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섯 남매를 두었다. 위로 딸 넷을 얻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얻었다.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들 하나를 낳으려고 딸을 넷씩이나 낳았수?’하고 웃기도 하지만 결코 그런 마음에서 딸을 넷씩이나 낳은 것은 아니다.
아내와 나는 아이가 생길 때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며 함께 기뻐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다보니 다섯 남매를 얻었을 뿐이다.
나는 딸과 아들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혹시 조금이라도 아들을 더 예뻐했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막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인 아들 율이 대학에 들어갔다. 막내가 서울대 의대에 특차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한편으로 큰 짐을 던 듯 홀가분했고, 한편으로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사실 막내의 대학입시가 나에게는 상당히 부담이었다. 딸 많은 집의 외아들이 잘 되는 일이 드물다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막내도 제 누나들 못지 않게 학교성적이 좋은 편이기는 했지만 대학입시라는 것이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신문과 방송에 내가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다섯 남매를 모두 수재로 키웠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소개되었던 것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1946년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에서 태어난 나는 이곳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자랐다. 구룡포 초등학교를 나와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그후 몇년 동안 객지생활을 하다 나이 서른에 고향에 돌아와 25년째 줄곧 농사를 짓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나는 결혼 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시골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관악산 서울대 신축공사장이 나의 일터였다. 이렇게 서울대와 첫 인연을 맺었던 나는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아이들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래, 우리 아이들을 서울대에 보내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큰애가 다섯 살, 둘째가 네살이었다.
‘내가 지금 짓는 이 건물이 인문대 사회관이라 했겠다? 우리 아이들을 법대에 보낼까? 외교학과는 어떨까? 무슨 과면 어때? 애들이 좋아하는 데로 보내면 되지.’
이렇게 아이들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을 나는 공상 속에서 이미 ‘기정 사실’로 만들었다. 법과대학에 들어간 아이가 사법고시에 합격해 온 식구가 함께 기뻐하는 광경을 상상하기도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밤이 점점 짧아지더니 공사 현장에 도착하는 아침 7시면 훤하게 밝았다. 몇 달 동안 일을 하다보니 일이 몸에 붙었는지 예전처럼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자리가 조금씩 잡혀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연락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두 딸과 함께 살게 되니 서울생활이 더 이상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노동판의 퇴근은 저녁 7시였다.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은 “아빠 왔다”고 소리치며 좋아했다. 몸이 고단하여 좀 쉬려고 해도 아이들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둘이 번갈아 기어올라 아빠의 몸을 놀이터로 이용했다. 내 몸은 아이들의 튐뜰이요, 미끄럼틀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기어오르고 매달리고 하는데도 별로 힘들거나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아이들이 내 몸을 놀이터 삼아 뛰고 구르고 하다보니 저절로 안마가 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얼마후 서울에 올라와 건축현장에서 번 돈에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돈을 보태 봉천동 중턱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마련했다. 가게 겸 살림집인 셈이었다. 아내는 가게를 보고 나는 여전히 공사장에서 막일을 했다.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서인지 조금씩 매상이 늘어갔다. 철없는 아이들은 과자 가게를 한다고 좋아했다.
아이들의 인형놀이
우리 아이들은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늘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가끔 고무줄 놀이나 숨바꼭질도 했지만 동네가 워낙 비탈진 곳이라 그런 놀이를 할 만한 곳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일과는 먼저 종이 인형을 사 나르는 것이었다. 집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문방구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 문방구 할아버지의 단골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아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종이 인형 다발을 준비해 두는 것 같았다. 대개 예쁜 공주와 왕자, 왕비와 임금 그리고 그들이 입을 옷. 사는 집, 먹을 음식과 과일, 갖가지 생활 도구도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이 그림 속에 있는 인형과 옷, 집과 가재도구들을 가위로 오려냈다. 그런 다음 인형들에게 옷을 입히면서 각자 역을 정해 온갖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공주, 너는 하녀, 나는 임금, 너는 왕비, 하는 식으로.
집과 가재도구까지 용도에 맞게 배치하면 방안에 하나의 ‘왕국’이 건설되는 셈이었다.
그림 속의 인형과 옷을 가위로 오려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직 다섯 살, 네 살밖에 안 된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림들을 다 오리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리는 큰 일이었다.
가게 일이 점점 바빠져서 나는 공사장 일을 그만두었다. 가게에서 팔 물건을 사기 위해 용산 도매시장에 가는 일 외에는 늘 집에서 아내를 도왔고 시간이 남으면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었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언제나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그때보다 더 행복한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종이에 그려진 어린 공주의 손가락을 가위로 오리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가위질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가위질을 하며 놀다보니 웬만한 어른들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가위질을 하는 것이었다.
문방구에서 산 종이인형이 아무리 많아도 아이들의 욕구를 다 채워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가게에서 나오는 과자 포장지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위질에서 그림 그리기로
처음에는 그림을 보고 베끼더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여러 가지 모양의 공주와 왕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음식이며 옷가지, 집 등 자기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렸다.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나는 색연필, 색도화지, 크레용 등을 사다 주느라 바빴다.
나는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거야” 하면서 참견한 적은 한번도 없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 그림이 아무리 서툴러 보여도 “아이구, 잘도 그렸네. 우리 집 화가들 봐라”하면서 대견하게 여기고 칭찬했다. 이렇게 추켜주니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나에게 자기들이 그린 그림에 이름을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한두 개야 할 수 있겠지만 그 많은 공주들과 왕자들 그리고 시녀들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다 짓는다는 말인가. 아이들이 차곡차곡 모아둔 인형 그림들은 수십개, 아니 수백개는 돼 보였다.
“너희들이 지어봐. 너희들이 지으면 아빠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꾀를 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는 공주 많지 않니? 네가 아는 공주 이름과 비슷하게 지어보면 되지 않겠니?”
그때 우리 아이들은 아직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그 많은 공주와 왕자 이름은 글을 아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익힌 것이었다. “네가 아는 공주 이름과 비슷하게 지어보면 되지 않겠니?” 하는 내 말에 큰 아이는 대뜸 “라리 공주라고 하지 뭐”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맞장구 쳐주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들이 인형 이름을 붙여놓고 기뻐했다.
이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그린 공주 밑에 ‘리라’공주 이름을 거꾸로 하여 ‘라리’ 공주라고 썼다. 처음에는 글자를 썼다기보다는 그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말하자면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인형 이름에 있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발음해보고, 그렇게 알게 된 글자를 하나씩 베껴 쓰면서 새로 그린 그림인형의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과자상자로 글자 깨치기
우리는 아이들이 이렇게 노는 광경을 보면서 ‘아하, 이렇게 하면 글자를 깨치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가구가 없었다. 이부자리를 방 한 켠에 가지런히 포개두었고 옷가지는 빈 라면 상자나 과자 상자에 넣어두고 살았다. 가게가 비좁아 과자 상자를 방안에 쌓아두기도 했다. 말하자면 방이 창고 겸 거실이었고, 침실 겸 아이들 놀이방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 과자 상자로 ‘공부놀이’를 시작했다. 공부란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공부’라고 하지 않고 늘 ‘공부놀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공부놀이’ 이외에도 ‘학교놀이’ ‘글자놀이’ 등 아이들이 하는 일에는 무엇이나 ‘놀이’라는 말을 넣어 주었다.
‘라면땅’이라는 과자 상자가 누워 있는 우리 눈에 들어왔다.
“얘들아, 저 상자를 좀 봐라. ‘라면땅’의 ‘라’자 하고 ‘라리공주’의 ‘라’자 하고 같지?”
이렇게 설명하면 아이들은 그 글자에도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무척 재미있어 했다.
가게에 있는 그 많은 과자들의 이름은 모두가 공주와 왕자의 이름에 활용되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과자 상자에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그 글자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스스로 깨쳐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동네 간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자기들이 아는 글자는 소리내 읽고, 모르는 글자는 묻곤 했다.
나는 아이들이 글자 공부를 재미있는 ‘놀이’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을 뿐,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참 놀라운 존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이런 놀이를 통하여 받침 없는 글자는 거의 다 읽어냈다. 그것이 정말 신기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지내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다 신문에 우리가 살던 봉천동이 전부 철거된다는 기사가 났다. 살던 집은 무허가 건물이었는데, 세든 사람들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우리는 그 말에 지레 겁을 먹고 잘 되던 가게를 정리했다.
큰아이가 여섯 살, 작은아이가 다섯 살이던 1995년 추석 무렵,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인형 놀이는 이곳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하던 것처럼 구룡포 읍내에 나가 종이 인형, 도화지, 색연필 등을 아이들에게 사다주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종이 한장, 연필 한 자루에 벌벌 떨 정도로 물건을 아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그런 것이 풍족했다. 남들보다 특별히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종이 몇 장, 연필 몇 자루 정도는 아끼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날짜가 지나지 않은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려도 아이들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들에겐 우리 집이 제일 좋을 수밖에.
인형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에 도가 텄는지 아이들은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이 책 저 책을 보고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책과 아주 흡사하게 그렸다. 동네 아이들은 빙 둘러앉아 우리 아이들의 그림을 구경하면서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1976년 1월12일에 셋째가 태어났고, 이듬해 봄날 큰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다. 큰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이 약한 편이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2km 이상 되었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차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사서 태워주기로 했다. 비포장 도로여서 노면이 울퉁불퉁한 곳을 지날 때는 자전거가 덜컹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하교 길도 자전거로 도와 주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