 예정돼 있는데 물가가 튀어오르거나,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금리가 인상되는 건 트럼프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다. 관세를 부과하면서도 물가상승을 억제하려면 다른 비용을 낮추는 수밖에 없다. 그게 에너지다.
처음보다 오른쪽으로 가긴 했지만, 마가(MAGA) 정치인들의 주요 지지기반은 계층으로는 중하위층 노동자, 지역으로는 미국 중부와 남부에 걸쳐 있는 낙후 지역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세계화의 충격을 직격으로 맞았다. 1970~80년대 인플레이션으로 인건비와 금리가 상승하면서 미국·유럽의 경제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이들이 찾은 해법은 세계화였다. 생산기지를 동아시아 신흥국으로 이전함으로써 비용 절감을 꾀한 것이다. 때마침 구소련이 붕괴되며 동유럽 지역에서도 값싼 인력이 쏟아져 나왔다. 화룡점정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었다. 13억 인구가 세계 시장에 등장하면서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크게 낮아졌다. 덩달아 물가도 안정됐다. 전에 없던 디플레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노동자 불만 읽은 트럼프, 그런데 한국은…
세계화는 곧 분업이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이 기획하면 한국·일본 등 후발 산업국이 소재·부품·장비 같은 중간재를 대고 중국·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이 조립하는 시스템이다. 이 글로벌 가치사슬 안에서 서구 선진국들은 속된 말로 잘 먹고 잘살았다. 자신들이 노력한 것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챙겼다. 이는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은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공인구로 사용된 ‘피버노바’를 기억하는가. 피버노바는 그 시절 한국에서 무려 15만 원에 팔렸다. 하지만 그 축구공을 만든 파키스탄 소년에게 쥐어진 수당은 공 하나당 몇백 원 수준이었다.역사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서구 사회가 세계화를 통해 누렸던 과거의 풍요는 오늘날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바로 실업이다.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에서는 20년간 600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충격은 특정 지역에 더 집중적으로 가해졌다. 애팔래치아산맥을 따라 형성된 공업도시들은 쇠락했고, 일자리를 잃은 지역민들은 마약에 빠져들었다. JD 밴스 미 부통령이 자신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에서 그린 오하이오주 미들타운도 그런 도시 중 하나였다.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때 중부 어딘가의 노동자들이 느꼈을 박탈감과 상실감은 대단히 컸을 것이다. 미국의 주류 정치권은 그들의 분노를 기민하게 읽어내지 못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024년 11월 ‘트럼프가 민주당의 온도조절장치를 부쉈다(Trump broke the Democrat’s thermostat)’라는 기사에서 미국의 양당이 누구를 대변하는지 분석했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들은 1948년부터 2012년까지 모든 선거에서 민주당을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해 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인 2016년부터 이러한 인식이 뒤집혔다. 미국 유권자들은 이제 민주당을 노동자가 아닌, 소수자 권익을 옹호하는 정당으로 여기고 있다는 게 기사의 요지다.
실제로 미국 진보진영에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기를 거치며 계층보다 유색인종·성소수자 등의 권익을 옹호하는 정체성 정치가 주류로 부상했다.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이 여성의 유리천장을 강조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실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노동자 계층에게 힐러리의 구호는 사회 최상층에 있는 엘리트의 배부른 소리로나 들렸을 것이다. 그 분노를 읽은 트럼프는 해외로 나간 공장을 불러들이고 불법 이민을 막아 일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덕분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단아로 취급됐던 그는 노동자 계층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올랐다. 트럼프가 1기 임기 말 의회 점거를 선동하는 ‘막장 정치’를 보여줬음에도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분노가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이미 떠난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장만 하나 가져온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 자동차 업체 폴크스바겐은 지난해 12월 16일 창사 이래 처음으로 독일 내 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전기차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주된 이유로 꼽힌다. 단순히 폴크스바겐만 전기차를 못 만드는 거라면 돈과 인력을 투입해 기술력을 높이면 된다. 하지만 자국 내 공급망이 무너진 상태라면 한 회사가 잘하는 것 가지고는 산업을 일으킬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진영을 초월해 이 산업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채찍(관세)이냐 당근(보조금)이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2025년 5월 28일 김문수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경남 김해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스1
혁신안 발표한 장동혁호(號), 시대정신은 외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국 정치는 박정희 정부 이래 산업화 보수 대 민주화 진보의 경쟁 구도로 흘러왔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는 그럭저럭 이러한 구도가 유지됐다. 예컨대 정부가 대기업 친화 정책을 펴면 야당은 소상공인·자영업자 보호를 외치며 맞받았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보수진영에 분열이 일어났고, 분열된 계파 중 가장 큰 집단이 ‘탄핵 무효’와 ‘부정선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2022년 우여곡절 끝에 정권을 되찾았지만, 그 기회를 ‘반국가 세력’ 타령하는 데 허비했다. 지금도 ‘윤 어게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1월 7일 ‘이기는 변화’를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3대 혁신안을 발표했다. △청년 중심 정당, △전문가 중심 네트워크 정당, △국민 공감 연대를 세 축으로 당 외연을 확장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장 대표의 혁신안은 기술적인 것들이다. 중요한 건 장동혁호(號)가 어떤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느냐다. 지금 국민의힘에선 그러한 시대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유럽에 비해선 나은 편이라지만 한국의 산업 환경도 녹록한 상황은 아니다. 석유화학·철강·디스플레이·배터리 등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세계 최고로 꼽히던 한국의 주력산업은 중국에 추월을 허용한 지 오래다.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된 고환율은 내수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한다. 노동시장의 격차가 심화하면서 청년들은 구직 활동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한국이 중국제를 사용할 수 없는 국가의 최전방 제조기지 역할을 맡게 됐다는 정도다. 물론 이것도 얼마나 갈진 모를 일이다.
한국은 기적과도 같은 산업화를 이룬 나라다. 애초에 인적자본도 물적자본도 없었다는 점에서 독일·일본의 산업화와 차원이 다르다. 그 기적과 같은 역사가 보수진영이 오랜 기간 한국 사회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거친 지금, 산업화 세력의 후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산업화 세력을 대표해 온 국민의힘에서 산업 이슈는 사라진 지 오래다. 지난해 제21대 대선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당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선거운동 첫날 첫 일성으로 ‘자유 통일’을 띄우며 “가짜 진보를 확 찢어버리고 싶다”고 했으며, 선거운동의 상당 부분을 상대 공격에 할애했다. ‘리쇼어링 촉진’을 10대 공약 중 하나로 내걸고 첫 선거운동을 여수 석유화학 산업단지에서 시작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차라리 산업화 세력의 적자(嫡子)처럼 보일 정도였다.
국민의힘이 ‘윤석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이재명 대통령은 산업 전반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내각에 기업인을 다수 배치했고, ‘에너지 고속도로’ 등 거시적 산업 비전도 척척 내놓는다. 일본과 경제협력을 위해서라면 보수 정권에서 있었던 합의를 존중해도 좋다는 여유도 보인다. 민주화 유산을 독점한 진보진영은 이제 보수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산업화 의제까지 잠식해 가고 있다. 반대로 보수진영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대의 유산마저 까먹고 있다. 세계화의 시계가 거꾸로 되돌아가고 있다. 각국은 잃어버린 산업 경쟁력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국민의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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