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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⑧

사라진 우리 쪽빛 되찾은 염색장 정관채

“전통 잇는다는 집념으로 버텨왔는데 이제는 자연 염색이 유행이네요”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사라진 우리 쪽빛 되찾은 염색장 정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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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인 정관채는 쪽빛이 전공이다. 쪽물 염색은 워낙 까다롭고 힘들어서 자연 염색의 꽃으로 꼽힌다. 쪽물 염색으로 유명했던 전남 영산강변의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시절 쪽 농사와 염색을 배웠고, 교직에 몸담으면서도 평생 ‘쪽물장이’농사꾼으로 살아왔다. 천연 염색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도 쪽물 염색의 전통을 이은 그는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에 오름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쪽물장이가 됐다.
사라진 우리 쪽빛 되찾은 염색장 정관채

짙은 쪽빛천을 얻으려면 천을 쪽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널고 빨아서 다시 담그는 일을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

염색장 정관채(鄭官采·53)는 쪽물의 일인자지만, 그가 먼저 나서서 쪽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대신 쪽이 그에게로 왔다.

목포대 미대 1학년이던 1978년, 정관채는 염색을 가르치던 박복규 교수(서양화가, 현 성신여대 재직)에게서 쪽씨를 건네받았다. 이 땅에 쪽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됐을 때였다.

“그 쪽씨는 박 선생님이 당시 민속문화 복원에 앞장섰던 예용해 선생님께 얻은 것이었습니다. 예용해 선생님은 어렵게 구한 쪽씨를 박 선생님께 건네며, 우리 땅에서 사라진 쪽을 되살릴 곳은 나주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전남 나주는 예부터 쪽물 염색이 발달한 고장이다. 굽이치는 영산강은 큰물이 나기 일쑤여서 물에 강한 미나리와 쪽을 벼 대체 작물로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고, 쪽물 염색도 자연히 발달했다.

“저 어릴 때만 해도 홍수가 참 많이 났습니다. 영산강 시원지가 전남 담양 용추골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처녀가 오줌을 누면 하류에서 홍수가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쪽을 보면 마디마디에서 뿌리가 나와요. 이런 식물은 물 많은 곳에서도 잘 자랍니다. 그래서 다른 농사가 홍수로 피해를 봐도 쪽 농사는 잘됩니다.”

더구나 영산강 하류에는 홍수 때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소금기 섞인 강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여간 아니었다. 그러나 쪽은 태풍이 오기 전에 수확해 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고수익이었던 쪽 농사를 이래저래 많이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명베와 쪽물 고장에서 나고 자라

화학염료가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나주에서 생산한 쪽 염료는 비싼 값으로 전국에 팔려나갈 만큼 유명했다. 특히 영산포 남댕이마을과 문평면 북동리, 다시면 가흥리는 길가에 쪽을 우려내는 항아리가 늘어서 있을 정도로 쪽 염색이 성행했었다.

“저는 이곳 다시면 가흥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가흥리는 또 ‘샛골나이’로 유명한 샛골과 붙어 있어요. 박 선생님이 쪽씨를 키울 학생을 찾다가 마침 다시면 출신인 저를 발견하고 쪽 농사를 맡겼던 겁니다.”

무명베의 대명사인 샛골나이는 한산 세모시, 곡성의 고운 삼베인 ‘돌실나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뛰어난 길쌈 전통으로 손꼽힌다. 무명길쌈과 쪽물 염색이 같이 유명했던 다시면 출신인 정관채는 천과 염색이라는 두 가지 인연을 갖고 태어난 셈이다. 실제로 그의 외가는 샛골나이 전통을 이어가는 집안이다. 지금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샛골나이 기능보유자 노진남 씨는 최씨 집안에 시집와 시어머니에게 길쌈을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정관채의 어머니가 바로 같은 최씨 집안 출신이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의 베틀 밑에서 잠들던 기억과 할머니가 덮어주던 무거운 쪽 이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후 쪽물 염색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가 있었듯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도염서도 있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염장(染匠) 제도가 있었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닌 우리 전통염색은 6·25전쟁을 전후로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더구나 쪽은 일년생 풀로 한 해만 심지 않아도 씨 구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니 쪽도 자취를 감췄던 거예요.”

사라진 우리 쪽빛 되찾은 염색장 정관채

그의 전수관 앞뜰에 놓인 항아리와 독.

그는 귀하디귀한 쪽씨를 받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야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쪽 농사를 짓고 쪽물을 들이며 살아온 어머니와 할머니의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1984년 정관채는 쪽빛으로 곱게 물들인 무명천을 들고 박복규 교수와 함께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예용해 선생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다.

“예 선생님은 쪽빛 무명베를 보더니 ‘와, 쪽빛이 이런 색이로구나!’하고 감탄하셨어요.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장하다고 격려도 해주셨고요.”

우리 전통문화와 민속공예 등을 발굴해 존경받았던 문화계 대부 예용해에게 칭찬과 관심을 받은 청년 정관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큰일을 했다는 성취감보다는 재배에 성공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라졌던 문화가 이렇게 되살아났으니 잘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도 느꼈고요.”

쪽 재배와 쪽물 염색이라는 난관을 처음 돌파한 젊은이에게 이 성공은 달콤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긴 것 같다. ‘누군가는 해야 할’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에게 떨어졌고, 그는 그 일을 반쯤은 벅찬 가슴으로, 또 반쯤은 소명의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해마다 쪽 농사를 짓고 쪽물을 들였다. 친환경이나 유기농, 생태란 말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하다 손가락이 잘리고 손톱이 뽑히고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쪽 농사와 염색까지 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나마 방학이 있어 일할 수 있었다.

“3월이면 쪽씨를 뿌려요. 씨를 일찍 뿌려 햇볕을 충분이 쐬게 해야 좋은 염료가 나옵니다. 그래서 쪽물 염색은 씨를 심을 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6월 말쯤 쪽이 다 자라면 꽃피기 전에 서둘러 수확해야 해요.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라 이파리도 무성하고 이파리에 든 색소 성분(인디카인)도 가장 풍부하거든요. 그때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쪽대를 베어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부어줘요. 동트기 전 습기가 아직 이파리에 촉촉이 남아 있을 때 쪽대를 베고 물에 담가야 쪽물이 잘 배어나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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