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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전농림장관의 ‘관료들과의 전쟁’ 29개월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김성훈 전농림장관의 ‘관료들과의 전쟁’ 2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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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포매립지 용도변경 노린 政·官·言 로비
  • ● 대통령 팔아 나를 협박한 장관
  • ● 선후배가 뭉쳐 관련법까지 뜯어고친 부패커넥션
  • ● 업자에게 외상값 떠넘기고, 복사기까지 징발한 관료
  • ● 로비리스트 나돌자 얼어붙은 공무원들
”홍시도 때가 되면 떨어집니다. 나무가 붙잡을 수도 없고, 나무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겁니다.”

2000년 8월7일 오전, 청와대의 개각 발표가 나온 직후 2년6개월 동안 농정개혁을 진두지휘했던 김성훈(63) 전농림부장관이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김전장관은 마치 오래 전부터 퇴임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틀 뒤 가족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났다. 김전장관은 “대통령에게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고 털어놓았다.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냈으니, 학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이다.

김전장관은 학자로 돌아온 뒤 여러 곳에서 유혹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농정개혁 프로그램을 완성시킨 사람으로서 나름의 ‘상품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응하지 않았다. 8년 된 소나타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면서도 이권이 예상되는 장(長) 자리를 거듭 거절하고 그가 새롭게 뛰어든 곳은 NGO였다.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와 내셔널트러스트운동 공동대표를 포함해 그가 현재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만도 무려 8개에 이른다.

김전장관은 정치권이 요동치고 개혁정책이 좌초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와서 참느라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털어놓을 뿐 공식적인 발언은 자제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정부현안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퇴임 직후 가진 ‘신동아’ 인터뷰에서 ‘그 자리를 떠나서는 그 자리의 일을 논하지 말라’는 맹자의 문구를 떠올렸으며, 2001년 9월 ‘신동아’에 기고한 ‘벼슬자리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라는 수필에서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길게 인용한 뒤 현직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공직자의 미덕이라고 밝혔다.

‘무릇 벼슬살이란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국리민복을 위해 대리 행사하는 자리다. 관직은 영원히 소유할 대상이 아니다. 구한다고 해서 뜻대로 얻어지는 자리도 아니다. 주인인 백성의 뜻에 따라 임시 관리하는 자리에 불과하다. 공직자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아야 그 자신은 물론 나라가 평안하다.’



그러나 연말연시를 전후로 각종 게이트가 터져나오면서 김전장관의 심경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1월14일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을 지켜본 뒤에는 위기 불감증에 빠진 정부관료와 복지부동으로 일관하는 일부 각료를 향해 뼈 있는 비판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개각과정에서 민심을 반영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1·29 개각은 국민들의 기대와 어긋났다. 김전장관의 우회적인 표현처럼 ‘처세에 능해 스스로 물러나야 할 사람’이 살아 남았다.



人事는 萬事


이 무렵부터 김전장관은 고민에 빠졌다. 김대중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의 정부’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더 늦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대통령에게 고언을 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물러난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관료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공개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관료를 휘어잡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전장관의 경험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김전장관은 인터뷰를 약속하고도 며칠을 망설였다. 아무리 좋은 뜻에서 관료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공무원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가 틀어질까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택했다. 자신이 지인들로부터 받게 될 비난은 작은 손실이요, 후퇴하고 있는 개혁의 물줄기를 되돌리는 것은 국가적 대사라고 판단한 셈이다. 그는 내친 김에 학자 출신 장관이 관료를 어떻게 길들여야 하며,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언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느냐 하는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말하자면 김성훈판 ‘관료학개론’을 발표한 셈이다. 2월9일 오전 김전장관의 집을 찾았다.

김전장관은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다면 장관이 될 수 없는 이력의 소유자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는 농림부의 골치 아픈 존재였다. 대학교수 신분으로 1992년 농민단체와 함께 UR협상 반대운동을 벌일 때부터 그는 정부의 농업정책을 줄기차게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김전장관은 ‘신운동권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농림부 산하기관의 각종 자문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조각(組閣)을 할 때도 농림부는 자민련 몫으로 분류돼 있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막판에 김종필 국무총리 내정자와 의견일치를 보면서 극적으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김대통령이 김전장관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과 무관치 않다. IMF환란 이후 한국경제는 급속한 위기를 맞았는데, 특히 농촌의 피해가 극에 달했다. 축산농가는 돼지를 내다버렸고, 젖소 송아지는 고양이 값보다도 싸게 팔렸다. 농산물 값도 바닥까지 떨어져 파산하는 농민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김대통령으로서는 농정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전장관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가장 먼저 ‘인사개혁’을 떠올렸다고 한다. ‘인사는 만사’라는 말처럼 인사가 잘못되면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요즘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김대중 정부 4년을 평가하면서 인사정책을 가장 호되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인사문제에 대한 김전장관의 독특한 대처방식은 매우 돋보이는 대목이다.

김전장관이 농림부 인사에 온 신경을 집중한 이유는 또 있다. 그건 바로 농림부가 구정권에서 ‘찬밥’ 대우를 받는 과정에서 호남 출신 인사들의 집합소처럼 돼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전장관이 임명될 당시 13명의 국장 중 7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과장급도 30% 이상이 호남 출신으로 다른 정부부처와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많은 부처에서 정권교체 이후 호남인사들의 약진이 이루어진 반면 농림부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전장관이 재임하는 동안 승진한 사람이 모두 127명(4급 이상)인데, 이중 영남이 28.5%로 가장 많고, 호남 27%, 서울·경기 15.3%, 충청 11.7%의 순이었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김전장관으로서는 호남편중 인사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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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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