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은 한국인에게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의문을 새삼 들춰낸 사람이 있다. 바로 성장현 용산구청장(45). 국방부 관재보상과의 한 관계자는 최근 서울 용산구와 주한미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일은 SOFA(한미행정협정)가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용산구의 싸움이 작은 변화의 불씨가 되길 바라는 심정입니다.”
희망보다는 체념이 강한 이 관계자의 말 속엔 주한미군 문제에 관한 한 어깨를 펴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원망과 비판이 담겨 있다.
용산구의 ‘외로운 투쟁’이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3월 중순. 언론은 “주한미군이 불법건축물 시공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중장비를 동원해 강제철거에 나서겠다”는 용산구의 강경 방침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주한미군이 국내에서 갖는 위치를 감안할 때 용산구의 이런 태도는 미군에 대한 ‘전쟁 선포’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간 대학가와 시민운동권 법조계를 중심으로 SOFA 개정 요구가 있었지만 용산구와 같은 행정기관이 나선 것은 처음이다.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이 싸움의 배경엔 한미행정협정에 대한 민족적 공분이 자리잡고 있다. 제정된 지 20여 년이 지난 이 협정은 국방부 관계자의 말마따나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조항으로 채워져 있다. SOFA는 주한미군이 한국 땅에서 사실상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국내법을 따르지 않아도 제재를 받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다. 용산구의 문제 제기는 바로 이에 대한 항의이자 시정 요구다. 말하자면 주한미군측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선 안 되며 국내법을 따라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용산구와 주한미군 사이의 현안은 크게 세 가지. 첫째는 용산 기지에 주둔하는 미군의 건축법 적용 여부. 용산구에 따르면 미군은 국내 건축법을 무시한 채 영내에 호텔을 짓고 있다. 둘째는 주한미군 소속차량의 불법 주·정차 단속 및 과태료 징수 문제. 또 하나의 쟁점은 관내 이태원에 있는 아리랑택시 차고지 반환 문제. 용산구에 따르면 미군은 군사용으로 제공받은 이 땅을 국내 한 택시회사에 대여해 ‘부당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용산구가 미군측에 이 땅 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이곳을 관광특구로 개발하기 위해서다.
민선구청장의 뚝심일까. 주한미군과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SOFA 개정에 소극적인 외교통상부를 성토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국익과 민족의 자존심을 내팽개친 ‘책임 회피’라는 것. SOFA 개정에 대한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이 개정되지 않고선 대한민국은 진정한 주권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용산구와 관내 미군부대는 매분기에 한 차례, 1년에 네 차례 정도 한미친선협의회라는 모임을 갖는다. 용산구청장은 이 협의회의 한국측 위원장이다. 위원은 모두 14명. 경찰서장 소방서장 세무서장 등 지역 기관장이 주요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 의사협회장, 여성계 대표, 용산구 행정관리국장 등이 참석한다. 34지원단장인 용산부대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미군측에선 8군 공병대장, 8군 병원장, 헌병대장 등 11명이 참석한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이 미군의 호텔 증축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모임 덕분이다.
“지난해 연말 제가 미군 부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포장을 쳐놓고 공사를 하더라고요. 처음엔 타일을 붙이는 외벽공사 정도로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직원들을 통해 알아보니 98년 3월 미군측 요청에 따라 외교통상부가 서울시에 이 문제(드래곤호텔 별관 신축)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더라구요. 당시 서울시가 외교통상부에 보낸 공문에 ‘건축행위를 할 때는 관할 허가권자인 용산구청장과 협의해야 한다’고 명확히 답변했더라구요. 그래서 국방부에 물어보니 서울시의 의견과 같았습니다. 이를 근거로 미군측에 협의를 요청했죠.”
―미군측 반응은 어땠습니까.
“1월에 처음 시정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신통한 반응이 없어 2월에 공문을 보냈더니 답변이 왔어요. SOFA 제3조(합중국은 시설과 구역 안에서 이러한 시설과 구역의 설정, 운영, 경호 및 관리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를 내세우며 협의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해요.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검토해보니 SOFA 어디에도 마음대로 건축해도 된다는 규정은 없었습니다. 3월에 2차 공문을 보내 시정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3월 말까지 시정조치하지 않으면 강제철거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통보했죠. 그 전에 한미친선협의회에서도 논의하고 협의회의 그쪽 위원장인 34지원단장과 제가 따로 만나 얘기도 했지만 미군측 태도가 바뀌지 않더라고요. 자기는 군인이기 때문에 협상할 수 없고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발을 빼는 겁니다.”
―외교통상부는 관련 SOFA 규정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외교통상부는 SOFA 3조를 들어 미군측이 건축과 관련해 자율권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국방부도 우리와 시각이 같아요. 지난 2월 국방부가 우리에게 보내온 공문을 보면 국방부는 SOFA 제7조에 근거해 미군측에 국내 건축법을 따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서울시도 의견이 같은데 외교통상부만 견해가 달라요.”
외교통상부의 불리한 해석
SOFA 제7조엔 ‘합중국 군대의 구성원, 군속과 제15조에 따라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 및 그들의 가족은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의 법령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와 관련, 국방부가 2월21일 용산구에 보낸 공문엔 다음 내용이 있다.
‘미8군에서는 SOFA 제3조에 의거해 국내 건축법을 적용하기를 거부하고 있고 당부(국방부)에서는 SOFA 제7조에 의거해 국내법을 적용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상호 해석상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협의를 미측에 요청했음을 양지 바라며….’
이 공문은 국방부 관재보상과에서 작성한 것이다. 한미 양국은 1년에 한두 차례 SOFA 합동위원회(한국측 위원장: 외교통상부 북미국장, 미국측 위원장: 미8군 부사령관)를 여는데 건축에 관련한 사항은 시설·구역 분과위원회 소관이다. 이 시설·구역 분과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장이 바로 국방부 관재보상과장이다(미군측 위원장은 미8군 공병대장).
한편 외교통상부는 3월20일 서울시에 보낸 공문을 통해 ‘현행 SOFA 규정상 주한미군측이 우리 건축법에 따라 용산구청에 협의 또는 허가를 받을 법적인 의무는 없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밝힘으로써 용산구의 문제 제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용산구청 관계자들은 이 공문 내용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공보과장을 겸임하고 있는 박효주 문화체육과장은 “한국 정부의 공문인지 미국 정부의 공문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공보팀의 또 다른 관계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외교통상부를 비난했다. 주택과의 한 관계자는 “건축법에 따르면 미군이 짓고 있는 호텔 별관은 무허가 건축물인데, 부대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며 법 적용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용산구의 이런 울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외교통상부는 느긋하다. 주무부서인 북미국의 송봉헌 북미3과장은 “SOFA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맺은 것”이라며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국내 건축법을 적용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용산구의 문제 제기 방식을 비판했다.
“이런 식의 문제 제기는 처음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감독 기관인 서울시를 통해 외교통상부에 구체적 내용을 알려줘야지요. 지금 용산구청장의 태도는 ‘무조건 내 허가를 받아라’는 식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언론에 알리니 미군측도 감정이 상해 있어요. 서울시를 통해 용산구측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아직까지 답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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