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증권인생 24년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4-11-08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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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일고 합격통지 받던 날 돌아가신 아버지
    • 21살부터 주식투자, 26세 때 사설 투자자문사 설립
    • ‘당대의 큰손’ 백할머니와의 만남
    • 2~3년 전부터 공무원들에 “벤처 투자 말라” 조언
    • “게이트는 금감원·검찰 조사 받은 기업에서 터진다”
    • “현상 너머 본질을 보라, 책 속에 답이 있다”
    • 미국 체류 진짜 목적은 투자 자문 해외 네트워크 구축
    • 올해 중 해외 펀드 출범…강력한 투자은행 설립이 목표
    • “정치권과 멀다고 불이익 받으면 한국은 희망 없는 나라”
    • “중국 활황 이면을 봐야, 고성장 유지 못하면 위험”
    • “복지재단에 75억원 기증 후 이틀 잠 못 자”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초유의 국가위기 상황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주식시장을 포함한 금융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 각종 ‘게이트’나 주가조작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이전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는 김정태 국민은행장과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44) 정도일 것이다.

    김행장이 현재 한국 금융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영인이라면, 박회장은 미래 자본시장에 어떤 식으로든 큰 변화를 몰고 올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1997년, 11년간의 증권사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자의 길로 들어선 박회장은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두세 걸음 앞선 미래 분석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놀라운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코스닥 열풍이 몰아치기 2년여 전, 일찌감치 벤처기업에 눈을 돌려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1998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를 도입해 주식시장에 간접투자 돌풍을 일으켰다. 1999년 12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면서는 업계의 비난과 우려를 뚫고 파격적인 위탁수수료 인하를 단행, 단숨에 약정 순위 6~7위 증권사로 도약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2000년 3월, 박회장은 또 한번의 ‘파격’을 시도한다. 개인 성과급 75억원을 쾌척, ‘박현주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박회장은 재단이사장은 물론 이사진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음으로써 재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박현주가 떴다”




    그런 박회장이 2001년 2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오르자 증권업계는 또 한번 술렁거렸다. 같은 해 11월, 본업에 복귀하면서는 “박현주가 떴으니 증시도 뜰 것”이라는 소문이 시장을 휩쓸었다. 이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업계를 넘어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박회장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유보적이다.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척자’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나,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해온 까닭에 그 미래상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너무 앞서간다”거나 “돈만 아는 투기꾼”이라는 비난도 있다. “뒤에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추측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1970년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그랬듯 2000년대 샐러리맨의 우상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하우를 배우고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최고의 투자전문가라는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박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해 왔다.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시도했지만 쉬 성사되지 않았다. 박회장 측은 그 이유로 “미래에셋은 아직 갈 길이 먼 회사다. 순이익이 1000억원을 넘어서고 해외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다음 제대로 하고 싶다. 신생사인 미래에셋에 대한 업계 일각의 불편한 시각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미래에셋은 수많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발전해 온 회사다. 창업자만 부각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도 밝혔다.

    정치권과 관련한 몇몇 악성 루머 때문에 예민해진 측면도 없지 않았다. 미래에셋의 한 임원은 “누군가에게 당신 도둑질 한 것 아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인격 모독 아닌가. 우리는 그런 모욕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인터뷰 성사가 불투명한 까닭에 먼저 증권업계와 박회장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접 취재에 들어갔다. 그 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회장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친소(親疎) 관계를 떠나 박회장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가 시장경제 원칙에 반하는 일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런저런 소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조차 “당신에게 여유 자금이 있다면 박현주에게 맡기겠느냐”는 질문에는 대체로 “그렇다”고 답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지난 2월10일, 마침내 인터뷰가 성사됐다. 박회장이 미국출장 중이었던 까닭에 국제전화를 이용했다. 완강한 태도로 인터뷰를 고사해온 박회장이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후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인터뷰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3일 후 같은 시각, 다시 1시간 동안 계속됐다.

    박회장은 오랜 통화에서 개인사는 물론 기업관, 정치관, 증시전망, 한국 자본시장의 미래 등에 대해 거침없는 답변을 토해냈다. 미래에셋의 비전도 제시했는데, 올해 안에 해외 펀드를 출범시킬 예정이며 투자은행 설립을 계획중인 점, 해외 투자자문 네트워크 결성, 지분의 30% 한도 내에서 해외 투자를 받기 위해 협상 중이라는 소식 등은 금융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었다. 박회장은 “나에게는 꿈이 있다. 우리 자본시장의 큰 흐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만약 내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회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한국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회장의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이다. 1988년 광주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동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사꾼이었다. 혼례식 날, 이웃사람의 양복과 구두를 빌려야 했을 만큼 가난했던 아버지는 박회장이 태어날 즈음에는 제법 큰 농사를 짓는 중농이 되어 있었다.

    -고향이 평동이군요. 그런데 왜 주변사람들은 송정리(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로 알고 있을까요.

    “학교를 거기서 다녔기 때문일 겁니다. 부모님은 저를 평동국민학교가 아닌 송정리 학교로 보내셨어요. 조금이나마 규모가 큰 학교에 보내고 싶으셨던 거죠. 송정리에는 광주공항이 있어 같은 시골이라도 좀 더 개화된 분위기였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리 길이었는데 늘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어요. 눈 쌓인 겨울엔 고역이었죠. 그 때 집안 형편이 운동화 한 켤레 못 사 줄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동네 다른 아이들 못 신는 걸 내 아들만 신게 할 순 없다 해서 안 사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송정리 중학교에 진학했다 광주로 전학을 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공부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늘 책읽기를 권하셨지요. 덕분에 독서 습관이 생겼고 글짓기에도 취미를 붙였습니다.”

    박회장의 학창시절을 아는 고향 친구들은 그를 ‘수재’로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음은 물론 작문 실력이 뛰어나 큰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박회장 형제들은 대체로 학업성적이 우수했다. 박회장보다 12년 연상인 맏형 태성 씨는 저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다. 전문의 시험에 수석 합격한 후 미국으로 유학 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워싱턴대 의대 신경외과 종신교수다. 여동생 정선 씨는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로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명지전문대 유아교육과 교수다. 남편은 오규택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오교수는 박회장의 광주제일고(이하 광주일고)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여러 형제 중에서도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박회장은, 그러나 광주일고 진학과 더불어 공부와 담을 쌓고 만다. 호남 인재의 집결지라는 광주일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예기치 못한 불행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광주일고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이었어요. 건강한 분이셨는데 갑작스레 돌아가셨지요. 굉장히 놀랐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버님은 정직하고 성실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리 허망하게 가시다니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고 삶의 근본은 무엇인지, 선악은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회의하게 됐습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죠. 삶 자체가 의심스러운데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대학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한마디로 아주 ‘진한’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제 뇌리에는 고등학교 시절이 깊이 각인돼 있어요.”

    -성적은 어땠습니까.

    “그 때 우리 학년 학생 수가 760명 정도였습니다. 그 중 60명은 운동선수였으니 입시 준비생은 700명쯤이었다고 봐야겠지요. 그 중 698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거의 꼴등이었죠.

    고 3 끝 무렵이 돼서야 공부 안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절 불러 놓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공부 안 해도 좋다, 바르게만 살아라, 대학 가기 힘들면 고향에서 농사짓자.”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면서 우시는 겁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제가 딴 생각에 빠져 사는 걸 알면서도 끝내 공부하란 말씀 한번 안 하셨던 분입니다. 그렇게 강인하고 말을 아끼시는 분이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그만 가슴이 무너졌지요.”

    -박회장을 두고 어떤 이는 돈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있다고 합니다. 투자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로 ‘너무 잘 맞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비결이 뭡니까.

    “제게는 3가지 큰 투자 원칙이 있습니다. 소수의 입장에서 따져볼 것, 균형감각을 갖고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볼 것, 항상 기본에 충실할 것. 모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소수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다수를 따라가면 편하지만 큰 수익은 기대할 수는 없죠.”

    -그렇더라도 어떤 원천적 재능 내지는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요.

    “제게 어떤 ‘예측력’이 있다면 그 상당부분은 독서에 힘입은 것입니다. 잘 보면 시기마다 시장을 끌고 가는 트랜드가 있어요. 그걸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포착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죠. 시류를 읽는 눈은 독서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잡다한 정보를 많이 접한다 해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당대의 석학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경영·경제·미래예측서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어떻게 벤처 활황과 IT중심의 경제재편 등을 예견할 수 있었냐고 묻지만 그건 모두 경영서 속에 나와 있는 아이디어였어요.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로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죠.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과 찰스 슈왑의 발전사를 다룬 ‘클릭 앤 모르타르’입니다. 토플러의 책에서 ‘정보화’라는 말을 처음 접했고, ‘클릭 앤 모르타르’에서는 인터넷 시대에 맞는 올바른 기업문화와 비전, 리더십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래 분석의 핵심은 밸런스입니다. 이건 좀 철학적인 문제인데, 균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단 결과는 180도 달라집니다. 제가 말하는 균형감각은 실상을 보는 눈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진실은 아닙니다. 진실은 늘 현상 저 너머에 있어요. 그걸 감지할 수 있는 직관력이야말로 1급 투자가가 갖춰야 할 최고의 자질입니다.

    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자유로에 갑니다. 늘 같은 들과 강물인데 내 마음 상태에 따라 그렇게 달라 보일 수 없어요. 거침없이 뻗은 길을 달리며 현상 깊숙히 숨은 사건의 본질을 포착하고자 정신을 집중하죠. 꼭 투자 건이 아니라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그런 식의 자기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실패한 경험은 없습니까.

    “돌이킬 수 없이 큰 실수는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동원증권에 다닐 때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괴로운 적은 몇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처음 지점장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을지로 네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주가지수는 600에서 다시 450선까지 떨어지고 점포는 항의하는 고객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도망치고 싶었고 포기하고 싶어요. 정말 용기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두 번째는 1994년 말 압구정 지점장 시절이었어요. 삼성전자 주식이 10만원일 때 고객들을 설득해 약 50만주(500억원)를 샀습니다. 당시는 99% 다 삼성전자 주식은 사지 않는다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전 1995년에는 반도체 경기가 호황을 맞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정을 하기 위해 하청업체 방문은 물론 공장 여공까지 만나봤어요. 그런데 주가가 자꾸 떨어지는 겁니다. 분명 공장은 3교대 근무를 할만큼 바쁘게 돌아간다는데…. 피를 말리는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식을 주가폭락 직전인 1995년 말 15만원대에 모두 처분했지요. 덕분에 주가지수가 13%가량 하락한 와중에도 저의 고객들은 20~30%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어요. 한참 힘든 때였는데 어머니가 불쑥 전화하셔서 그러시더군요. ‘내 너한테 부탁 하나 하마. 출세하려고 하지 마라.’ 그 말씀이 제게 많은 용기와 깨달음을 줬습니다.

    세 번째 어려움이라면, 이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건데요, 자꾸 구설수에 오르는 겁니다. 실적이 너무 좋으니 밑도 끝도 없는 루머가 자꾸 나돌았어요. 30대 초·중반에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불쾌했습니다. 그 때문에 감사도 많이 받았어요. ‘드러난 사람’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라고나 할까요.”

    -지금도 증시 주변에는 박회장과 관련한 루머가 없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0년 이상 이런 저런 ‘설’에 시달리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견제’와 ‘감시’가 제게 오히려 약이 됐다는 거예요. 제도권 금융의 위험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명예를 지키는 길은 정도를 걷는 것밖에 없다고 뼈 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단련된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라고 되도록 느긋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 그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면 직원들이 절 믿고 그렇게 열심히 일할 리 만무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 때문에 가치관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누구나 ‘부당함’을 느끼면 나서서 항의하고 제압하고픈 욕구가 생깁니다. 자중지란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런 마음을 잘 다스리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융산업은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비행은 이륙 5분과 착륙 5분이 가장 위험하다지요. 그런데 사람들을 이륙할 때의 위험만 생각할 뿐 내릴 때를 대비하지 않아요. 그저 무사히 이륙해 창공을 유유히 헤쳐가는 재미에 탐닉하죠. 중요한 것은 내려오는 기술입니다. 2000년, 미래에셋은 한번 ‘내려가기’를 경험했습니다. 적자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객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지요. 미래에셋에 대한 신뢰가 워낙 높기 때문에 다른 회사보다 더 잘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건 회사건 좋을 때 어려운 시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비행기는 언젠가 내려가니까요.”

    -정치권 관련설에 대한 박회장의 정확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사장은 정치권과 손잡고 할 일이 없습니다. 설사 정치자금을 제공한들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뭡니까. 자본시장 종사자들, 특히 제도권에서 착실히 성장해 온 사람들을 무조건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경제가 발전하려면 자본 시장을 따뜻한 눈으로 봐줘야 해요. 법을 강화해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은 강력하게 제재하되 싸잡아 비난하지는 말아야지요.

    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을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단 저는 정서적인 데 원인이 있다고 봐요. 미래에셋의 빠른 성장에 대한 거부감이죠. 우리가 ‘최초‘와 ‘1등’을 번갈아 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을 얘기들입니다.

    물론 ‘정치권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할 것 아니냐’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대학 시절 이후 정치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고, 오히려 큰 비즈니스맨이 되기 위해서는 그 쪽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정치권 사람이면 동창도 만나지 않아요. 만일 제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또 입맛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한국 사회에 희망은 없습니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입니다.”

    실제로 박회장은 만날 사람을 상당히 까다롭게 고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정치권 인사면 동기동창도 안 만난다. 동창 모임에도 잘 안 나온다. 그래서 지독하다, 건방지다는 비난을 많이 듣는다”고 전했다.

    박회장도 사석에서 “사람을 가리다 보니 인간적으로 괴롭고 고독하다.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도 기본적인 인맥은 필요한데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한국적 상황이 아쉽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미래에셋에는 청탁을 통해 입사한 직원이 한 명도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까. 처남, 사촌동생의 입사도 거부했다는데요.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인사청탁에 흔들리면 조직은 와해됩니다. 일가친척은 물론 정치권의 청탁도 다 거절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구설이라면 지난해 미국 체류를 결정했을 때 절정에 달했는데요. 정치권과 얽히고 설킨 사정 때문에 도피하는 것 아니냐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습니다. 미국은 정말 왜 간 겁니까.

    “일단 밝힐 일은, 전 ‘2년 예정으로 미국에 유학 간다’는 식의 얘기를 명시적으로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시장이 소강기에 접어든 데다 영어 공부와 해외 네트워크의 필요성이 너무 절박해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어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한 달 중 1주일은 국내에 들어와 경영 상황을 체크하는 등 기본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영어 공부예요. 현지인 교사와 아침 8시부터 밤 10시, 11시까지 함께 생활하며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덕분에 실력이 좀 늘었지요.

    공부 시간외에는 주로 경제·경영학 교수들과 금융 전문가, 기업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냥 계획 없이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미래에셋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죠. 예를 들어 미래에셋이 미국의 경제정책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버드나 스탠퍼드대 교수들을 자문위원으로 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당장은 1~2억원씩 들어가는 돈이 아까울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도움을 받게 될 겁니다. 미래에셋이 커가려면 그런 국제적 네트워크가 꼭 필요합니다.

    제가 1년 가까운 기간을 미국에서 살다시피 한 데는 그런 절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어 공부도 그래서 필요했던 거고요. 네트워크를 완성하려면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이 사실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얘기는 미래에셋의 비전과도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박회장이 그리는 미래에셋의 미래상은 무엇입니까.

    “이제 미래에셋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혔습니다. 제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회사가 돼가고 있어요. 한 사람이 전권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패한 벤처기업이나 일부 재벌의 몰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죠.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미래에셋의 미래는 세계 시장에 있습니다. 국내 경쟁도 중요하지만 해외 개척 없이는 진정한 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 자본시장은 펀드 중심으로 갈 것입니다. 자본 시장의 핵심은 증시입니다. 은행도, 간접금융도 시장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템플턴·JP모건·알리안츠 같은 해외 일류 기업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지금, 한국 펀드 시장을 누구 손에 맡길 것인가. 외국사가 펀드 시장을 장악하게 되면 우리 경제주권은 상당 부분 그들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펀드는 그 자체로 의결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되기까지 한 5년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시기가 훨씬 앞당겨지고 있어요. 외국 금융사에 폐쇄적일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합니다.

    어줍잖게 세계화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국경 없는 정글 게임에서 살아남고 국민이 기업에 부여한 사회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 미래에셋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회사가 되어야 합니다. 해외 네트워크 구축에 이렇듯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다 그를 위해서입니다. 미래에셋은 올해 안에 해외 펀드를 출범할 예정입니다. 세계 시장 개척의 첫 걸음은 이미 내디뎌졌습니다.

    내적으로 미래에셋은 자금 운용에 무게중심을 두는 금융전문그룹으로 커나갈 것입니다. 미래에셋증권은 수수료에 의존하지 않는 전문 투자은행으로 키워갈 생각입니다. 상장 시기는 2~3년 후쯤으로 잡고 있고요.

    회사 규모를 키우려면 제 지분을 많이 양보해야 할 겁니다. 저는 장기적으로 볼 때 지분율이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미국 유수의 투자은행 중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주인노릇을 하는 회사는 없습니다. 미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보고 배웠죠.”

    -한국 경제가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듯 합니다.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

    “9.11 테러사건 후 공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는데 전 그런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오히려 그 일을 기회로 그린스펀이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하함으로써 미국 경기가 바닥을 치게 됐죠. 다른 국가들도 덩달아 부양정책을 쓴 덕분에 분위기는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올 하반기 쯤이면 우리나라에서도 그 효과가 나타나리라 봅니다. 영업 이익도 전체적으로 증가할 것이고 부채비율과 금리는 더 떨어질 겁니다. 변수라면 투신사와 하이닉스를 들 수 있겠죠.

    문제는 우리 경제에 장기적 성장 엔진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IT산업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 같은데 여의치 않아요. IT가 허덕이는 동안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들이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 경제에 가장 큰 장점이라면 이렇게 첨단산업과 전통산업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빠른 시일 내에 근본적인 성장엔진을 찾아야 합니다. 정답은 아무래도 수출이겠죠. 벤처 지원도 수출 가능성이 큰 회사에 집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조정도 계속해야 하고 중국 시장 동향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전체적인 면에서 저는 우리 경제를 낙관적으로 봅니다. 정치가 경제를 흔드는 일만 없다면 지속적인 성장을 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박회장의 꿈은 무엇입니까.

    “한국 자본시장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습니다. 박현주 재단을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그 일을 처리하고는 꼬박 이틀간 잠을 못 이뤘죠. 하지만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이 아니라 일상적 기업활동이 돼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재단은 저 개인이나 미래에셋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습니다. 이사장은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가 맡으셨고 이필상 고려대 교수, 김승유 하나은행장, 백창현 삼일회계법인 부대표 등으로 이사진을 구성했습니다.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감사를 맡고 있고요. 이로써 박현주재단은 기업 주도 사회복지재단이 탈세의 도구라거나 생색내기용일 뿐이라는 일부의 비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박현주재단은 매우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박회장이나 미래에셋으로부터의 간섭은 전혀 없다. 조만간 30억원을 더 기증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박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지금 내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브로커 내지는 펀드매니저의 삶에서 경영자의 삶으로 성공적인 전이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을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CEO는 기업 문화와 비전을 수립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은 훌륭한 CEO의 자질로 다음 6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카리스마·의사전달능력·정직성·비전·전문지식·열정. 박회장은 이 중 어떤 자질을 갖고 있는 CEO일까. 긴 대화를 나눴지만, 박회장의 말대로 진실은 현상 저 너머에 있다. 박현주 회장이 고객과 국민 앞에 한 약속을 잘 지켜 한국을 대표하는 CEO로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

    -고교 동창들은 박회장이 괴짜였다고 하더군요. 학교 생활은 어땠습니까.

    “책을 좀 읽었지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봤는데, 읽다 보니 제가 전략을 다룬 책에 유난히 끌린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케네디 자서전, 키신저 자서전 같은 것들은 대여섯 번씩 거푸 읽었습니다. 꼭 서울대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1학년 때 학교에서 희망대학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를 적어 낸 사람은 세 명뿐이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죠. ‘왜 서울대만 가야 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좀 조숙했다고 할까요. 예비고사도 안 봤습니다. 광주일고 학생은 전원 합격하던 시절이었지만 전 ‘대학 갈 생각도 없으면서 그걸 왜 보나’ 싶어 아예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죽음은 제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요즘도 제가 가끔 “부질없는 일이다…” 하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있어요. 과한 욕심이 생기거나 우쭐해지려 할 때지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100% 나쁜 일은 드물어요. 저만 해도 힘들었던 사춘기 덕분에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졌고 모자간의 사랑도 깊어졌으니까요.

    어머니는 부모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부지런하고 인정 많고 아주 정확하시죠. 우리 집 기상시간은 오전 5시였어요. 그때 일어나 찬물로 목욕부터 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 내일 누구한테 빌려준 돈 받을 일이 있다, 그러면 실제로 그 돈이 손에 들어올 때까지는 절대 말씀을 안 하세요. 미리 들뜨는 일도, 기대를 내비치는 일도 없으시죠.”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의사가 되겠다며 이과를 지망했던 박회장은 재수 중 문과로 방향을 바꾼다. 고교 시절 독서의 결과로 ‘조직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 때문이었다.

    (주)인슈코리아 김재영 사장은 박회장과 고교 동기로 서울 종로학원에서 재수 생활을 함께 했다. 그는 재수 시절의 박회장에 대해 “행동이 거침없고 집중력이 뛰어났다. 시골 출신답지 않게 여학생들에게도 말을 잘 붙여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78년 박회장은 고려대에 입학했다. 김사장 또한 고려대에 진학해 두 사람은 4학년때부터 3년 남짓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회장은 대학원 진학과 더불어 공인회계사 자격 시험을 준비했다. 박회장은 “회계사가 목적이 아니라 회계사무소(그러니까 조직)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현주는 상당한 독서가였어요. 공부도 열심히 했고요. 1980년 ‘서울의 봄’ 때 고교 선배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현주가 찬조연설을 했는데 그게 상당히 화제가 됐어요. 후보연설보다 훌륭했거든요. 또 어쩌다 포커 같은 걸 치면 승률이 굉장히 높아요. 두뇌 게임이나 심리 게임에 능하달까요.”

    김재영 사장의 증언이다.

    다시 박회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대학 생활은 어땠습니까.

    “그때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지요. 경영·경제학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못한 걸 그때 다 한 셈이예요. 책도 좀 읽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제3의 물결’이었습니다. 19번을 읽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 찬조연설을 했다고요.

    “아, 그거요. 학교 선배가 출마한다기에…. 사실은 저도 그런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전 ‘그릇이 작아’ 안되겠더라고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편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전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갈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절대 정치는 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총학생회장 출마자는 언젠가 정치를 할 사람이라고 판단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정치적 욕구가 없다면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죠.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전 정확하게 그리 되리라 예상했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성공했느냐 못했느냐,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정치 쪽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상당수 아닙니까.”

    -대학 때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했지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강의를 듣는데 주식 얘기가 자꾸 나와요. 현실 경제에서 주식이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었죠. 그때부터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1년 학비·생활비를 한 몫에 부쳐주셨어요.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었죠. 그걸 가지고 직접 투자에 나섰어요. 몇 년 관심을 갖다 보니 전체 그림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후 박회장의 개인사는 우리 증권업계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박회장 자신이 그 주인공이거나 변화의 주역이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회장은 대학원생이던 1984년, 사설 투자자문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동안 증권 투자를 통해 번 돈으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 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여직원도 한 명 두었다. 26세 때의 일이다.

    -그 때 투자자문회사 설립이 가능했습니까.

    “당시는 관련법조차 없던 때였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제가 차린 회사가 국내 최초의 투자자문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생각은 단순하지만 확고했습니다. 1985~1986년이 되면 한국 주식시장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런데 지금 증권사들은 문제가 많다, 내가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제 머리 속에는 뮤추얼 펀드를 운영해보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주식거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명동 일대 증권사들을 수시로 훑고 다녔습니다. 직원들끼리 화투 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엉성했어요. 거래도 과학적 분석보다는 소문에 의존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장을 움직이는 건 주가조작이라는 말이 돌만큼 분위기도 혼탁했죠.

    저는 시장분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84년 무렵 이른바 ‘3저’ 기조가 포착되기 시작했고, 자본자유화가 코앞에 닥친 데다, 삼성전자가 CB를 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증시 활황이 시작되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당시 국내 경제상황은 폭발적 주가 상승이 있었던 1960년대 일본과 매우 흡사했어요. 그런 근거들을 가지고 ‘한국 증권시장에 대한 전망’이라는 보고서 하나를 작성했는데 그게 돌고 돌아 어느 날 다시 제 손에 들어온 겁니다. 근데 보고서 작성 주체가 내외증권연구소가 아닌 일본 노무라증권으로 돼 있어요. 허탈해서 웃어버렸죠.”

    김재영 사장은 증권연구소 시절의 박회장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연구소를 차릴 무렵 현주는 이미 증권가에서 제법 유명세를 얻고 있었어요. 젊디 젊은 청년이 놀라운 수익을 올리는 데다 시장 예측도 잘 맞아 떨어졌으니까요. 전광판이 온통 파란색(폭락장세)인 날이 있었는데 현주는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 ‘사자’ 주문을 냈고, 결국 며칠 사이에 큰 이문을 남겼습니다. 평소 현주가 자주 하는 말이 ‘돈을 벌려면 소수 편에 서라’는 것인데 20대 중반에 이미 그 원리를 체득한 거죠.”

    대학원생 시절 박회장은 명동 사채 시장의 대모 ‘백할머니(본명 백희엽, 1995년 5월 사망)’를 찾아갔다. 1960년대 말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한 백할머니는 주가 조작이 만연한 당시에도 우량주 중심의 장기 투자로 큰 수익을 올려 ‘투자 철학을 지닌 큰 손’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불쑥 찾아가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뒤를 따라다니게 됐죠. 할머니 사무실로 출근하고 증권사나 기업체 방문 때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가만 보니 이 양반이 정석 투자만 하는 거예요.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하더군요.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기업, 내용이 좋은 기업 주식만 사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렸다 시장이 흥분하면 비로소 팔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량주는 반드시 제 몫을 한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1986년, 박회장은 내외증권연구소의 문을 닫았다. 투자자문사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는 점과 아직 개인사업자가 독자적 브랜드로 자본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증권사 입사를 결심한다.

    “명동에서 이름이 좀 났던지 대리나 과장으로 특채하겠다는 증권사가 몇 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 가고 싶은 데가 따로 있었어요. 무엇보다 좋은 상사 밑에서 일하고 싶었죠. 그래서 점찍은 이가 동양증권 이승배 영업상무(현 한셋투자자문 사장)였습니다. 당시 이상무는 증권업계 최고 스타였어요. 32세에 수습사원으로 입사, 8년만에 이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죠. 또 ‘이승배 사단’을 거느리고 있을 만큼 조직 관리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어린 제게는 태산처럼 큰 존재로 보였죠.

    동양증권 입사를 결심하고 무조건 이상무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양복도 아니고 면바지에 셔츠 하나 걸치고 갔더니 비서가 상대도 해주지 않더군요. 첫날은 얼굴도 보지 못했고 둘째날에야 겨우 이상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얘기는 이승배 사장에게 직접 들어보자.

    “어느날 아침 출근했는데 누가 날 찾아왔다고 해요. 보니 웬 쬐끄만 녀석이 들어와 대뜸 ‘날 써라’ 그러는 거예요.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다른 증권사에서 과장 준다 대리 준다 하는데 이승배 밑에서 배우고 싶어 찾아왔다는 겁니다. 관심 없으니 가라고 그냥 내쫓아 버렸지요. 그랬더니 다음날 똑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왔어요. 이번에도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근데 셋째날 또 와요. 역시 쫓아냈더니 다음날 또 왔더군요.

    그 때는 앞에 앉혀 놓고 얘기를 좀 했습니다. ‘왜 꼭 나냐’ 그랬더니, 자기가 좀 알아봤는데 제 영업스타일이나 브로커로서의 자세가 마음에 든다나요. 그래서 제가 나무랐어요. ‘자네가 알긴 뭘 아나. 나는 특채 제안 다 물리치고 수습부터 시작한 사람이야. 대리나 과장 욕심을 내다니 증권맨으로서 기본이 안돼 있구먼.’ 그러고 내보내면서 이젠 끝이거니 했어요. 그런데, 아, 다음날 또 찾아온 겁니다.

    ‘좋습니다. 사원으로 뽑아주십시오. 대신 상무님 정면에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 땐 저도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프로 자질이 있어 보여 욕심이 나기도 했죠. 당시만 해도 증권사 영업직은 관리직이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영업 상무 일을 해 보니 영업직에는 프로가 꼭 필요하겠더라고요.”

    1986년, 박회장은 동양증권 영업부 신입사원이 된다. 이사장은 약속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맞은편 벽 앞에 박회장의 책상을 놓아주었다. 그로부터 45일 후, 박회장은 대리가 됐다. 이사장은 초고속 승진을 시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3개월 딱 시켜보니 다르더군요. 그 때는 감이나 루머에 따라 매매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는 분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어요. 이 아이는 분명 스타가 될 거다, 확신이 왔습니다. 저런 친구는 빨리빨리 업계 리더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발령을 냈죠.”

    1988년, 이사장이 창업을 위해 동양증권을 그만두자 ‘사수’를 잃은 박회장은 동원증권(구 한신증권) 김정태 인사담당 전무(현 국민은행장)를 찾아갔다. 김전무는 박회장의 형 태성 씨의 광주일고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역시 불쑥 찾아간 겁니까. 형과의 인연을 내세웠나요.

    “아니죠. 제가 먼저 찾아간 건 맞습니다만 철저히 제 브랜드로 밀고 나갔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던 시절 동양증권 영업부가 최초로 전국 약정 1위를 차지했는데 그 중 4분의 1을 제가 했어요. 그 때 영업부 직원 수가 70명이었습니다. 자연히 유명세를 타게 됐죠.”

    박회장은 김전무와의 면담에서 당당히 과장 자리를 요구했다. 증권사의 보수적 분위기를 우려한 김전무는 박회장을 동원투신(구 한신투자자문) 창립 멤버로 발령 냈다. 투자자문업은 박회장도 관심이 많은 분야였다. 그러나 아직 시장이 무르익지 않아 자문 의뢰가 거의 없었고 조직도 유연하지 못했다. 마침 박회장의 실력을 높이 산 동원증권의 한 임원이 그를 증권사로 불러들였다. 박회장은 동원증권의 자산을 관리하는 주식운용 과장이 됐다.

    당시 동원에는 ‘광주일고 3인방’으로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동기동창인 세 사람은 박현주, 장인환(현 KTB자산운용 사장), 송상종(현 피데스투자자문 사장)이었다. 이들 셋은 차례로 주식운용 과장 자리를 거치며 젊은 나이에 높은 투자 수익과 약정고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10여년 전만 해도 증권업계에는 유난히 호남 출신이 많았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처음 증권사 들어가니 표준어가 호남말이더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 증권사 신입사원의 월급은 12만원 선. 단자회사나 종금사가 85만원 정도였던 데 비하면 턱없이 낮은 액수였다. 자연히 지역 차별로 인해 대기업 입사가 쉽지 않았던 인재들이 증권사로 몰렸다. 특히 동원증권은 금융권에서도 대표적인 호남 기업이라 한때는 남도 사투리를 쓰는 직원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광주일고 3인방’의 동원 입성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1991년, 박회장은 33세의 나이에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이 됐다. 국내 증권사 최연소 지점장의 탄생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지점장이 돼 부담이 컸겠습니다.

    “당시는 지점장 되기를 기피하던 때였어요. 증시가 폭락세로 돌아서 전 재산을 잃은 투자자가 속출하던 시기였죠. 지점에 가 보니 실적 뛰어난 임원 한 분이 건강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약정고가 뚝 떨어져 있었어요. 전국 증권사 지점 중 300등 정도랄까. 이대로는 안되겠다, 조직을 혁신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했죠. 직원 수를 50명에서 25명 선으로 줄이되, 30세 전후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따로 짰습니다. 억지로 구조조정 한 건 아니었고 다른 지점으로 보냈어요. 당시는 영업직원 수가 많아야 실적 올리기가 쉬웠기 때문에 지점들이 대형화를 선호하던 때였습니다.”

    1993년, 박회장이 이끄는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연간 1조1400억원의 주식약정을 올려 마침내 전국 1위 지점이 된다.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동원증권은 IMF 이전에 직원 수를 1800명에서 800명으로 줄였습니다. 외환 위기가 오기 전에 구조조정을 끝낸 거죠. 또 인센티브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증권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영진의 결정에 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할 수 있겠죠.”

    1993년 말 박회장은 한 외국계 증권사로부터 연봉 10억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어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죠. 하지만 제 꿈은 존경받는 경영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돈 욕심에 외국 회사로 옮겨갔다가는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거절했죠.”

    동원증권 영업부 나상채 부장(45)은 중앙지점 시절 박회장 밑에서 일을 배웠다. 당시 박회장 밑에 있던 사람 중 상당수가 미래에셋 임직원이 돼 있어 객관적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외부 인사가 좋겠다는 생각에 그를 찾았다. 박회장은 어떤 상사였을까.

    나부장은 “뭔가 쇼킹하고 나쁜 얘기를 해줘야 될 것 같은데 그럴 만한 게 없다”며 입을 열었다.

    “박회장은 나보다 한 살이 적었지만 배울 점이 많은 상사였습니다. 적극적이었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치고 나가며 직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형이랄까요. 잠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일이 많았지만 1등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강제로 집에 못 가게 한 것이 아니고 연구 과제를 많이 줬기 때문에 그걸 다 마치려면 밤 10시, 11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예를 들어 ‘금융실명제’가 화제다, 그러면 그와 관련한 과제를 줘요. 보고서를 쓰게 하고 자료도 만들게 했죠. 그렇게 업무 외의 공부를 많이 시켰는데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됐습니다.

    추진력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권위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대다수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눌 줄 아는 사람, 인생을 맡겨도 좋을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회의 때도 보면 자기 의견을 먼저 말하기 보다 직원들 얘기부터 들어요. 또 회사에서 개인 실적에 따라 포상금을 주잖아요. 그럼 혼자 갖지 않고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덕분에 모든 직원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죠.

    함께 기관 영업을 나가 보면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편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립니다. 임원이 한 10명쯤 둘러앉아 있어도 떠는 법이 없어요. 설득력이 뛰어나 그의 말이라면 거부감 없이 믿게 되죠. 어…, 또 하나 기억나는 건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잘 말해줬다는 겁니다. 보통 지점장들이 그런 말은 잘 안 하죠. 근데 박회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는 편이었습니다.

    투자에 관해서라면 시류 분석과 기회 포착이 탁월했습니다. 그냥 운이 좋은 게 아니예요. 하다못해 골프 회원권 하나를 팔아도 최고의 수익을 올렸으니까요. 이재에 대해서는 박회장 만한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시장이 잘 안 풀릴 것 같다, 그럼 영업을 확 줄입니다. 직원 피해와 고객 피해를 막기 위해서죠. 사실 실적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지점인데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돈 들고 찾아온 고객을 “지금은 위험하니 나중에 투자하시라”며 등 떠밀어 내보내야 하니까요. 여하튼 그런 흐름을 기막히게 잘 탔습니다. 배짱도 있었고요.”

    나부장은 중앙지점의 지점훈(支店訓)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카네기 어록의 한 구절이다.

    1994년, 박회장은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이 된다. 이 곳에서 박회장은 증권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2년 연속 전국 증권사 지점 중 약정고 1위, 1인당·지점 당·일일/월별 생산성 전국 1위. 이에 힘입어 1995년에는 강남본부장 겸 이사로 승진했다. 역시 전국 최연소 기록이었다.

    ‘마이다스의 손’으로 절정의 명성을 구가하던 1997년 6월, 박회장은 돌연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미래에셋캐피탈(구 미래창업투자)을 창업하기 위해서였다. 교보생명, 한남투신 등에 흩어져 있던 이전 동료·부하직원들도 속속 합류했다.

    -IMF위기도 닥치기 전이었던 그 때 벤처기업의 ‘상품성’에 눈 돌린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창투사 설립을 추진했습니까.

    “벤처 투자를 생각한 건 시장과 언론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을 기점으로 주가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경제에 효율성이 떨어진 것 같았고 재벌은 가치창출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동 시장은 거칠어져만 갔고, 무엇보다 기업가들이 사업을 하지 않으려 했어요. 재벌 중심 경제 체제에도 장점이 많지만 이젠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봤습니다.

    그 때 신문·방송을 보면 실리콘밸리나 미국 벤처캐피탈리스트 얘기가 심심찮게 나왔어요. 해외 미디어나 최신 경영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관심이 없더군요. 뉴스 속에 돈이 있는데 말입니다. 제 예상은 맞아떨어져 1998년 나스닥이 떴고 이듬해에는 코스닥이 사상 최대의 활황을 구가했습니다.”

    1997년 7월에 자본금 100억원 규모의 미래에셋캐피탈을, 8월에는 10억원 규모의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박회장은 미래에셋캐피탈 주식의 50%를 갖는 등 두 회사의 대주주가 됐다. 동원증권에서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박회장의 연봉은 1억5000만원을 웃돌았다. 매년 받는 인센티브도 3~5억원 수준이었다. 그렇게 번 돈에 자기 몫의 고향 땅 일부를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대주주 자본금을 마련했다. 평소 인연을 맺어 온 투자자들과 임직원이 나머지 금액을 채웠다.

    창업 얼마 후 IMF 위기가 왔지만 미래에셋은 오히려 돈을 벌었다. 증시 폭락과 금리 인상, 채권 가격 급등 등을 미리 예상한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1998년 초 시중 금리가 연 30%를 향해 치달을 때 미래에셋은 운용자금 200억원을 채권에 풀 배팅했다. 박회장은 “경제구조상 금리가 더 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같은 해 3월, 예상대로 시중금리가 20%대로 급락하면서 채권 값이 급등했고 덕분에 50억원을 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998년 12월, 박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 증권투자회사법이 제정되면서 국내에도 간접주식투자의 길이 열렸다. 뮤추얼펀드 판매가 허용된 것이다.

    -업계 반응은 시큰둥했는데요. 무슨 근거로 뮤추얼펀드 출시를 결정했습니까.

    “당시 허가된 뮤추얼 펀드는 폐쇄형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한번 돈을 집어넣으면 1년 후에나 찾을 수 있는 것이었죠. 투신사들은 이미 수익증권이라는 일종의 개방형 펀드를 팔고 있었는데 판매율이 좋지 않았어요. 그러니 뮤추얼펀드는 더 안 팔릴 거라 생각한 거죠.

    하지만 우리 판단은 달랐습니다. 뮤추얼펀드의 최대 장점은 투명성입니다. 투자자 개개인이 작은 회사의 주주가 되는 형식이어서 자신의 돈이 어떻게 굴려지는지, 수익률은 어떤지 등을 유리알 보듯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요. 또 독립적인 운용이 가능하고요. 기존 투자상품에 실망한 투자자들이 이 쪽으로 대거 몰려들거라 예상했습니다.”

    -뮤추얼펀드 발매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일단 신문광고를 내려 했더니 큰 광고회사들이 거절하더군요. 뭐 하는 회사인지,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엮였다가 손해라도 보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 손으로 직접 광고를 만들었지요. 내세울 건 사람밖에 없어 죽 사진을 넣고 짤막한 경력을 써넣었습니다. 투자자에게 신뢰를 주고 펀드매니저의 중요성과 책임감을 강조하기 위해 펀드 이름도 ‘박현주1호’라고 지었습니다. 500억원 규모로 출범한 박현주1호는 발매 2시간30분만에 마감됐습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죠.”

    뮤추얼펀드의 대대적 성공은 금융 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자산운용사는 물론 뮤추얼펀드 발매가 금지돼 있던 투신사들도 부랴부랴 유사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1999년, 미래에셋의 뮤추얼펀드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평균 수익률이 90%를 웃돌았다. 이는 당초 박회장이 “수익률 30% 이상을 자신한다”고 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박회장은 이에 대해 “1999년 2월 바이코리아 펀드가 출범하면서 주식을 마구 사들인 덕을 톡톡히 봤다”며 “운도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해 12월, 미래에셋캐피탈은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6개월 전 24억원을 투자한 다음커뮤니케이션 주가가 폭등하면서 1000억원에 가까운 매매차익을 챙긴 것이다. 수익률이 너무 엄청나 “‘다음’이 뜰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왜 ‘다음’에 투자했습니까. 인터넷 벤처기업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던 때였는데요.

    “‘다음’ 투자는 제가 결정한 겁니다. 당시 미국에는 이미 인터넷 붐이 일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머지 않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CEO가 믿음직스러웠어요. 저는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CEO의 자질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라이코스’사에 대한 투자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CEO인 정문술 회장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갑작스레 은퇴를 하고 말았으니까요.”

    2000년 1월, 미래에셋증권이 출범했다. 박회장은 위탁수수료 인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기존 증권사가 거래액의 0.5% 정도를 수수료로 제하는 데 비해 미래에셋증권은 그 비율을 0.29%로 확 낮췄다. 인터넷 거래 수수료는 0.029%. ‘증권업계의 무혈 대혁명’으로 일컬어진 파격적 수수료 인하는 미래에셋증권이 출범 1년만에 전국 약정고 6~7위 증권사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업계 일각에는 미래에셋증권이 파격적 수수료 인하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수입이 적어 머지 않아 위기를 겪게 되리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수수료 수입이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증권업계 상황에 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직원들은 영업실적을 올리기 위해 불필요한 사고팔기를 반복하고 그 결과 증권사 직원은 억대 성과급을 받지만 개미 투자자의 수익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 그만큼 양질의 서비스를 하고 있느냐, 이것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죠.

    살아남으려면 철저히 투자자 편에 서야 합니다. 수수료 비율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원가 수준으로 낮추고 이윤은 다른 쪽에서 창출해야 합니다. 각종 펀드 판매가 그 대안이 될 수 있겠죠. 장기적으로 증권사는 종합자산관리 전문회사로 양질전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진 증권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자산관리상품이 자리잡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투자자들은 보수적입니다. 갑자기 되는 일은 없어요.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죠.

    수수료를 인하한 또 한가지 이유는 트랜드입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지금의 20대가 30대, 40대가 된 시점에는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해 투자하고 자산을 관리할 것입니다. 잠재고객에게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가려면 수수료 인하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장의 수익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빨리 증권사를 설립했습니까.

    “미래에셋증권은 수수료 수익이 아니라 우리 펀드를 안정적으로 판매·관리하고 미래에셋의 경영 철학을 고객 여러분께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점포에는 전광판이 없습니다. 왜 우리 고객들이 하루 종일 전광판 앞에 앉아 빨갛고 파란 숫자들에 일희일비하며 생업을 포기해야 합니까. 투자는 전문가가 하면 됩니다. 저는 투자자들에게 자산을 나눠 관리하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를 병행해야죠. 그런 비교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신에게 어떤 쪽이 더 잘 맞는지, 어느 쪽 수익이 더 높은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미래에셋증권 지점들이 대부분 건물 1층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기존 증권사 객장은 거의 다 2~4층에 있습니다. 1층은 임대료가 비싸기 때문인데 이 역시 고객 중심적 사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미래에셋증권의 1층 입주에는 우리가 데이트레이딩이 아닌 자산관리·펀드 판매에 주력하는 회사이며, 그런 만큼 ‘단골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2000년은 부침이 많은 해였습니다. 증권사의 순항과는 반대로 증시가 폭락하면서 뮤추얼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니까요. 당시 심정이 어땠습니까.

    “수익률이 나빴다고 하지만 그래도 종합주가지수 대비 15% 초과 수익률로 국내 30여개 운용사 중 2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1999년 실적이 워낙 좋았던 까닭에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아야 했죠. 무엇보다 우리를 믿고 소중한 자산을 맡겨 준 투자자들에게 실망을 안긴 점이 대단히 괴롭고 송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혹독한 평가를 해 준 언론에 감사하고픈 마음이예요. 중간중간 신문에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가 실린 덕분에 투자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저희는 결산하는 날 한두 분쯤 혼절하는 사태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지난해 실적이 좋았고 올 증시도 비교적 낙관적이라 올해는 더욱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래에셋은 2001년에도 도전적인 경영전략을 펼쳤다. 국내 최초 랩어카운트(종합자산관리 계좌) 업무 개시, 국내 최초 개방형 뮤추얼펀드 출시, 국내 최초 채권형 시스템 헤지 채권펀드 출시. 올 예상 수익은 500억원. 2003년에는 1000억원의 순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회장의 미래 분석 능력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IMF 위기나 대우 사태 등도 미리 감지가 가능했습니까.

    “그렇습니다. 1997년 9월인가, 매경 이코노미스트 클럽에서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 IMF 사태가 올 것 같다”는 말을 했다가 아주 혼이 났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진데다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저성장 기조로 돌아서면 살아남을 수 없는 기업이 많았어요. 부채비율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중국의 고성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기업의 평균 부채 비율은 500%에 육박합니다. 이는 일종의 ‘위험 신호’입니다. 고성장 기조를 유지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저성장으로 돌아서는 날에는 순식간에 붕괴될 수도 있거든요. 증시에 부실채권이 쏟아져 들어오면 감당하기 힘들겁니다. 저성장 경제에서 부채비율이 높은 회사는 무조건 구조조정 대상입니다. 그걸 잊어서는 안돼요.

    비슷한 시기, 대우그룹에 대해서도 나름의 판단을 내렸습니다. ‘세계경영’이란 모델은 훌륭하나 재정적 취약성이 너무 커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증시에서 대우 주식이 거래되고 있다는 자체가 아직 우리 자본 시장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어요. 1998년 8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뉴스를 보고는 ‘정말 끝났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대우는 동유럽 국가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의 환란(換亂)은 악재 중의 악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000년 1월, ‘벤처기업의 금융업 진출은 재앙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는데요.

    “벤처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너도나도 벤처펀드다, 벤처캐피탈이다 기웃거리는 것에 문제가 많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일은 젖혀둔 채 생소한 업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면 벤처업계 뿐 아니라 금융계까지 피해가 확산될 우려가 컸습니다. 비제도권에서 광풍이 불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죠. 아, 상당히 위험한 국면에 들어섰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벤처-정치권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예상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는 어떤 ‘개연성’이 있었거든요. 공무원 만날 일이 있으면 2~3년 전부터 “벤처 투자 절대로 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저도 벤처 CEO 만나는 일은 되도록 피했고요. 무심코 한 행동 때문에 훗날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회사가 위험한 겁니까.

    “게이트는 금감원과 검찰의 조사 대상이 됐던 회사에서 터집니다. 시장은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아요. 그리고 정치권과 손을 잡는 것은 금물입니다. 미래에셋만 해도 기업 분석을 해봤을 때 정치권 관련 인사가 임직원이나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곳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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