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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를 만나는 황홀한 봄밤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개츠비를 만나는 황홀한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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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이 깊어간다. 피츠제럴드를 읽는다, 아니 개츠비를 만난다. ‘위대한 개츠비.’ 번역자가 다를 뿐 내 서가에는 같은 작가의 동명 소설이 세 권이나 있다. 이 봄밤의 동행자는 막 번역되어 나온, 사진을 작품의 이미지로 얹은 블랙 장정의 문학동네 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들을 밀치고 ‘위대한 개츠비’가 책상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봄이 일으키는 현기증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문우(文友)의 기준, 피츠제럴드

개츠비를 만나는 황홀한 봄밤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문학동네/252쪽/9500원

몇 년 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선배 작가 S의 문학 강연에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고 독자의 질문 시간이 되었다. 철학과 출신으로 현재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이 작가에게 비문학 전공자로서 문학에 입문한 계기, 대학 시절 문학동아리 생활, 문우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S는 법대에 다녔지만, 주로 문리대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답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스무 살 어름 나에게 문우의 기준은 ‘피츠제럴드’를 읽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이때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의미는 그의 ‘위대한 개츠비’를 의미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래전, 스물다섯 살 여름, 일본의 초대형 베스트셀러작가의 첫 번역 장편소설인 ‘상실의 시대(원제:Norwegian Wood, ノルウェイの森)’의 어느 구절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당시 하루키라는 생소한, 그러나 일본에서 슈퍼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이 작가는 주인공의 시니컬한 말투를 통해 ‘한동안 피츠제럴드만이 나의 스승이요, 대학이요, 문학하는 동료’였음을 토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드러냈다. “누구든지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나는 비틀스의 노래 제목에서 빌려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제작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장편소설이 ‘상실의 시대’란 한국어 제목으로 출간되는 과정 속에 있었고, 지금도 유유정이라는 원로 일어 번역자가 전해준 낡은 원고지 더미들 속에서 파편처럼 빛나던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피츠제럴드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 작가와 외국 음악, 재즈, 음식, 그림, 도시, 비행기 이름들이 현란하게 출몰했고, 그것이 하루키의 새로움, 그러니까 그 시대 젊은 작가의 언어관, 소설관을 대변하는 독창성이었다.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막 착륙하려 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두운 장막으로 감싸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들과,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들 하며, BMW의 광고판 같은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플랑드르화파의 음울한 그림들의 배경처럼 보였다. 드디어 ‘또 독일에 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하드보일드 문체

독자가 작가와 작품을 만나는 경로는 몇 가지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새로운 인생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그리고 내 인생은 바뀌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여러 매체의 서평을 통해, 또는 독서 관련 단체의 추천 목록을 통해, 그리고 선배 작가 S나 나처럼 어떤 작가의 말이나 작품을 통해, 나는 하루키를 통해 비틀스와 비치보이스, BMW와 독일, 그리고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다. 피츠제럴드는 나에게 1920년대 뉴욕을,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는 헤밍웨이로부터 물려받은 하드보일드 문체를 전해주었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5번가를 걸어 올라가 군중 속에서 신비로운 여자 하나를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나만의 공상을 즐겼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들의 집까지 뒤쫓아가고, 그러면 그녀들은 어두운 거리 모퉁이에서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찬란한 어스름 속에서 나는 간혹 저주받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들-해질 무렵, 거리를 서성이며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순간을 그대로 낭비하고 있는 젊고 가난한 점원들-에게서도 발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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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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