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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TTL신화의 CF감독 박명천

‘15초의 꿈’ 만드는 이미지의 연금술사

  • 마정미 SPERO@chollian.net

‘15초의 꿈’ 만드는 이미지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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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는 저 자신의 삶을 반영합니다. 마냥 숨가쁘게 달려온 제 생이지요.”

그는 한가롭게 여행을 다녀 볼 새도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광고판에 뛰어들어 밤샘 작업에 시달리고 지금까지 내내 달려왔으니까. 그에게도 절망적인 기간이 있었다. 3년쯤 조감독 생활을 했을 때 그는 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자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 같고 세상은 너무나 닫혀 있다고 느낀 것이다. 사실 광고계에 들어왔다가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는 9개월간 창문도 없는 지하실 골방에 박혀 웅크리고 지냈다. 도피성 유학을 생각했다.

마침 그때 닉스 CF 일이 들어왔고 그 광고를 기획했던 디자이너 백종열씨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해서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고집스럽게 만들어냈다. 절박한 심경에서 만든 광고라 아직도 박감독은 가장 애착이 가는 광고로 닉스를 꼽는다. 그때는 정말이지 상황이 열악했다. 골방에서 나오자마자 낯선 유럽의 도시에 덜렁 홀몸으로 건너가서 스탭진을 이끌고 골목으로 묘지로 움직이며 작업을 해야 했다. 어찌된 일인지 촬영일만 잡히면 비가 오거나 일이 꼬였다. 그러나 최악의 조건에서 오히려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 악조건이었기 때문에 더욱 결사적으로 정열과 모든 에너지를 쏟아 광고를 만들었다.

“달리는 신이 많은 것은 한편으로 의도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뛸 때는 더 이상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리얼하고 표정이 생생해요. 저는 모델이 표정이 나오지 않을 때는 모델에게 한바탕 뜀박질을 시킵니다. 그러면 훨씬 자연스런 표정이 나오거든요.”

박명천은 비교적 자본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이다. “저는 출신이 커머셜이에요. 미술을 전공했지만 순수미술이 아니라 시각 디자인이고 ‘광고는 예술이 아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그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다. 그의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물고기의 이미지는 ‘노량진 수산시장의 생선들을 보며 자란 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물고기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아니고 목잘린, 내장이 발리어진 죽은 물고기들이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장바구니를 들고 나간 시장에서 그는 바다의 꿈이 아니라 푸른 바다의 기억마저 빼앗긴 냉동 생선의 꿈을 보며 자란 것이다.

네모라미 시절에는 마케팅 전략을 배웠다. 언더그라운드 서클인 이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금조달, 회원관리, 조직, 유통 등의 문제를 고민하며 자연스럽게 마케팅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경쟁은 어디에서나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자본주의의 아이들

박명천의 프로덕션 이름은 매스 메스 에이지(MASS MESS AGE)이다. 분절된 어의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대중 혼란 시대’쯤 될까.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문명비판적인 작명인 셈이다. 그러나 대문자로 쓴 이 명패를 가만히 바라보면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MESS와 AGE를 붙여보면 MESS- AGE가 된다. MASS MESSAGE라면 ‘대중 메시지’ 혹은 ‘대량 메시지’다. 결국 CF 제작 프로덕션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 MESSAGE를 분절하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중사회의 혼란스럽고 분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특별한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재미있잖아요. 이미지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듯이 언어나 문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매스 메시지의 작명은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에서 연유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명제에 그는 공감한다. 더욱 공감하는 것은 ‘미디어는 마사지’라는 말. 프로덕션 식구들끼리 CF를 잘 만든 경우는 메시지이고 잘못 만들었을 경우는 마사지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한다. 가끔 ‘거기 마사지 업소죠?’라는 전화가 걸려 올 때도 있다.

그는 우리사회가 다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제시스템이라고 한다. 제작 경비와 비용이 늘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욕심대로 세트를 만들고 촬영에 심혈을 기울이면 추가경비가 엄청나게 깨진다. 사무실 운영을 위해 일을 계속 맡을 수밖에. 다작을 하다 보면 할 이야기가 점점 없어진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는 법인데, 그의 표현을 빌면 우리 사회는 ‘닳아 없어지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요즘 그를 가장 답답하게 하는 것은 심의다. 어제 밤샘 작업한 것이 하이홈 닷 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 광고인데 기지촌 같은 분위기의 거리와 등장인물들이 나와 심의를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물론 심의는 필요합니다. 허위광고라든가 기만광고처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표현규제의 가이드라인이 제발 상식선이면 좋겠어요. 심의 의원들의 경직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때 맥주광고가 심의에 걸린 경우가 있는데 모델의 표정이 ‘음주를 조장하는’ 표정이라는 이유다. 스니커즈의 ‘진정한 사랑’ 편은 여고생이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려 방송되지 못했다. 아니 원조교제가 판을 치고, 미디어에는 온통 섹스와 폭력뿐인데 교복 입고 사랑을 이야기하면 안 되다니. 그는 자신이 표현하는 것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고 동시대 사람들이 같이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되도록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데 제약에 의해 방해받는 것이 싫다. 오히려 제재를 받는다는 사실에 꿈틀해진다. 못하게 하니까 더 하고 싶다.

서울 청담동의 주택을 개조한 매스 메스 에이지 사무실은 참 고즈넉하다. 소품과 촬영기구 등이 여기저기 있지만 테이블과 콘솔 등이 모두 한국의 고가구 분위기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20대 초반의 ‘날라리 같은’ 직원들이 편한 옷차림으로 이 방 저 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박감독은 빡빡한 스케줄로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잠은 작업을 하다가 의자에서 몇 시간 잘 뿐이고, 끼니도 하루에 한 번밖에 챙겨먹을 시간이 없다. 디자이너인 부인 김혜진씨(30세)와는 가끔 일 관계로 사무실에서 만난다. 지금 소원은 개와 산책할 여유만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

다원주의와 열린 사회

“저는 휴머니스트가 아니에요. 사랑에도 관심 없고, 인간적이라든가 선량한 인간으로 포장되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그는 강론한다. 그렇다면 그는 그야말로 신세대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에게서는 오히려 위선이나 위악에서 자유로운 개인주의뿐 아니라 현대인의 분열적이고 다층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그가 언젠가 다루고 싶은 소재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는 구원의 실체에 대해 말을 흐렸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무엇, 밑바닥 인생이나 개인의 결핍, 소외,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싶다고 한다. 살다 보면 극한 상황이 있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고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상황이 있다. 때문에 탈주일 수도 있고 구원일 수도 있는 어떤 희망을 다루어 보고 싶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소중해. 너도 이 세상의 한 부분이야. 너도 소중해’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요. 누구의 삶이든 가치있는 삶이고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386세대의 정체성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개인주의와 인간애가 뒤섞여 있다. 누구보다 개인주의적이고 주변 사람들과의 이기적인 사랑 따위는 믿지 않지만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 싶어하는 아이러니. 문득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타인을 인정하고 차이에 대해 강요하지 않는 삶,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타인과 환경을 파괴한다면 타인을 어디까지 배려해야 할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자신이 할 일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자기가 맡은 부분만 잘 해내면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온전히 신세대 젊은이인 것 같으면서도, 세상과 인간을 사유할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다원화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N세대의 특징은 아니키스트적 속성과 다중인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없는 사회주의도 싫고 평등없는 자본주의도 싫다. 국가나 체제의 강제도 싫고 권위의식이나 간섭은 더더욱 싫다. 그들 자신이 저마다 소우주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소우주 하나하나가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 영상과 소비문화에 심취한 퇴폐적인 세대로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계산이 빠르다. 또 극히 개인주의적인가 하면 건전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사회의 자정활동을 펼친다. 그것이 이들 세대의 다원성이고, 열린 사회 혹은 오픈 시스템의 자생력이라는 생각이 든다.冬

신동아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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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미 SPER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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