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피가 튀며 꿇어 앉았던 죄수 15명이 앞뒤로 쓰러졌다. 피와 함께 뇌수가 터져 메마른 사형장에 흘러내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시체를 담을 비닐포대를 준비하고, 흘러내리는 핏덩이에 흙을 퍼부었다. 검시관이 다가와 죄수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확인 사살을 해야 한다. 근접거리에서 소총으로 머리를 관통당한 터라 뒤통수쪽 총알 구멍은 작았지만, 얼굴 앞쪽은 형태가 흩어진 죄수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15명 모두 완벽히 절명했다. 검시관의 확인이 끝나자 병사들이 시신을 비닐포대 쪽으로 질질 끌고 가서 담았다.
그가 15명의 죄수 가운데 유달리 눈길을 끈 것은 중국말을 못하는 한국인이라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와 법관, 통역 세사람이 마주섰다. 법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확인 결정에 따라 당신을 사형에 처합니다.”
통역이 이 말을 남자에게 전했다. 남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법관이 마지막 확인 절차를 거쳤다.
“이름이 뭡니까?”
“신옥두.”
“나이는?”
“41세.”
“직업이 무엇입니까?”
“전라북도에서 건축업을 했습니다.”
법관은 신원확인절차를 마치고 사형판결문과 신원확인서를 내밀었다. 남자는 이 서류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더할 얘기는 없는가?”
“없습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았다.
“부탁할 것 없는가?”
“없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공안요원들이 남자의 수갑을 풀고 손을 뒤로 돌려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는 같이 나온 죄수들과 함께 호송버스에 태웠다. 무장군경을 태운 트럭이 호송버스 앞뒤로 섰다. 하얼빈시 교도소에서 쑹화강(松花江) 강변에 있는 하얼빈시 총살장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40분. 교도소를 빠져나온 호송버스는 시가지를 15분 정도 달리다가 울창한 미루나무가 터널을 이룬 왕복 2차선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다.
시가지에서는 사형수를 태운 호송버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도 많았는데, 여기서부터는 아예 인적이 없었다. 이곳은 하얼빈시 외곽이라 일반 시민들이 올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말도 아닌 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더더욱 사람 꼴을 찾을 수 없었다.
미루나무 터널 길 바깥은 드넓은 벌판이다. 산 하나 볼 수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 포승줄로 묶인 한국인 남자는, 중국을 드나들면서 많이 보았던 광경이지만 사형장으로 가면서 이런 벌판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9월이라 아직은 미루나무 가지가 푸르다.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이곳 하얼빈은, 이제 한달만 지나면 새파란 가지가 칙칙한 갈색으로 변할 것이다.
중국정부에서 붙여준 조선족 변호사가 있긴 했지만,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그는 재판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돈벌이가 안된다며, 아예 하얼빈을 떠나 행적조차 묘연하다. 감방 안에서 중국인 죄수들에게 두들겨 맞아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디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면회오는 사람도 없었다.
사형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형장으로 통하는 이 미루나무 길은 너무 아름답다. 차량 통행도 드물다. 붉은색 스포츠카라도 지나가야 제격인데, 모래를 잔뜩 실은 마차가 덜컹거리며 다가온다. 마차를 끄는 늙은 검정말이 힘겨워보인다. 잠시 후 벽돌을 가득 실은 마차도 접근한다. 이번에는 검정말이 아니라, 비루먹은 갈색 당나귀다. 당나귀는 덩치는 작지만 검정말보다는 힘이 세보인다.
버스는 미루나무 길을 벗어나자, 우회전하여 울퉁불퉁한 비포장길로 접어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포장이 된 길인데, 관리를 하지 않아 맨흙이 반쯤 드러난 길이다. 길 왼쪽에 20여m 정도 경사지 아래로 쑹화강이 보인다. 오른쪽은 과수원인 듯하다.
버스가 몸을 주체하기 힘들 만큼 심하게 요동친다. 여기서부터는 쓰레기 매립장 같은 분위기다. 길 옆에는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폐비닐이 바람에 이리저리 갈지(之)자로 날렸다.
사형장으로 쓰이는 이곳 부근은 하얼빈시에서 골재와 모래를 채취하는 곳이다. 오른쪽 공터에는 흙이 깎여져 나간 언덕이 흉물스레 펼쳐진다. 쓰레기장 구역같은 곳을 출렁거리며 달리던 버스가 멈추었다.
총살 현장
인민해방군 철모에 소총을 어깨에 메고 흰장갑을 낀 공안요원 3명이 한조를 이루어 사형수들을 버스에서 끌어내렸다.
두 명이 양팔을 잡고 한 명은 뒤에서 따라간다. 총살장 철문이 열렸다. 운동장 같이 넓은 공터가 안에 있다. 공안요원들이 사형수 15명을 일렬횡대로 세워 절개지 안쪽으로 끌고 간다. 그 거리가 100m. 죽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죄수가 있지만 소용없다. 두 명이 단단히 옆에서 끼고 있기 때문에 아예 질질 끌려간다. 윤이 날 정도로 검은 까마귀 두 마리가 총살장 상공을 유유히 비행한다.
절개지가 10여m 남았다. 팔을 잡고 이끌던 공안요원이 멈춰섰다. 여기서 죽는다. 공안요원들은 사형수 15명을 2m 간격으로 나란히 꿇어앉혔다. 총살을 집행하는 공안요원들이 3인 1조로 죄수의 1m 뒤에서 총을 뽑아들고 뒤통수를 겨누었다. 뒤통수 하나에 총구가 셋이지만 죄수의 머리를 관통하는 탄두는 하나뿐이다. 나머지 두 총구는 탄피만 튈 뿐 탄두가 없는 일종의 공포탄이다. 총을 쏘는 사수는 누구 총에 탄두가 실려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수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 주기 위한 방편이다.
“어깨 총!”
사수들이 일제히 사형수들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었다.
“조준.”
“발사!”
45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피가 튀며 꿇어앉았던 죄수 15명이 앞뒤로 쓰러졌다. 피와 함께 뇌수가 터져 메마른 사형장에 흘러내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시체를 담을 비닐포대를 준비하고 흘러내리는 핏덩이에 흙을 퍼부었다. 검시관이 다가와 죄수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확인사살을 해야 한다. 근접거리에서 소총으로 머리를 관통당한 터라 뒤통수쪽 총알 구멍은 작았지만, 얼굴 앞쪽은 형태가 흩어진 죄수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15명 모두 완벽히 절명했다.
검시관의 확인이 끝나자 병사들이 시신을 비닐 포대쪽으로 질질 끌고 가서 담았다. 끌려가다가 한 죄수의 신발이 벗겨졌다. 망자(亡者)의 유품이건만 아무도 이를 챙기지 않는다. 총살장 정문에는 호송버스와는 다른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트럭이다.
중국 하얼빈에서 체포된 한국인 마약사범 신옥두(41)씨는 이렇게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곧바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유품도 없었고, 유골을 찾는 이도, 슬퍼하는 이도, 종교 의식을 치러주는 이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묘사는 하얼빈 현지 취재를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총살 당일인 9월25일 날씨는 하얼빈시 공산당 기관지인 ‘하얼빈일보’를 참고했고, 법관과 신씨의 마지막 대화와 상황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과 중국 법원의 수칙을 따른 것이며, 감옥에서 총살장까지의 주변 풍경과 총살 현장은 현장답사 및 중국 당국의 총살 수칙을 참고해서 재구성했다.
감옥에서 사망한 또다른 마약사범 정영조씨는 사망할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증언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기술하지 않았다. 신씨와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정씨는 신씨처럼 사형을 기다리다 옥사했다. 중국 사법당국은 그가 간질환으로 사망했다고만 밝히고 있다. 사망 당시 정씨는 68세였는데, 병이 있었다면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중국 감옥의 인권상황은 아직까지 외국에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범죄사실 요지
기자가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11월8일. 신씨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정확히 44일째 되던 날이다.
한국 국가기관이 신씨와 정씨 사건을 얼마나 조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은 이들의 범죄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이 남긴 하얼빈 내 행적을 되밟아보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신모씨 사건’이라고만 알려진 이 사건은 조선족과 국내의 마약업자들이 국제적으로 연결된 복잡한 사건이었다. 사망한 두 한국인은 이 히로뽕 커넥션의 핵심인물이다. 정영조는 1인자로 기술책임자였고, 신옥두는 2인자로 제조·운송·판매 총괄책이었다.
사건은 1996년 마산에서 시작된다. ‘총장급’ 히로뽕 기술자인 한국인 정영조와 박정열(71)은 1996년 3월, 마산에서 중국에 들어가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최초로 모의했다(히로뽕 제조기술은 고난도의 기술이라 최고기술자를 총장급, 그 다음을 학장급, 그 다음을 교수급이라고 부른다).
같은해 8월, 정영조는 동생 정익무에게 한화 1000만원을 주면서 중국에 가 조선족 장세추를 찾아 히로뽕 제조원료를 구입하도록 지시한다. 정익무는 곧 다롄(大連)으로 가서 조선족 백재만을 찾아 통역을 삼고, 하얼빈에 있는 장세추와 관계를 맺었다. 이후 같은 해 10월까지 정익무, 백재만, 장세추는 하얼빈과 다롄에 있는 백재만의 집에서 여러 차례 만났으며 정영조는 인민폐 8만5000위안(한화 1360만원 가량)을 두 번에 나누어 장씨에게 주어 히로뽕 원료를 구입하도록 했다.
이 기간에 정영조는 대구시에 살고 있던 신옥두를 찾아가 가짜 여권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신옥두는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에 잠입하여 조선족 박대림을 찾아가 여권 위조를 부탁했고, 박대림은 또 김해일을 찾았다. 1996년 10월 신옥두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와 양희철이란 이름의 위조여권과 여기에 붙일 정영조 사진과 인민폐 1만5000위안(한화 240만원)을 박대림에게 넘겨주었고 박대림은 이를 김해일에게 주었다. 박대림은 두 차례에 걸쳐 인민폐 1만4000위안을 김해일에게 주고, 자기는 1000위안만 챙겼다. 그 해 12월, 신옥두는 완성된 위조여권을 정영조에게 주었다.
1997년 1월8일 정영조는 위조한 여권으로 중국 다롄시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신옥두와 만나 다음날인 1월9일 웨이하이(威海)시에 있던 박정열(최초로 마산에서 정영조와 모의한 자)을 다롄의 집으로 불렀다. 정영조가 히로뽕 제조건을 꺼내자 박정열은 제조에 가담하지는 않겠지만 히로뽕을 살 수는 있다고 대답하고 되돌아갔다.
1월13일 정영조는 백재만을 내세워 당시 상하이(上海)에 있던 장세추를 다롄으로 불러, 하얼빈에서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튿날 정영조, 신옥두, 백재만과 장효경(한국인, 도주중), 장세추는 함께 비행기로 하얼빈에 도착했다. 장세추는 곧 랴오닝(遼寧)에 있던 사촌동생 이홍철을 하얼빈으로 불러왔다. 장세추는 한화 3500만원을 출자해서 하얼빈시 인근지역(道外區 松浦鎭 沙子村) 동쪽 2km 지점에 3층집 한 채를 빌려 생산기지로 삼았다.
1월 하순 정영조가 기술지도를 전체적으로 책임지고, 신옥두가 제1제조공정, 백재만이 제2제조공정, 장효경이 마무리, 이홍철이 잡무, 장세추가 음식 및 원료를 책임지기로 하고 히로뽕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정영조는 웨이하이시의 박정열을 찾아 그를 통해 히로뽕제조원료인 염화바륨을 두 병 사왔다. 2월6일 정영조 등은 히로뽕 3500g을 제조해냈다.
1997년 2월7일 정영조는 히로뽕을 3봉지로 갈라 포장하고 신옥두, 백재만이 이를 휴대해 다롄의 정영조 셋집으로 운반했다. 2월11일 정영조는 박정열을 불러다 히로뽕을 한국으로 내보내달라며 성사후 인민폐 15만위안(한화 2400만원)을 주기로 했다.
박정열은 신옥두와 함께 히로뽕을 웨이하이시로 옮기고, 동거하고 있는 박옥화를 시켜 한국으로 내보내도록 시키고, 성사후에 kg당 인민폐 5만위안(한화 800만원)을 주기로 했다.
2월28일 박옥화는 영지술병에 마약을 담아 당일로 출항하는 한국선원에게 연락쪽지와 함께 넘겼다. 일주일 뒤 신옥두와 양동규(도주중)는 한국 인천시 부두에서 히로뽕을 넘겨받았다. 그후 그 히로뽕을 팔아 한화 1억2000만원을 챙겼다. 정영조가 1억원을 가지고, 신옥두가 2000만원을 챙겼다. 백재만은 인민폐 3000위안(한화 48만원)을 챙겼다.
히로뽕 제조·운송·판매에서 단맛을 본 신옥두는 1997년 3월 양동규와 함께 다롄으로 가서 백재만을 찾았다. 세 사람은 합의를 본 후 하얼빈으로 가서 장세추를 다시 찾았다. 이들은 원래 지점에서 다시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하고, 이홍철에게 히로뽕 배합제가 들어 있는 행장을 갖고 하얼빈으로 오라고 통지했다. 이들은 역시 샤퉈쯔춘(沙子村)에서 히로뽕을 제조하기 시작했으나 4월 중순까지 기술자가 없는 관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기술자인 정영조 없이 만들어 보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후 신옥두 등은 앞뒤로 하얼빈을 떠났다.
1997년 7월 상순, 정영조는 태국을 거쳐 다시 중국에 들어와 웨이하이에 있던 신옥두를 만났다. 정영조는 자신이 인민폐 20만5400위안(한화 3286만원)을 투자해서 또다시 하얼빈에 들어가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7월 중순, 하얼빈의 장세추를 찾아서 원료구입금(인민폐 19만5400위안)을 주고 장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하얼빈을 떠났다. 신옥두는 옌지에 가서 박대림을 찾아 통역을 부탁하고는 팩시밀리기 장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하얼빈에 데리고 왔다.
신옥두, 박대림, 정영조는 장세추가 찾아준 하얼빈-후란공로 9.5km 지점의 단층집에서 또 히로뽕을 만들기 시작했다. 9월5일까지 정영조 등은 히로뽕 완제품 1만466.9g과 히로뽕 반제품 4만7000g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 김해일은 1997년 옌지의 셋집에 있는 이봉덕에게 가짜주민등록증을 만들어주고 대가로 인민폐 2500위안(한화 40만원)을 받아 썼다.
정영조 등은 1997년 9월6일부터 차례로 하얼빈시 공안기관에 체포됐다. 중국당국이 정씨 일당을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수사당국이 정보를 제공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대구지검은 신옥두, 정영조 등이 하얼빈에서 검거되기 한달 전인 1997년 7월10일부터 이 사건 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씨가 이미 같은 해 6월, 중국으로 도주한 사실이 드러나자 대구지검은 7월25일 인터폴에 국제공조수사를 요청했다. 대구지검은 두 달 뒤인 9월5일 중국 당국으로부터 신씨가 히로뽕을 제조, 밀반출한 혐의로 검거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사법당국은 중국 공안당국의 사법절차를 밟은 신씨의 인권 보호와 신병 처리를 위해 외교적으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검찰은 1997년 8월20일부터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법무협력관을 파견했으나, 정작 법무협력관은 신씨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1월6일 당시 법무협력관은 “재임 기간 중 신씨 체포사실은 물론 재판진행에 대해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얼빈시 인민검찰원은 1998년에 정영조 등을 각기 마약제조운송판매죄, 위조한 출입국증건 제공죄, 주민등록증위조죄로 기소했다. 하얼빈시 중급인민법원은 1999년 8월12일 형사판결을 내렸다. 한국인 정영조·신옥두를 사형에 언도하고 개인재산을 전부 몰수하기로 판결했고, 백재만은 사형 언도에 2년간 집행유예, 박정열과 박옥화는 무기형, 정익무와 이홍철은 유기형 10년, 박대림과 김해일은 유기형 4년으로 선고했다.
이 판결에 정영조, 신옥두, 백재만, 박정열, 박옥화, 정익무, 이홍철은 모두 불복했다. 정영조는 1차로 제조한 히로뽕을 한국에 갖다 팔았는지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또 만든 히로뽕이 반제품이며, 두 번째는 실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옥두는 자신은 모든 과정에서 보조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 백재만은 마약을 운송하지 않았다는 이유, 박정열은 마약을 제조·운송하지 않았다는 이유, 박옥화도 마약을 운송하지 않았다는 이유, 정익무는 마약제조에 참여하지 않았고 돈만 넘겨주었다는 이유, 이홍철은 마약 제조에 참여하지 않았고 형량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각기 헤이룽장성 고급인민법원에 상소를 제기했다.
이 상소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헤이룽장성 고급인민법원은 합의정(合議庭)을 구성해서 심문, 자백, 기록을 열독하고 피고들을 재차 심문했다. 또 증인들의 실증자료를 확인하고 변호인 의견을 청취한 후 사실이 명확하고 증거가 충분하므로 그들을 기소한 죄가 모두 성립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상소를 기각해 개정심리를 하지 않고, 원 판결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신씨의 사형집행이 과연 적절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범죄 내용과 마약 범죄를 규정한 중국 국내법이 한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의문투성이다.
한국정부의 중국 관련 부서 관계자는 “사건 진행 과정에 우리 정부의 잘못이 드러나면서 한바탕 소란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하지만 드러난 것도 해결된 것도 거의 없다. 무엇보다 죄와 형벌의 적절성 여부가 궁금하다. 중국 정부가 자국인이었다면 신옥두를 사형에 쉽게 처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중국의 마약단속법
이 관계자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이 의문은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7절 ‘마약의 밀수, 판매, 운송, 제조 죄’구절을 보면 명쾌하게 해결된다. 중국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마약의 일종인 아편으로 홍콩과 마카오를 뺏긴 경험을 갖고 있어서 마약 범죄에 관한 형벌이 어느 나라보다 엄하다. 중국 형법 제7절 제347조를 일부 발췌해서 옮긴다.
“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했을 경우에는 그 수량이 많든 적든 모두 형사책임을 추궁하고 형사처벌을 주어야 한다. 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했고 다음 각 호의 하나에 해당한 자는 15년의 유기징역,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하고 재산몰수를 병과한다. (1)아편 1000g 이상, 헤로인 또는 메틸벤졸프로필아민 50g 이상 또는 기타 다량의 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한 자 (2)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한 집단의 수모자 (3)마약의 밀수, 판매, 운송, 제조를 무력으로 엄호한 자 (4)폭력으로 검사, 구류, 체포에 항거하였고 그 정상이 중한 자 (5)조직적인 국제마약판매활동에 참여한 자.
아편 200g 이상 1000g 이하, 헤로인 또는 메틸벤졸프로필아민 10g 이상 50g 이하 또는 수량이 비교적 많은 기타 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한 자는 7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벌금을 병과한다 …(중략)”
신씨의 경우는 하나만 걸려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사항 중에 세 가지나 해당된다. 아편의 경우 1000g 이상, 기타 마약은 50g 이상만 되어도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돼 있으니 그의 사형판결은 예견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한국인이라고 해서 중형에 처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재심 절차는 제대로 밟았을까. 그는 1997년 9월5일 체포된 뒤, 2001년 9월26일 사형당할 때까지 5년여 동안 중국 국내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 형사소송법 제3편 재판 제4장 사형재심사절차를 옮겨본다.
“제199조: 사형은 최고인민법원이 심사비준한다.
제200조: 중급인민법원이 사형으로 판결한 제1심 사건으로서 피고인이 상소하지 않을 경우 고급인민법원이 재심사한 후 최고인민법원에 보고하여 심사비준을 받아야 한다. 고급인민법원이 사형판결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판(自判)하거나 다시 재판하도록 반송할 수 있다. 고급인민법원이 사형으로 판결한 제 1심사건으로서 피고인이 상소하지 않은 것과 사형으로 판결한 제2심 사건은 다 최고인민법원에 보고해 심사비준을 받아야 한다.
제201조: 중급인민법원이 집행유예2년부 사형으로 판결한 사건은 고급인민법원이 심사비준한다.
제202조: 최고인민법원이 사형사건을 재심사하고 고급인민법원이 집행유예부 사형사건을 재심사할 때에는 재판원 3명으로 합의정을 구성하여 진행해야 한다.”
신씨는 중국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사형재심절차를 모두 거쳤다. 만 4년 동안 시간을 끈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조사과정에 고문 같은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는 배제할 수 없다. 중국 정부는 현재 고문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지만, 중국 공안요원들이 피의자들을 다반사로 고문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공안요원이 직접 손을 보지 않고, 다른 범죄자 손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제가 된 피의자를 구치시설에 수용할 때, 같은 방을 쓰는 범죄자 가운데 최고 선임자에게 ‘교육’좀 시키라고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선임자 등 몇몇이 나서서 문제의 피의자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는 식이다.
변호사 도움 거의 못받아
또 하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변호사의 조력을 충분히 받았느냐는 점이다. 하얼빈 현장에서 신씨 사건을 맡았던 조선족 변호사를 수소문했으나, 끝내 이 변호사를 만나지 못했다.
다만 신씨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그다지 실력이 없는 변호사였고 그나마도 신씨 사건이 돈벌이에 도움이 안돼 다른 일을 알아보러 몇 달 전에 하얼빈시를 떠나 행적이 묘연하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변호사의 행적을 미루어 짐작건대 신씨 등은 변호사의 조력을 거의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자본주의 국가 수준의 변호사 활약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총살형의 비인도성 문제를 캐내보려고 시도했으나 쓸데없는 노력이었다. 중국에서는 총살형이 흔한 일이었다. 중국의 처형방식은 한국처럼 교수형이 아니라 총살형이다. 과거에는 그 횟수가 지금보다 잦았고 대상자도 많았으며 공개총살 비율도 높았다.
1983년 하얼빈시에서 사형수 70여명을 트럭에 태우고 시내를 한바퀴 돌리면서 구경을 시킨 뒤 무더기로 총살한 사건은 아직도 하얼빈 시민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중국의 총살 제도에서 특기할 점은 총살자 가족으로부터 총알값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중국 시민들은 총살형을 어릴 때부터 구경해온 일반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다수 사람들이 총살형의 구체적 집행과정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공개총살이 잦았고, 특별히 희안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 내용과 재판과정 등을 확인한 뒤, 신씨 등이 하얼빈 현지에서 거쳐간 현장을 되밟기로 했다. 먼저 히로뽕 제조현장. 중국측 사건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히로뽕을 제조한 현장은 하얼빈시 다오와이취 쑹푸전 사퉈쯔춘 (道外區 松浦鎭 沙子村) 동쪽 2km 지점의 한 3층집이었다. 하얼빈시 중심부에서 지도를 보고 자동차를 달린 지 1시간 정도, 예상대로 제조현장은 시외곽이었다.
하얼빈시의 북쪽을 동서로 흐르는 쑹화강(松花江)이 나왔다. 목적지는 이 강을 건너서 더 북쪽이었다. 겨울 쑹화강은 물이 말라 강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강을 건너니 완전히 시골이었다. 간간이 큰 기업들의 여름 휴양소로 쓰이는 건물이 보일 뿐, 논밭과 농촌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조금 더 달리니 시골장터가 나왔다. 닭고기, 거위고기, 돼지고기 등과 갖가지 채소를 파는 농민들이 장터를 메우고 있었다. 차유리를 내리고 사퉈쯔춘을 물으니,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들은 하는데, 제대로 알고 하는지 취재차는 비슷한 구역을 계속 맴돌다가 겨우 사퉈쯔춘을 찾았다.
이곳은 철도가 동네 외곽을 지나가고 있었다. 철도 건널목에서 조금 내려오니 동네 이름을 새긴 표석이 있다. 표석에 붉은 칠을 한 음각 글씨로 ‘道外區 松浦鎭 沙子村’이 선명하게 새겨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제조현장을 찾기가 힘들었다.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으나 4년 전 일이라, 비슷한 집들이 모여있는 구역은 알지만 정확한 집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구역만 가보기로 했다. 제조현장 주변은 옥수수밭이 펼쳐진 가운데 창고 같은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사진 참조). 정확한 집은 찾지 못했지만 이곳이 제조현장이었다.
취재를 마치면서 더욱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한국 외교의 총체적 부실상이다. 신씨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현지 교민들과 조선족들의 중국내 한국 공관에 대한 분노였다. 하얼빈에 진출한 한 한국인 기업가의 말이다.
“선양(瀋陽) 영사사무소와 베이징(北京) 대사관이 이런 일을 낼 줄 알았다. 한국공관이 자국민 보호 업무를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자국민 보호에 신경쓰지 않고 정보수집 같은 정무일이라도 잘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번 사건에서 한국공관이 현지 신문도 안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에서 이 사건이 처음 보도됐을 때 중국 당국이 이번 사건을 통보했는지 여부가 논쟁이 됐는데, 이미 이 사건은 1998년부터 중국 신문과 조선족이 발행하는 한글신문에 여러 차례 보도된 사건이다. 대사관 사람들만 몰랐지, 교민들과 조선족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사업무라도 잘해야 하는데 여러 업무 가운데 최악인 것 같다.”
알려진 대로 중국 정부는 이 과정을 한국 외교당국에 여러 차례 통보했고 하얼빈시 공산당 기관지인 ‘하얼빈일보’도 이 사건을 여러 차례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헤이룽장성의 유일한 한글신문인 ‘흑룡강신문’이 1998년 11월26일자에 첫 기사를 낸 뒤, 이후 여러 차례 장문의 특집기사로 이 사건을 꼼꼼히 보도했다.
한국대사관과 영사관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사람들은 조선족 동포들이다. 하얼빈시의 조선족 김길성씨는 올해 자신이 일하는 하얼빈 소재 한국기업의 업무 때문에 한국으로 출장갈 일이 생겨, 비자를 내기 위해 선양영사사무소를 찾았다. 결과는 헛걸음이었다. 선양영사사무소는 서류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자, 김씨는 아예 한국인 직원을 대동하고 영사사무소를 찾았다. 그래도 헛걸음이었다. 그가 한국 방문 비자를 얻은 것은 하얼빈에서 선양까지 무려 7차례나 왕복한 뒤였다.
한국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사업하는 사람들도 중국의 한국대사관을 비판한다. 인천에서 한중간 결혼사업체인 ‘사랑네트’를 운영하는 전재영(39)씨의 증언은 중국내 한국 공관의 영사 업무가 얼마나 문제투성이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러 국제결혼 사업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결혼사업이 가장 어렵다. 우리보다 선진국인 일본이나 호주의 경우, 중국인이 이들과 결혼하는데 비용도 많이 들지 않고 절차도 간단하다. 중국의 한국영사관은 필요 없는 서류를 제출하게 만들고 시간도 사흘이면 끝나는 일을 한 주일이나 두 주일로 늘여 잡는다. 자연히 급행료같은 뇌물이 들어갈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영사업무 몇 년 하면서 돈 못 챙기면 바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비판은 한국 영사관이 인력이 턱없이 모자란 것도 문제지만 적은 인력과 낮은 비자 성사율을 미끼로 횡포를 부리고, 심지어 뇌물까지 챙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학생의 경우 중국 현지에서 위험한 일을 당해 한국공관에 전화라도 걸면 “처신을 똑바로 못해 그런 일을 당한다”는 대답을 듣기 일쑤고, 오히려 중국 공안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례가 다반사라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식당에서 퇴근한 후 영사관과 대사관 직원이라도 만나면 일제히 “저XX들, 누가 안잡아가나”며 수군거린다는 것이다.
재외국민과 조선족 동포를 비판적으로 만들고 있는 중국의 한국 외교공관. 이는 관련자 몇명을 문책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분명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