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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교수의 재미있는 마케팅 이야기

고객의 눈으로 보아야 기업이 산다

  • 홍성태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경영학

고객의 눈으로 보아야 기업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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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를 규명하려는 기업의 노력이 최근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90년대를 중심으로 강조점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의 CI 작업은 기업 내부의 조직풍토를 잘 파악하고, 이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90년대 이후의 CI는 외부의 고객 및 일반 대중에 비치는 기업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즉 예전에는 인사·조직 면이 강조된 데 반해, 오늘날에는 마케팅이 CI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에 따라 기업의 정체성(CI)은 에서 보듯이 기업 내부의 CI와 기업 외부의 CI로 분류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기업의 사풍이나 철학 등 개성을 명확히 하는 기업문화 정립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한편 외부적으로는 고객을 의식한 기업의 이미지 표현을 위해 부심하게 된다. 즉 규명된 CI를 고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바로 창의성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여기서는 기업 내부의 CI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 후, 설정된 CI의 내용을 고객들에게 창의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들을 알아보겠다.

기업 내부의 CI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기업 내부의 인사·조직 측면에서 기업의 철학이나 풍토(또는 社風)라 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뚜렷한 조직문화가 없는 기업은 성공을 지속하기 힘들다. 현대그룹의 우직한 추진력, 삼성그룹의 깔끔한 관리력 등은 변화하지 않는 기업 풍토로 자리잡았다.



제품은 진부해지고 시장은 변화하며 신기술이 출현하고 새로운 경영기법과 용어가 난무할지라도 기업의 문화는 이어져 간다. 그리하여 기업이 성장하고 다각화해 전세계로 확산되더라도 그 조직을 묶어 놓는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마치 유태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더라도 유태인 정신이 그들을 붙잡아 놓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 기업은 자신의 조직문화가 어떤 것인가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자연발생적으로 드러나는 조직문화가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직문화가 뚜렷이 규명되지 않은 경우에는 이를 설정하여 구성원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적 정체성(MI: Mind Identity)을 설정하여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게 한다. 즉 전사적(全社的)으로 동일한 마음가짐을 가지려는 시도로 사훈이나 경영이념, 사원정신 등을 정하게 된다. 다만, 예전에는 기업주의 개인적인 철학 내지 가치관 또는 가훈을 상의하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모든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과정을 거쳐 MI를 설정하게 된다. 설정된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MI 설정 과정에 참여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정된 MI는 사훈 등의 제목하에 액자로 만들어 걸기도 하고 구성원에게 교육도 하지만, 마음 다짐만 가지고는 행동의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MI와 일관된 행동의 지침들, 즉 행동적 정체성(BI: Behavior Identity)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는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 구성원의 행동에 일체감을 형성하고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다. 좁게는 전화 받는 요령에서부터 넓게는 의사결정 과정의 세부지침까지 행동강령들을 교육하게 된다.

어떤 여성이 아름다워 보이려면 우선은 마음이 건강해야 할 것이다.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화장만 진하게 해서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밝히고 바람직한 처방을 하는 것이 바로 MI와 BI를 설정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이제 건강해진 여성이 적절한 메이크업을 하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이러한 메이크업 활동이 바로 기업 외부의 고객을 의식한 CI 전파작업이며, 마케팅이 해주어야 할 일이다. 여기에는 다시 시각 및 언어적 정체성을 설정하는 두 가지 CI가 있는데, 마케팅 역할과 관련되므로 좀더 상세히 설명한다.

시각적인 정체성 표현

기업의 정체성을 소비자에게 시각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심벌 마크, 로고에서부터 유니폼 또는 회사 차량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인 통합을 시도할 수 있다. 즉 시각적 정체성(VI: visual identity)을 도모하는 것인데, 기업이 이러한 시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손다이크(E.L. Thorndike)라는 심리학자는 학창 시절에 미국의 정부기관에서 실업자들의 직업을 알선하는 부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대공황 시기여서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으므로 손다이크는 이러한 실업자들을 위한 한 가지 아이디어로, 잡지나 신문 등에 나온 각 단어의 수를 세어 정리하게 하였다. 그 일을 한 사람들이 센 단어가 총 450만 개에 달했으며, 오늘날 영어사전에 수록된 각 단어 앞에 별표(*)로 빈도수를 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조사에 기초한 분류다.

후에 그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을 때, 이 조사결과를 이용해 사람들이 각 단어를 얼마나 좋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의미와는 관계없이 자주 쓰인 단어일수록 더 좋게 생각하고 자주 쓰이지 않은 단어들은 덜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 은 각 단어의 빈도수와 그 단어에 대한 호감도를 그래프로 그린 것인데, 빈도에 따라 그 호감도가 거의 일정하게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단순히 어떤 단어를 자주 접함으로써 그 단어가 공연히 좋아지는 신기한 현상인데, 이를 ‘단순노출(mere ex -posure)에 의한 호감형성’이라 한다. 후에 많은 실험을 통해 입증이 된 이 이론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그 정보에 친밀감이 생기고, 그 결과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얼굴 사진을 찍어, 하나는 정상적으로 인화하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인화하였다고 하자. 즉 가르마를 비롯해 오른쪽과 왼쪽이 바뀌어 보일 것이다. 친구들은 정상적으로 인화된 사진이 더 잘 나왔다고 말하지만, 본인은 반대로 인화된 사진이 더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익숙한 얼굴을 더 좋아하는데, 본인은 항상 거울을 통해 거꾸로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반대로 나온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왕가의 공주가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승마 선생과 눈이 맞았다거나, 유명 여가수가 보디가드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뉴스가 흥미를 끌곤 한다. 의아하게 들리지만, 누구든 가까이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이 점점 좋아지기 십상인 것이다. 이처럼 ‘반복된 노출’은 친근감을 가져오고 결국 우호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고운 면은 물론이지만 미운 면도 자주 보면 정(情)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미운 정’이라고 표현한다.

소비자들이 매번 광고를 눈여겨보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저 스쳐 지나간다 하더라도 한 번 스쳐간 광고보다 두 번 접한 광고의 제품을, 두 번 접한 광고보다 세 번 본 광고의 제품을 더 잘 기억하고 더 친근감을, 더 나아가 호감을 갖게 되리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과업계의 선두주자인 ‘구리코(Glico)’ 제과는 초등학교에서 칠판이 낡거나 농구대, 철봉 등이 망가졌다고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무료로 교체하여 준다. 다만 한쪽 구석에 구리코 제과의 상표를 새겨 넣었다. 학생들이 칠판을 쳐다보거나 밖에 나가 놀 때 자연히 그 상표에 노출되므로, 이 아이들이 가게에서 과자를 사게 되면 구리코 과자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연말에 각 기업은 사은품으로 달력을 배포한다. 소비자가 달력을 집에 걸어 놓는다면, 달력 밑의 상표를 1년 내내 보게 되는 셈이다. 그저 지나칠 뿐이라도 자꾸 보게 된다면 그 상표를 더 잘 기억하고 친근감, 더 나아가서 호감을 갖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된 이미지의 상표, 심벌, 로고(logo) 등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기업이나 제품에 대해 친밀감과 호감을 형성하는 것이 시각적 정체성(VI)을 추구하는 의의다.

언어적인 정체성 표현

기업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슬로건 등 언어로도 소비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정체성(verbal iden-tity)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알아보자.

기억하는 원리 중에 재생기억(repro- ductive memory)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정보를 반복적으로 되뇜으로써 정보를 ‘주어진 그대로’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 의미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되면 토씨, 쉼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원문을 그대로 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생기억의 원리는 연쇄작용(associationism)이다. 다시 말해, 앞의 말이 자극(S:stimulus)이 되어 바로 뒤의 말(R:response)이 튀어나오고, 그 말 때문에 그 다음, 또 그 다음 말이 연쇄적으로 생각난다는 것이다. 무지개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라고 기계적으로 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재생기억이다.

그런데 재생기억을 위한 연쇄작용을 촉발하려면 순서에 따라 첫번째 말부터 외우기 시작해야 한다. 맨처음부터 시작하면 쉽게 외울 수 있지만 중간부터 시작하려면 재생이 잘 안 된다. 이를테면 무지개의 색깔 중 초록색 다음이 무슨 색인지 얼른 기억해내기 쉽지 않다. 국민교육헌장도 중간부터 시작하면 외우기 힘들다. 처음 외운 순서대로가 아니면 재생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단어가 시작되면 뒤따르는 말들은 매우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재생기억의 연쇄성과 정확성을 이용해 기업 이미지를 쉽게 전달하곤 한다.

예를 들어 AT·T라는 전화통신 회사의 광고에는 상표 다음에 “The Right Choice(올바른 선택)”라는 말을 항상 붙여 준다. 따라서 AT·T 하면 누구나 “The Right Choice”를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외국 광고에서 “Cars That Make Sense”를 Hyundai라는 상표 다음에 반드시 붙인다. 그럼으로써 현대자동차가 저렴하면서도 쓸모 있는, 적절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쉽게 기억시키려는 것이다.

재생기억을 용이하게 하려면 첫째, 기억시켜야 할 문구를 상표와 함께 수도 없이 반복하여 광고해야 한다. 재생기억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연쇄작용을 촉발시켜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재생기억은 연쇄작용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므로 상표명과 기억되어야 할 문구는 항상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델몬트’ 오렌지 주스가 “따봉”이라는 재미있는 말을 유행시켰지만 사람들이 이 말을 델몬트 상표에 연결시키지 못해 선전문구의 유행만큼 매출이 오르지는 않았다. 또한 상표가 먼저 나와야 연쇄작용에 따른 이미지 전달효과를 높여준다. 따라서 “우리의 날개, 대한항공”에서처럼 ‘우리의 날개’ 때문에 ‘대한항공’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항공은 우리의 날개입니다”처럼 ‘대한항공’ 때문에 ‘우리의 날개’가 생각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따라붙는 문구는 간략해야 한다. “금성,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구는 의미는 좋지만 상표명까지 합치면 다소 길다. 상표명(S) 다음에 나오는 슬로건(R)은 조건반사와 같이, 자동적으로 쉽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재생기억의 원리를 잘 활용하여 기업이 내세우고자 하는 이미지를 간략한 문구로 만들어 항시 상표명과 함께 반복 제시할 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자사의 상표와 핵심적인 이미지를 쉽게 기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신동아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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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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