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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의 조선사랑

의료선교사

  • 김홍권 < 한국종교사회윤리연구소 소장 >

로제타 홀의 조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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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가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난 것은 1889년 11월, 뉴욕시 가두진료소에서였다.

어느 날 간호원 젠켄스가 닥터 홀의 진찰실로 들어서면서 새 소식을 전했다.

“닥터 홀, 새 의사가 오셨어요. 닥터 로제타 셔우드라고, 선생님을 도울 분이에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스테이트 선의 소아과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친 로제타는 윌리엄이 책임자로 있던 뉴욕시 메디슨가 선교진료소의 의무 복지사로 발령 받았다. 윌리엄은 로제타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내색을 않고 엄격한 선배로서 모든 서류를 차근히 읽은 뒤 위엄 있는 표정으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몇 해가 지난 후 그의 아내가 된 로제타에게 윌리엄은 “첫날 인터뷰 때 자기를 꽤 높여서 선전하느라 열심이었다”는 말을 하며 그녀를 놀리곤 하였다.

윌리엄 제임스 홀은 1860년 1월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 뷰엘의 농가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던 그는 17세 때 공부를 중단하고 목공 견습생이 되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돼 폐가 나빠져, 고향으로 돌아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건강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이때 그는 “다시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목수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1883년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윌리엄은 교사로 일하며 생명보험회사 세일즈맨까지 겸해 돈을 모았다. 그리고 2년 후, 온타리오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대학의 YMCA 지부를 조직하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재학중 국제 의료선교회 이사인 조지 도우넛 박사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된다. 윌리엄은 그를 통해 뉴욕의 국제의료선교회에 의료선교사 양성을 위한 훈련제도가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윌리엄은 그 길로 뉴욕의 벨레뷰병원 의과대학으로 가서 3, 4학년을 마치고 1889년 졸업과 함께 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첫 직장이 바로 메디슨가 선교진료소였고, 그곳에서 로제타를 만난 것이다.

윌리엄은 사재를 털어가며 의료와 선교에 헌신하고 있었다.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해온 어린이 주일학교 일에도 열심이었다. 로제타는 닥터 홀을 깊이 존경하게 됐다. 선교사로서의 삶을 위해 결혼은 예정에 없는 계획이었지만 그해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계속된 홀의 청혼을 받아들여 1892년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로제타와 만날 당시 윌리엄은 중국 파견을 앞둔 예비 선교사였다. 약혼 후 로제타는 예비 남편과 같은 임명을 받기 위해 뉴욕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협회에 등록을 했다. 이들은 감리교 선교 부의 방침에 따라 인도나 중국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라던 대로 1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조선에서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먼저 파견된 이는 로제타였다. 1890년 10월14일 로제타는 조선에 파견된 최초의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 ard)의 후임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1개월 후 로제타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의 책임자로 임명됐다. 로제타는 1893년 8월23일 평양에 갈 때까지 그곳에 근무하며 병원을 크게 발전시켰다. 1897년에도 6개월간 병원을 맡아 운영했다. 후에 이곳은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발전했고, 지금은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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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권 < 한국종교사회윤리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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