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김성훈 전농림장관의 ‘관료들과의 전쟁’ 29개월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04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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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포매립지 용도변경 노린 政·官·言 로비
    • 대통령 팔아 나를 협박한 장관
    • 선후배가 뭉쳐 관련법까지 뜯어고친 부패커넥션
    • 업자에게 외상값 떠넘기고, 복사기까지 징발한 관료
    • 로비리스트 나돌자 얼어붙은 공무원들
    ”홍시도 때가 되면 떨어집니다. 나무가 붙잡을 수도 없고, 나무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겁니다.”

    2000년 8월7일 오전, 청와대의 개각 발표가 나온 직후 2년6개월 동안 농정개혁을 진두지휘했던 김성훈(63) 전농림부장관이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김전장관은 마치 오래 전부터 퇴임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틀 뒤 가족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났다. 김전장관은 “대통령에게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고 털어놓았다.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냈으니, 학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이다.

    김전장관은 학자로 돌아온 뒤 여러 곳에서 유혹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농정개혁 프로그램을 완성시킨 사람으로서 나름의 ‘상품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응하지 않았다. 8년 된 소나타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면서도 이권이 예상되는 장(長) 자리를 거듭 거절하고 그가 새롭게 뛰어든 곳은 NGO였다.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와 내셔널트러스트운동 공동대표를 포함해 그가 현재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만도 무려 8개에 이른다.

    김전장관은 정치권이 요동치고 개혁정책이 좌초할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와서 참느라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털어놓을 뿐 공식적인 발언은 자제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정부현안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퇴임 직후 가진 ‘신동아’ 인터뷰에서 ‘그 자리를 떠나서는 그 자리의 일을 논하지 말라’는 맹자의 문구를 떠올렸으며, 2001년 9월 ‘신동아’에 기고한 ‘벼슬자리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라는 수필에서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길게 인용한 뒤 현직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공직자의 미덕이라고 밝혔다.

    ‘무릇 벼슬살이란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국리민복을 위해 대리 행사하는 자리다. 관직은 영원히 소유할 대상이 아니다. 구한다고 해서 뜻대로 얻어지는 자리도 아니다. 주인인 백성의 뜻에 따라 임시 관리하는 자리에 불과하다. 공직자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아야 그 자신은 물론 나라가 평안하다.’



    그러나 연말연시를 전후로 각종 게이트가 터져나오면서 김전장관의 심경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1월14일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을 지켜본 뒤에는 위기 불감증에 빠진 정부관료와 복지부동으로 일관하는 일부 각료를 향해 뼈 있는 비판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개각과정에서 민심을 반영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1·29 개각은 국민들의 기대와 어긋났다. 김전장관의 우회적인 표현처럼 ‘처세에 능해 스스로 물러나야 할 사람’이 살아 남았다.



    人事는 萬事


    이 무렵부터 김전장관은 고민에 빠졌다. 김대중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의 정부’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더 늦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대통령에게 고언을 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물러난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관료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공개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관료를 휘어잡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전장관의 경험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김전장관은 인터뷰를 약속하고도 며칠을 망설였다. 아무리 좋은 뜻에서 관료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공무원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가 틀어질까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택했다. 자신이 지인들로부터 받게 될 비난은 작은 손실이요, 후퇴하고 있는 개혁의 물줄기를 되돌리는 것은 국가적 대사라고 판단한 셈이다. 그는 내친 김에 학자 출신 장관이 관료를 어떻게 길들여야 하며,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언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느냐 하는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말하자면 김성훈판 ‘관료학개론’을 발표한 셈이다. 2월9일 오전 김전장관의 집을 찾았다.

    김전장관은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다면 장관이 될 수 없는 이력의 소유자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는 농림부의 골치 아픈 존재였다. 대학교수 신분으로 1992년 농민단체와 함께 UR협상 반대운동을 벌일 때부터 그는 정부의 농업정책을 줄기차게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김전장관은 ‘신운동권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농림부 산하기관의 각종 자문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조각(組閣)을 할 때도 농림부는 자민련 몫으로 분류돼 있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막판에 김종필 국무총리 내정자와 의견일치를 보면서 극적으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김대통령이 김전장관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과 무관치 않다. IMF환란 이후 한국경제는 급속한 위기를 맞았는데, 특히 농촌의 피해가 극에 달했다. 축산농가는 돼지를 내다버렸고, 젖소 송아지는 고양이 값보다도 싸게 팔렸다. 농산물 값도 바닥까지 떨어져 파산하는 농민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김대통령으로서는 농정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전장관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가장 먼저 ‘인사개혁’을 떠올렸다고 한다. ‘인사는 만사’라는 말처럼 인사가 잘못되면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요즘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김대중 정부 4년을 평가하면서 인사정책을 가장 호되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인사문제에 대한 김전장관의 독특한 대처방식은 매우 돋보이는 대목이다.

    김전장관이 농림부 인사에 온 신경을 집중한 이유는 또 있다. 그건 바로 농림부가 구정권에서 ‘찬밥’ 대우를 받는 과정에서 호남 출신 인사들의 집합소처럼 돼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전장관이 임명될 당시 13명의 국장 중 7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과장급도 30% 이상이 호남 출신으로 다른 정부부처와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많은 부처에서 정권교체 이후 호남인사들의 약진이 이루어진 반면 농림부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전장관이 재임하는 동안 승진한 사람이 모두 127명(4급 이상)인데, 이중 영남이 28.5%로 가장 많고, 호남 27%, 서울·경기 15.3%, 충청 11.7%의 순이었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김전장관으로서는 호남편중 인사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다.

    김전장관은 취임 직후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두 가지 원칙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첫째, 재임중 농림부와 산하기관 직원은 절대로 장관의 집에 찾아올 수 없다.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사무실에서 절차에 따라 만나야 한다. 둘째, 기업가와 만날 수는 있다. 하지만 장관실에서 해당 국장의 입회하에 기록하면서 만난다. 이것은 비리사건의 상당수가 사적인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며칠 뒤 첫째 원칙을 어긴 사람이 나타났다. 역대 호남출신 장관의 심부름을 도맡았다는 농림부 과장급 직원 Y씨가 두 차례에 걸쳐 김전장관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그동안 여러 장관을 모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활용해주십시오. 제 고향은 전라도 ○○이고, 장관님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바로 다음날 김전장관은 간부회의에서 이 사실을 공표하고 Y씨를 한직으로 전보 발령했다. 그리고 얼마 뒤 구조조정 과정에서 Y씨를 명퇴시켰다. 김전장관은 “지금 생각하면 아주 미안한 일이지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회고했다.

    김전장관의 가족 중에서도 원칙을 위반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칠순을 넘긴 큰누나다. 큰누나는 김전장관을 어릴 때부터 뒷바라지해준 어머니 같은 존재다. 하지만 큰누나가 “내 초등학교 동창의 아들이 농림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는데 본부로 승진시켜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력서를 건네자, 김장관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누님이 나를 장관시켰소? 나는 이렇게 부탁하는 놈을 벌줘야겠습니다. 누님은 내가 장관 그만둘 때까지 우리 집 출입금지요. 대신 철마다 인사는 하겠습니다.” 그러자 큰누나는 통사정을 하면서 “처벌만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 김전장관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나도 참 못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관료는 집단으로 행동한다


    김전장관은 자택을 공개하지 않은 탓에 ‘봉변’도 겪었다. 취임 직후 터진 김강용 절도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김강용의 변호사는 “삼성동 현대빌라 김성훈 장관의 집에서 운보 그림 300호 등을 훔쳤다”고 말했다. 김전장관의 집은 큰 그림을 걸어놓을 만큼 넓지 않았음에도, 농림부 직원 가운데 장관의 집에 가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보니 아무도 대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김강용이 현장검증에서 또 다른 ‘현대빌라’를 지목하면서 오해가 풀렸는데, 김전장관은 그때서야 직원들을 초청해 저녁을 대접했다.

    기업가와는 반드시 기록하면서 만나겠다는 원칙은 김포매립지 사건이 터졌을 때 위력을 발휘했다.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은 김포매립지의 용도를 바꾸기 위해 다양한 루트로 로비활동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김장관은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이 걸린 문제다. 김포매립지를 풀어줄 경우 수서비리 이상의 게이트가 터질 수 있다”며 완강히 반대했던 것이다.

    이 무렵 김장관은 최회장과 장관실에서 만난 일이 있다. 물론 농림부 간부 두 사람이 대화를 기록했다. 이날 최회장은 김장관의 ‘국가기강론’에 설복당해 마침내 “그렇다면 그냥 농사를 짓죠”라며 물러섰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 최회장은 용도변경을 추진한다며 일본 용역회사와 계약까지 맺었다. 그러자 일부 신문에서는 김장관의 뇌물 수수의혹을 흘리기도 했다. 이때 김장관은 ‘비장의 무기’인 회의록을 전격적으로 공개했고, 김포매립지를 둘러싼 용도변경 논쟁은 막을 내렸다.

    김포매립지를 둘러싼 농림부와 동아건설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과정에 김장관은 수많은 압력을 받았다. 그는 퇴임 직후 당시의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일이 있다.

    “대한민국의 한다 하는 정치인은 거의 다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김포매립지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도 농림부장관 빼고는 전부 풀어주자고 했어요.(중략) 워낙 압력이 세게 들어와서 김종필 총리에게 보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권이 다 허용해주라고 했지만, 김총리는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도 동아그룹이 포기하지 않아 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아무리 기업이 어려워도 부정한 방법으로 도울 수는 없다’며 농림부에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김전장관은 김포매립지 사건을 통해 관료는 위험이 따르는 사안이 발생할 경우 집단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농림부에 대한 로비가 관계부서 관료들을 통해 아주 치밀하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학연과 지연이 개입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코너에 몰린 김장관은 마지막 카드를 뽑았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의 아킬레스건을 공격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정말 특정기업에 특혜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들 이름으로 결의하라. 농림부장관은 용도변경에 반대했는데, 누구 누구가 찬성해서 용도변경을 할 수밖에 없다고 써라. 그러니까 아무도 더 얘기를 못하더라고.”

    김전장관은 이 과정에 대통령과 교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여러 명의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움직인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끝까지 김장관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김전장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아무한테도 공개하지 않고 묵묵히 버텼던 거죠. 그런데 얼마 후 어떤 장관이 나한테 대통령이 해주랬다고 말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전하면서 나를 협박한 거예요.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압력을 넣길래 내가 그 분에게 ‘대통령께 물어보겠다’고 하니까 금세 얼굴이 빨개지면서 ‘해주라는 게 아니라 협의하라는 얘기’라며 꼬리를 내리더라고요. 그 사람과 동아그룹 고위관계자가 모대학 동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까지 속이려고 든 겁니다.”

    김전장관은 동아그룹측이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금품을 제공하려 했던 사실도 공개했다. 최회장은 김전장관이 “장관실이 아니면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자, 전직 장관 K씨를 내세워 “호텔에서 만나자. 한번만 만나주면 평생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말을 전해왔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 김장관은 농림부 직원들에게 “누구든 기업인들과 밀실에서 만나 협상하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엄명을 내렸다.

    김전장관이 취임한 시기는 IMF 직후였다. 따라서 기업은 물론 정부부처에도 구조조정의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느 조직이든 사람을 정리하면 잡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농림부는 23.6%를 잘라내면서도 별다른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것은 김장관이 도입한 과거불문의 원칙과 상향평가 방식 덕분이었다.

    김장관은 9개 국장급 인사를 단행하기에 앞서 서기관급 이상 간부 80여 명을 소집했다. 그리고는 9개 국장자리가 공란으로 남겨진 설문지를 돌리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적임자를 쓰라”고 말했다. 농림부는 오랫동안 순환보직제를 실시해왔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은 여러 부처에서 골고루 표가 나올 것이라고 본 것이다. 실제로 김장관의 예상은 적중했다. 인사기록카드를 검토하고 개별적인 탐문자료를 취합해 김장관이 직접 작성한 국장 후보와, 농림부 직원들의 평가는 거의 일치했다. 이렇게 해서 인사시비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청탁하면 불이익 당한다


    상향식 평가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투표결과 2∼3표밖에 얻지 못한 4명의 국장을 명퇴시키는 일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 이들을 출신지로 보면 호남 3명, 충청 1명이었는데, 해당지역 국회의원들이 김장관을 압박한 것이다. 하지만 김장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관이 외압과 청탁을 거부해야만 관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동교동계의 실력자 A씨는 세번에 걸쳐 전화를 걸어왔다. A씨는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지만, 김장관은 “이러시면 대통령께 누가 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며 설문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A씨도 “알겠습니다”라며 물러섰다.

    야당의원 L씨도 전화로 “충청도 사람을 왜 치려고 하느냐. 전라도 놈이 다 해먹는 거냐”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때도 김장관은 설문결과를 제시하며 “2표밖에 안 나온 사람을 국장으로 앉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충청도는 1명이지만, 전라도는 3명이나 잘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재야인사 출신의 또 다른 야당의원 L씨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후배를 승진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김장관은 L의원에게 인사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김장관은 그뒤 L의원이 추천한 사람에게 오기로 불이익을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정치인에게 부탁이나 하는 사람은 공직자로서 기본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강원도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부탁한 사람이 있었어요. 나는 지금도 만일 그 사람이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더 빨리 승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관이 어떠한 경우에도 청탁이 통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직원들이 열심히 따르는 겁니다.”

    하지만 빈틈 없이 인사문제를 처리하던 김장관도 실수한 일이 있다. 바로 1999년말의 소값파동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J과장을 과도하게 징계한 것이다. 김전장관은 최근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엔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농림부가 일종의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것. 김전장관은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김동태 현 장관에게 공문을 띄웠다. J과장에 대한 인사조치는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퇴임한 장관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장면은 여러 모로 신선해 보인다.

    김장관이 이처럼 농림부 인사에 신중을 기했던 이유는 산하기관에 끼칠 영향 때문이었다. 김장관은 농림부가 먼저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산하기관의 구조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상향식 평가’를 도입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많은 부처의 산하기관 수장이 바뀐 것과는 대조적으로 농림부에서는 기존 인물이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김장관이 취임할 당시 유통공사 사장은 군출신인 최일근씨였다. 김장관은 최사장에게 구조조정 30%, 해외 부실지사 폐지 등을 제안하고, “이것을 실행할 경우 대통령께 보고해서 임기를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사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별다른 잡음 없이 그 이상의 개혁을 단행했다. 김장관도 약속한대로 최사장이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최사장은 구정권 군출신 인사로 끝까지 자리를 지킨 유일한 기관장으로 기록됐다.

    “주변에서는 정권이 교체됐으니까 다 바꿔야 한다는 분위기가 많았죠. 실제로 특정 인물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있었어요. 그때 대통령께 보고했습니다. ‘개혁을 제대로 하려면, 과거정권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도 방법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결과적으로 최사장의 경우 구정권 사람이었지만 구조조정을 잘 해냈잖아요.”

    하지만 농협·축협·인삼협 등 협동조합을 통합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다. 김장관은 1999년 3월5일 정부시안을 발표하면서 사표를 썼다. 차관과 차관보, 담당국장도 그 뒤를 따랐다. 실패할 경우 책임을 지고 모두 물러나겠다는 결연한 자세였다. 김장관은 이날 농림부 전직원을 소집해 조회를 열고 동참을 호소했다. 10만명을 거느린 조직을 상대로 800명밖에 안되는 농림부가 싸움을 건 만큼, 전직원이 똘똘 뭉쳐야만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김장관은 최대의 고비를 맞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뛰던 농림부 직원들이 갑자기 움츠러든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난 5년간 떡값을 받은 공무원의 명단을 발표하겠다’는 축협노조의 선전포고가 결정적이었다. 순환보직제가 관례로 돼 있는 농림부에서 지난 5년 동안 축산국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소수였던 것이다. 결국 이 해프닝은 농림부 직원들이 축산국에 머무는 동안 ‘부적절한’ 돈을 받았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결정적 증거인 셈이다.

    김전장관은 농림부 축산국의 실태에 관한 감사결과를 보고받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이 구정권에서 비롯된 사건이었지만,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전장관이 밝힌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먼저 ‘소귀 표 사건’이다. ‘소귀 표’는 김영삼 정부 때 추진한 것으로 전국의 모든 소의 귀에 표식을 달아서 소의 호적을 만드는 사업이다. 소를 품종별로 관리하겠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상이었지만, 진행과정에서 본래 의도는 사라지고 어떤 표식을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이권사업으로 변모했다. 업자들의 로비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결국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수십억원의 예산을 낭비하고 중단됐다.

    다음으로 ‘브루셀라병 백신사건’이다. 소에게 많이 발생하는 브루셀라병을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개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1997년 대통령선거 기간의 혼란한 틈을 이용해 농림부 축산국이 특정인의 거짓 실험결과만 믿고 백신 개발을 허가해주면서 시작됐다.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출시된 백신의 성능이다. 소의 유산을 막으라고 만든 백신이 오히려 유산을 촉진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농림부가 축산농가에 물어준 돈만 500억원이 넘는다.



    관료, 명분만으로는 안 움직여


    동물약품 파동도 있었다. 이것은 비타민 아미노산 등을 특정 동물약품회사가 독점 공급하게 한 뒤 매년 100억원 이상의 이권을 챙긴 비리사건이다. 김장관의 주도로 규제완화 조치가 공개된 뒤 모 약품회사는 김장관을 비방하며 헌법소원까지 냈다. 김전장관은 이 사건을 회고하며 “선후배들이 똘똘 뭉쳐서 법까지 뜯어고치고, 관료들은 부정한 돈을 받아먹었다. 개혁은 땅 짚고 헤엄치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잘못된 관례를 뿌리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9년 3월엔 농림부 감사 결과가 파문을 일으켰다. 감사원은 문민정부 시절 농업구조개선사업을 위해 조성한 42조원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 결과 농민을 지원해야 할 돈이 엉뚱하게 쓰여진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심지어 노래방을 짓는데 농민 지원금을 쓴 일까지 있었다. 김장관은 이 내용을 보고받고 ‘현장감시단’을 출범시켰다. 어떤 지방자치단체든 부정하게 돈을 쓰면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경고메시지까지 띄웠다.

    하지만 아무리 명분이 좋은 개혁도 독불장군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법이다. 김장관은 축협노조가 관료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움직이지 않는 농림부 직원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또 다시 ‘과거불문론’을 내걸고, 직접 사정당국 관계자를 만나 “과거의 관행으로 챙긴 떡값은 앞으로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사면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김장관의 노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무렵 김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과거에 받은 경미한 떡값이나 향응은 불문에 붙인다. 하지만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장관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전장관은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관료는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합치될 때만 움직이고, 명분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개인에게 위해의 소지가 있으면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김전장관은 “장관이 아랫사람을 보호해주지 못하면 곧바로 역포위를 당한다. 장관의 얘기가 순식간에 밖으로 흘러나가고 그것이 다시 장관을 공격하는 무기가 돼서 돌아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농림부 인사와 산하기관 구조조정 문제를 매듭지은 김장관은 본격적인 내부개혁에 돌입했다. 김장관은 오랫동안 재야단체와 함께 농림부를 비판해왔기 때문에 농림부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장관은 환부를 잘못 건드릴 경우 덧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관료들과 함께 수술에 들어가기로 했다. 모든 간부에게 과거불문과 비밀보장의 원칙을 천명하고 현재까지 관행으로 지속되고 있는 부조리와 비리사례를 구체적으로 보고하는 ‘자술서’를 쓰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서기관급 이상 간부 63명이 참여했다.

    “‘장관 혼자만 볼테니 아는 대로 써라. 만약 불성실하게 대답한 것이 확인되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죠. 나는 그때까지 농림부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자술서를 받아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공직사회가 이렇게 썩을 수가 있을까? ‘이걸 몰랐으니 장관이 관료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술서에서 가장 많이 나온 내용은 각종 ‘떡값’이었다. 이밖에 외상값을 ‘고의로’ 갚지 않은 행위, 산하기관에 비용을 떠넘기거나 예산을 배정하면서 부담을 전가하는 사례 등이 낱낱이 공개됐다. 김장관은 자술서를 자세히 검토한 뒤 각 부서를 순회하면서 수술을 시작했다. 김전장관이 일부 공개한 자술서의 내용과 조치내용을 보면, 감히 현대판 ‘목민심서’에 견줄 만하다.

    쪾산하기관 회의에서 농림부 직원이 상습적으로 돈을 받고 있었다. 특히 산하기관이나 협회 사람들은 농림부 직원이 혼자 참석했을 때 집중적으로 돈봉투를 내밀었다. 그래서 사적인 만남을 엄격히 통제하자 모 협회 L회장은 ‘김성훈이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산다’고 항의했다. 그래서 회의에는 참석하되 반드시 사전에 상급자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쪾농림부 직원들이 잘 다니는 식당이 있었다. 산하기관 사람들은 농림부 직원들이 밥 먹으러 오는 시간에 맞춰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밥을 먹기 전에 의례적으로 고스톱을 치면서 돈을 잃어주었다. 거의 날마다 노름을 하면서 밥값을 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통상적인 단체식사 외에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

    쪾직원들이 곳곳에 외상값을 쌓아놓고 갚지 않았다. 1000만원이 넘는 부서도 있었다. 그래서 모든 부서에 밀린 외상값 명세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장관의 판공비로 50%를 갚아주고 나머지는 국·과장 책임하에 변제하라고 말했다. 또 부서장들에게 ‘큰 산하기관을 거느린 부서도 불고기 대신 뚝배기를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쪾장관이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밥값이 늘어난다고 항의하는 직원도 있었다. 밤 9시를 기준으로 밥을 시키는데, 장관이 12시까지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아무도 퇴근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9시만 되면 장관 방에 불을 모두 끄고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쪾A부서는 산하에 힘 있는 기관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가운전을 하게 돼 있는 국장이 자동차와 운전기사를 제공받으면서 출퇴근했다. 곧바로 자동차와 운전기사를 해당 기관으로 돌려보냈는데 모 방송사에서 재경부와 농림부의 직권남용 문제를 터트렸다. 결국 재경부 직원은 경고조치를 받았지만, 농림부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쪾B부서는 최신형 복사기가 각 과마다 있었다. 다른 부서는 구형 복사기를 여러 과가 함께 쓰는데 A부서만 남달랐다. 그것은 농림부 산하의 모 기관에서 그냥 가져온 복사기였다. 산하기관의 약점을 노린 농림부의 횡포였다. 그래서 복사기를 반환하도록 조치했다. 이밖에 임의로 가져온 팩스기, 컴퓨터 등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밖에 각종 사업자들이 농림부를 자유롭게 출입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의견도 있었다. 김장관은 가장 공정하게 사안을 처리해야 할 정부부처가 업자들의 로비현장으로 전락한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이권업무를 대폭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했다. 물론 지방자치단체에는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예산배정시 불이익을 주겠다’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농림부 청사에서 업자를 추방하자”면서 김장관이 제시한 것이 유명한 ‘곰팡이 이론’이다. ‘물기가 있는 곳에는 곰팡이가 산다. 아무리 물기를 닦아도 곰팡이는 죽지 않는다. 곰팡이를 잡는 유일한 방법은 물기를 없애는 것이다’ 김장관은 업자들의 농림부 출입을 막는 것만이 부패를 없애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김장관은 비용절감 측면에서도 수많은 관례를 깨뜨렸다. IMF 상황이기는 했지만, 김장관의 지나친 ‘결벽증’에 불만을 터트리는 농림부 직원들이 속출했을 정도다. 김장관은 취임 직후 미얀마에서 열리는 FAO(세계식량기구) 회의에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김장관은 출국을 앞두고 산하단체 사장들과 10분씩 릴레이 면담이 짜여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명분은 현안을 논의하자는 거였지만,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이날 산하단체 사장들은 예외 없이 돈봉투를 내밀었다는 것. 일부 농림부 간부들도 ‘축 장도금’이라고 적힌 봉투를 내놓았다. 그들은 관례에 따라 그렇게 했으니 받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김장관은 “시대가 달라졌다. 장관은 판공비를 쓰면 된다. 왜 여러분 돈을 받느냐. 판공비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다녀와서 명세서를 제출하겠다”고 맞섰다. 실제로 김장관은 재임중 다섯 번 해외출장을 떠났는데, 다섯 번 모두 출장비를 남겨서 국고에 반납했다.

    김장관의 결벽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공무원 출장규정상 비행기를 탈 때 장관은 퍼스트클래스, 국장은 비즈니스클래스를 이용하게 돼 있다. 그런데 김장관은 항상 비즈니스클래스를 고집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바람에 이코노믹클래스를 탈 수밖에 없었던 담당국장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보다못한 항공사 관계자가 “업그레이드를 해드리겠습니다”라고 권했지만, 김장관은 “나는 비즈니스 요금을 지불했다. 그러니 업그레이드는 직권남용”이라고 말했다.

    김장관은 전임 장관들이 10여 명씩 데리고 다니던 FAO 총회 수행원도 5명으로 줄였다. 숙소도 스위트룸이 관례였지만 일반객실로 낮췄다. 김장관은 경제가 어려운 만큼 공직자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소신을 내세웠지만,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얀마에서 생긴 일이다. 김장관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수행비서와 같은 방을 썼다. 김장관은 방에서, 비서는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잤던 것. 그러자 담당국장이 “외국인들이 호모라고 오해한다”며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때 김장관은 “상관없다. 자꾸 의심하면 ‘미얀마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폭파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신변안전을 위해 함께 잘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라”는 말까지 했다.

    김장관은 태평했지만, 곁에서 잠을 청하던 수행비서 K씨는 뜻하지 않은 ‘봉변’을 겪었다. K씨는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웠지만 김장관의 방을 통해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결례일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김장관이 “괜찮으니까 오늘부터는 내 방의 화장실을 쓰라”고 말했는데, K씨는 어둠 속에서 화장실로 들어가다가 김장관의 애프터 쉐이브 로션병을 깨뜨렸다. 그리고 마지막날 밤, K씨는 결국 오줌을 싸고 말았다.

    김장관의 자린고비 일화는 또 있다. 장관이 집무실에 들어가면 모두 24개의 전등이 켜지게 돼 있었다고 한다. 김장관은 이 가운데 머리 위에 있는 것만 빼고 모두 끄고 지냈다. 이 바람에 김장관의 집무실은 캄캄했다고 한다. 장관이 솔선수범하자 다른 사무실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구별로 스위치를 따로 연결하고, 전등에서 전구를 빼내는 작업이 일제히 벌어졌다. 김장관의 절전 노력은 아주 엉뚱하게 결실을 보았다. 행정자치부 산하 정부종합청사 관리공단이 농림부에만 예외적으로 수해상황실에 개별 에어컨 설치를 인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자 출신은 공직사회에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한다. 관료의 속성을 파악하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전장관은 퇴임한 뒤 이 문제를 다각도로 고민했다. 유능한 인재가 정부에 들어가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솟구쳤다고 한다. 학자 출신 관료의 성공조건이라고 할까. 김장관은 공직에 뜻을 둔 학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김장관은 먼저 “정책수요자를 우군으로 확보해야 개혁작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을 움직여야 농업이 산다’고 주장해온 김장관은 부임 첫날, 관료들과의 상견례에 앞서 전국의 농민 소비자 시민단체 대표 30여 명을 초청하여 농·소·정 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김전장관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에 농정개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김전장관은 청와대와의 관계도 개혁의 성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김전장관은 “나의 경우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여섯 번이나 비판적인 보고가 올라갔다고 들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고비에서 대통령이 믿어주고, 언론과 국민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전장관은 청와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될수록 자주 보고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정원장, 감사원장, 수석비서관 등에게는 공식회의 또는 보고를 통해 미리 알려야 한다.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불려가서 해명하는 것은 이미 찍혔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언제 누가 묻더라도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료는 정부조직의 특성상 타 부처와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김장관은 “왕따 당하면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에 무조건 협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계장관회의에서 밀려버리면 일을 시작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흔히 경제부처에서는 재경부와 기획예산처 등이 파워그룹에 속한다. 김장관의 말은 결국 이들 부처와의 정책조율 과정에서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다.

    농림부의 경우 오랫동안 한직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힘 있는 부서와의 협의과정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풀어주는 것은 장관의 몫이다. 김전장관은 “우두머리가 무능하고 성격적 결함이 있거나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그 부처는 한없이 추락한다. 일반적으로 관료 출신 장관은 자기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마구 공격한다. 하지만 자기들이 불리하거나 이기더라도 상처를 입을 것 같으면 휴전을 제의한다. 약한 부서는 그 틈새를 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전장관은 한마디로 장관의 리더십이 부처의 경쟁력을 결정한다고 본다. ‘강장 밑에 약졸 없고, 약장 밑에 강졸 없다’는 말처럼 김전장관은 “장관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밀고 나가면 어떤 상황이든 돌파할 수 있다. 그런데 ‘너 죽고 나 살자’고 처신하면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학자나 비전문가 또는 정치인 출신 장관들은 이런 각오로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관료 출신에게 밀린 것이다. 장관이 밀리면 국·과장들은 꼼짝도 안하는 게 관료사회의 속성이다. 그래서 ‘정권은 유한해도 관료는 무한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김전장관은 김대중 정부가 실정을 거듭하는 원인과 관료사회의 무사안일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꼬집었다.

    “관료는 국리민복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관료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거창한 국가적 대사라도 침묵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은 국리민복에 기여한 사람들을 포상하고 그들에게 성공의 지름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또한 ‘싸움닭’이나 ‘돈키호테’를 자처하는 관료도 없다. 그저 자리에 연연하고 개각 때마다 감언이설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김전장관은 타 부처 장관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면 엉뚱한 곳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학자 출신들이 원칙만을 강조하다가 ‘적’을 많이 만들고 그 때문에 억울하게 당한다는 얘기다.

    김전장관은 김대중 정부에서 장수하고 있는 J장관과의 좋은 관계를 예로 들면서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꺾고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학자 출신이 친화력을 갖추면 미움을 사지 않고 보복당할 우려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또 관료사회에서 남을 험담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나 제3자를 만나서 현안과 관련된 인사의 문제점을 얘기하거나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금물이다. 바로 그 순간 상대는 칼을 빼들고 달려든다. 모든 내막을 알고 있어도 특정인을 거명하거나 언행을 인용해서는 안된다. 나는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고도 타 부처 장관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때 참지 못하고 털어놓았다면 곧바로 나에게 화살이 날아왔을 것이다.”

    김전장관은 국회의원과의 협력도 강조했다. 모든 개혁의 필요충분조건은 법률의 제개정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김전장관은 “국회의원에게 중요한 것은 첫째 표, 둘째 돈, 셋째 명예다. 따라서 국민들이 지지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국회의원을 설득하는 데 가장 용이하다. 최소한 어떤 정책을 지지하더라도 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의원도 우군이다


    김전장관은 재임중 37개에 달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엄청난 공을 들였다. 관계 상임위 소속 여야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법안에 대해 설명한 것은 물론이고, 취임 초기에는 후원회에도 열심히 찾아다니며 성의를 표했다. 1999년 말 ‘공직자윤리규정’이 제정돼 기부행위가 금지된 뒤에는 부인의 이름으로 후원금을 냈다. 물론 판공비가 아닌 자비였다. 이 과정에 재임시절 받은 원고료와 강연료를 모두 털어넣었고 개인 돈도 적지 않게 들어갔다. 실제로 김전장관은 장관임기를 마친 뒤 4700여만원이 줄어든 재산을 신고했다. 이것은 농민들에게 준 격려금과 대신 갚아준 밥값, 행사비용까지 포함된 액수였다.

    “장관이 그렇게 뛰어다녀야만 우군이 생기는 게 현실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사라도 해야죠. 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동장관실’을 운영했는데, 가는 곳마다 그 지역 국회의원을 추켜세웠어요. 그건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는 데 엄청난 힘이 됐습니다.”

    김장관과 언론의 관계는 멀고도 가까웠다.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김장관은 언론과 싸움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언론은 김장관이 추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 그는 재임중 단 한번도 출입기자들에게 촌지를 준 일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데도 김장관이 퇴임하면서 기자단으로부터 받은 기념패에는 애정이 듬뿍 담긴 문구가 들어있다.

    ‘이제 농정개혁의 책무를 완수하고 물러남의 때를 찾아 명예롭게 퇴진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자 그동안 ‘감시자’의 입장에서 지켜보았던 우리 출입기자단의 석별의 정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김장관의 재임중 판공비 사용내역을 보면 폭락한 농산물을 사들이는 데 가장 많은 돈을 썼다. 이렇게 구입한 농산물을 각계 인사들과 출입 기자단의 가족에게 보내고 ‘우리 농산물을 애용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것이다. 기자에 대한 촌지와 향응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현실에서 기자사회를 바라보는 김전장관의 시각이 이채롭다.

    “모든 기자들이 돈이나 술, 그리고 골프로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기본적으로 기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하게 대하면 진실한 응답이 온다. 솔직하게 시인하되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좋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정말 말할 수 없는 상황이면, 아예 말 못하겠노라고 양해를 구하는 게 정도다.”

    김장관의 언론관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협동조합 통합 과정에서 A일보는 김장관을 도덕적으로 매장할 수도 있는 기사를 내보냈다. 물론 실명을 밝히지 않고 K장관이라고 처리했지만, 누가 봐도 농림부장관임을 알 수 있는 보도였다. A일보는 ‘K장관이 농림부 산하단체 고위 관계자로부터 취임 축하비 5000만원, 매달 활동비로 3000만원씩 받았으며, 아들이 결혼할 때도 5000만원의 축의금을 수령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이것은 통합을 반대하던 모 단체에서 김장관을 비난하면서 뿌린 유인물에 들어있던 음해성 루머였다.

    하지만 김장관은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A일보의 모 기자는 김장관에게 자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라고 권한 일까지 있었다. 그 기자는 뒷날 김장관이 겪은 또 다른 오보파동을 소재로 논문을 써 석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B일보는 구제역 파동 때 ‘구제역 고기를 먹으면 인체에 해롭다’는 기사를 썼다. 김장관은 이 문제에 적극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옛날 교과서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현재는 그 이론이 바뀌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도 B일보는 “장관이 ‘구제역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보고를 받고도 무시했다”고 공격했다. 김장관은 이때도 사실무근이라고 맞섰다.

    김장관이 밝힌 B일보의 오보파동을 들어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구제역은 영어로 ‘Foot and Mouth’인데, B일보는 ‘Hand Foot and Mouth(수족구병)’를 구제역으로 오해하고 기사를 썼던 것이다. 언론의 특종경쟁이 빚은 해프닝인 셈이다.

    김대중 정부의 임기는 앞으로 1년이다. 남아있는 기간 동안 두 번의 선거와 월드컵 등 국가적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시기에 김전장관은 1년간 한국을 떠난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의 초빙교수로 부임하는 것이다. 그의 오랜 관심사인 남북한과 캐나다의 농업협력과 동북아 경제권을 연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이 기간 동안 북한방문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지방선거 출마를 비롯해 모처에서 제안한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많은 지식인들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일찌감치 줄서기에 들어간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포기의 철학을 터득해야 한다’는 김전장관. 그가 레임덕에 걸린 대통령을 보좌하는 관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바로 ‘포기의 철학’이다.

    ‘벼슬 그만두기를 벼슬 얻을 때처럼 스스럼없이 생각하고, 언제 그만두더라도 당황함이 없어야 한다. 기왕 갈릴 자리인데 길고 짧음을 슬퍼한다면 그 아니 부끄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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