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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3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 박인환

시인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그 시와 말은 내 가슴에 있어…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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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계곡의 늑대’

가을 속으로 떠난 ‘목마’ 박인환

국립도서관의 일모문고에 있는 박인환 선시집 원본(오른쪽)과 그 안에 쓰여 있는 박인환 친필 사인.

요즘은 교과서에도 실려 웬만한 학생도 다 아는 시 ‘목마와 숙녀’. 이 시가 가수 박인희의 낭송으로 크게 유행하던 고교 1학년 시절, 필자는 문예반에서 이 시를 낭송하고 분석한 적이 있다. 지금은 추억의 한 토막이 됐지만 당시 필자는 가슴을 파고드는 이 시로 인해 문예반에서 한동안 ‘무식의 상징’으로 취급받았다. 이 시의 한 구절인 ‘바이지니아(버지니아)’와 ‘울프’ 사이에 찍힌 중간점이 사단이었다. 필자는 그 중간점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를 미국 버지니아 주 어느 계곡에 사는 늑대쯤으로 해석하고 그게 옳다고 친구들에게 우겨댔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후 이 시는 필자에겐 죽어도 잊지 못할 ‘청춘의 애송시’가 됐다. ‘선데이서울’을 읽으면서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삶’을 생각했고, 도봉산 등산길에서 마주친 바위 틈에선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을, 몇 년 전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를 봤을 때는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하건대 박인환이 발탁한 시어 ‘목마’는 매우 참신한 소재였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목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유치원의 흔들목마는 어린이(소녀)가 타는 것이며 유원지의 회전목마는 발이 허공에 떠 있어 하늘을 나는 즐거움(merry-go-round)을 주는 목마로 둘 다 말의 선한 이미지만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에 이용된 ‘트로이의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하늘로 떠났기에 처량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목마다.

버지니아 울프는 섬세한 감성의 작가로 들판이 아닌 ‘정원 옆에서 자란 소녀’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가 살던 당시, 즉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은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게’ 하였으니 ‘목마를 탔던 사랑의 사람(숙녀, 버지니아 울프)은 사라져’버리고 빈 목마는 그저 슬픈 방울소리를 울리며 하늘로 떠나고 만 것이다.



대개의 평자는 이 시를 ‘모든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애상을 주지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말하지만, 시인은 그것만을 말하려 한 게 아니다. 떠나감의 애상, 그리고 거기에 수반하는? 절망과 회의를 극복할 힘은 치고 올라갈 바닥을 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눈을 뜨고’ 상황을 직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한때는 고립을 두려워해 피해 다녔지만 절망과 회의의 극복 과정에서 고독은 필수적 통과의례다. ‘모든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또 하나의 희망을 노래한’ 이 시가 ‘망우리 별곡’의 주제와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필자의 착각일까.

일본의 전후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는 ‘타락론’(1946)을 통해 천황제나 무사도 같은 과거의 전쟁윤리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한 타락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녀는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죽지만 타락한 여자는 생명을 잉태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공식적으로 ‘타락해야 살 수 있다’고 떠든 셈이다. 박인환도 목마와 숙녀에서 대놓고 타락을 외치고 있다. 전후의 일본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박인환은 ‘두 개의 바위틈’(역경, 여성)을 거쳐서 ‘청춘을 찾은 뱀’(삶의 욕망, 남성)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시라’고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웠는지’ ‘가슴속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놓아버리고 그저 ‘가을 속으로 떠나’ 버렸다.

박인환의 묘지와 묘비를 둘러보던 필자는 그가 그토록 천착한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에는 과연 무엇이 쓰여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가녀린 소녀와 숙녀의 상징이던 버지니아 울프는 박인환보다 훨씬 강한 여자였다. 1941년 59세의 나이로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정복되지 않으며 굴하지 않는 나 자신을 네게 던지리라. 오, 죽음이여(Against you I will fling myself, unvanquished and unyielding, O Death!).”

목마와 숙녀의 한 대목이 새겨진 연보비의 건너편으로 비록 푯말은 없지만 고인의 무덤이 보인다. 문학을 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무덤을 마주친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한 시대를 대표한 시인의 무덤 앞에 푯말조차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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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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