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투르니에, 책에서 만난 나의 스승

  • 이윤기 < 소설가·번역가 >

    입력2004-11-08 17: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우리는 대화에 등장시킬 경우 외국인 학자나 예술가의 이름에 경칭을 잘 붙이지 않는다. 내게도 그런 버릇이 있다. 미국인 교수의 한국인 제자들도 영어로 말할 경우에만 스승에게 ‘프로페서(교수)’나 ‘닥터(박사)’ 같은 경칭을 붙일 뿐, 한국어로 말할 경우에는 그냥 이름만 부르는 예가 허다하다. 나는 미국 대학에 10여 년을 머물렀지만 우리말 대화에서도 반드시 ‘교수’나 ‘박사’를 붙여서 부르는 미국인은 딱 한 사람 뿐이다.

    그런데 이렇도록 경칭을 챙겨 붙이는데 게으른 나에게,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선생’을 붙여서 부르는 프랑스 작가가 있다. ‘미셀 투르니에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여러 권의 책을 통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뿐, 미셀 투르니에 선생과는 일면식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나는 투르니에라는 이름 뒤에 선생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행복한 수고를 거르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 겨울, 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딸아이가 짧은 겨울방학을 맞아 귀국했다. 방학을 지내고 돌아가기 직전 딸아이는, 전공과 관계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좋으니 한국어로 쓰여지거나 번역된 책 중에서 전범(典範)으로 스승삼아 외국에서 읽을 만한 책이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했다. 나는 내 서가에 꽂혀 있던 미셀 투르니에 선생의 책 ‘짧은 글 긴 침묵’(김화영 옮김, 현대문학)과 ‘예찬’(김화영 옮김, 현대문학북스)을 딸에게 건네주었다. 딸에게 책 선물하면서 기쁘지 않을 아비가 없겠지만 내 기쁨은 각별했다.

    저자와 역자가 각각 투르니에 선생과 김화영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투르니에 선생의 책을 읽으면 철학하는 내 딸의 철학적 눈썰미나 생각이 깊어질 터이고,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화영 교수의 번역문을 읽으면 글쓰기를 겨냥하는 내 딸의 문학적 감수성이나 말의 결 다루는 솜씨가 그만큼 섬세해질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축복이다.

    투르니에 선생이 누구인가? 1924년생이니 만 78세 노인이다. 질 들뢰즈, 미셀 푸코 같은 분들과 함께 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한 철학자이자 마흔 셋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발표, 소설가로 등단하면서 그 해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받을 정도로 역량이 뛰어난 소설가다. “미셀 투르니에에게 노벨상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투르니에의 영광이 아니라 노벨상의 영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프랑스 문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자리는 높고도 우뚝하다.



    하지만 나는 번역 이야기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투르니에 선생은 철학자, 소설가인 동시에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투르니에 선생의 책을 여러 권 번역한 김화영 선생 역시 시인이자 불문학자이자 평론가(‘ 문학평론가’라고 하지 않은 것은 ‘미술평론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인 동시에 번역가이기도 하다. 나 역시 소설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좋은 번역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투르니에 선생이나 김화영 선생의 글을 읽을 때 특별히 옷깃을 여미고 처음부터 각별한 경의를 표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것이 편견이라면 나는 행복한 편견이라고 부르겠다.

    번역에 대한 투르니에 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 ‘예찬’에다 붙인 김화영 선생의 역자 후기 ‘2000년 정초에 만난 미셀 투르니에’라는 글에 실려 있다.

    “그 자신 관심이 많았던 번역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자신이 플롱 출판사의 번역판 편집 책임자로 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한다. 유명한 ‘007시리즈’를 그리 대단찮은 역자에게 맡겼더니 그 책은 엄청난 부수가 판매되었고, 반면에 특출한 문학적 창의성이 요구되는 카잔차키스의 시 번역은 매우 역량있는 역자에 의해 여러 해가 걸려 번역되었지만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편집 책임자의 직권으로 전자에게는 최소한의 번역료를, 후자에게는 노력에 값하는 후한 번역료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곧 탄식하듯이 말한다. ‘그런 편집자가 잘 있어야 말이지.’”

    나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세 권이나 우리말로 옮긴 역자이니, 우리나라에 투르니에 선생 같은 편집자가 있었다면 나 역시 썩 후한 번역료를 받을 수 있었을 터이다.

    투르니에 선생이나 김화영 선생이나 번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틈날 때마다 불거져 나온다. ‘짧은 글 긴 침묵’의 역자 후기에서도 김화영 선생은 1998년 투르니에 선생과 만났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김화영)는 대답 대신 “당신(투르니에)도 원래 번역자의 경험으로 시작한 작가가 아닙니까?”하고 웃으면서 반문해보았다. 그래서 자기는 번역자의 고통을 잘 안다고 말했다. 나는 문득 투르니에가 젊은 시절에 독일 작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번역하고 나서 그 원작자를 만났던 이야기를 소개한 그의 저서 ‘성령의 바람’의 한 대목을 생각했다….

    “내(레마르크) 책의 번역자와 내 나라 말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미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 다른 나라 번역자들은 독일어를 마치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같이 죽은 언어처럼 말하더군요”하고 털어놓았다. 그는 번역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그러나 번역은 오로지 장차 자기 개인의 글을 쓰기 위한 연습으로만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그렇지만 번역과 자기 글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가령 내 최근 소설을 옮겨놓은 당신의 번역을 - 물론 아주 훌륭하죠 - 읽어보고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첫째는 원서에 있는 몇몇 대목들이 번역서에 와서 없어져 버렸다는 점이에요.”

    “두번째 놀라움은 뭐죠?”하고 매우 불안해진 내가 물었다.

    “두번째 놀라움은 그와 반대로 원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몇 페이지를 번역서에서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나는 당시 스무 살이었고 시건방진 바보였으므로 레마르크의 문장을 별로 대단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이 뻘개져서 말을 한참이나 더듬다가 나는 방자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두번째 것이 첫번째 것보다 나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는 너그럽게도 그냥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번역자란 작가의 반쪽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장 겸손하게 수공업적인 반쪽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투르니에 선생의 산문집은 방만한 수필 모음이 아니다. ‘짧은 글 긴 침묵’에서는 집, 도시들, 육체, 어린이들, 이미지, 풍경, 책, 죽음 등을 그 나름으로 사유하던 그가 ‘예찬’에서는 자연, 몸과 재산, 이런 곳 저런 곳, 계절과 성자들, 이미지, 인물들을 예찬한다.

    그의 산문은 그가 한 사유의 끝이 아니다. 그의 사유는 텍스트에도 열려 있고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 그의 산문을 읽는 일은 그 산문의 행간에다 우리의 사유를 풀어놓는 일이다. 자, 산불의 마지막 연기가 사라지자 알프 마리팀 산림청 직원팀이 불 탄 땅을 점검하기 위하여 산을 오른다. 그런데 그들은 검고 반질반질한 피부가 불에 데어서 물집이 생기고 부풀어 오른 커다란 물고기 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란다. 무엇이겠는가? 그는 설명한다.

    소방용 비행기들이 바다와, 화재가 난 숲 사이를 오랫동안 왕래하면서 매번 엄청난 양의 물을 뽑아올려다가 화재 현장에 쏟아 붓는다. 그때 한 순진한 사람이 해저 낚시의 은근한 매력에 사로잡혀 골몰하고 있다가 그만 20초당 10t의 해수를 흡수하는 비행기의 거대한 도관에 문자 그대로 삼켜지고 만 것이다. 몇 분 뒤 그는 하늘 꼭대기에서, 불이 난 숲 위로 내뱉어지고 말았다. 한가로운 한 휴가객에게 이 무슨 기막힌 모험이라는 말인가! 게다가 그는 이 모험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위안마저 얻지 못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 정도의 유머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주인공의 ‘삼중 변신’에까지 미친다. 그는 우선 액체 원소를 선택했었다. 그는 인간 개구리(잠수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짧은 한동안 인간 새가 되었다가 마침내 그는 인간 불도마뱀으로 변했다. 물과 불, 휘드라와 용. 여러분은 저 끔찍한 스페인 속담을 아실 것이다. ‘물과 불이 싸움을 하면 언제나 죽는 쪽은 불이다.’

    ‘예찬’은 우리가 지나쳐 왔던 사소한 사물에 대한 예찬이다. ‘예찬’을 통하여, 투르니에 선생의 따뜻하면서도 깊은 시선을 통하여 우리는 나무와 숲(무엇보다도 잡초), 썰물, 말, 무릎, 젖, 뱀, 도리, 개구리, 도마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인생조차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가 남기기를 바라는 묘비명을 보라. 나도 그처럼 삶을 예찬할 것 같다.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 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나에게 투르니에 선생의 산문 읽기는 하나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의 산문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산문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 산문을 번역한 김화영 선생의 산문으로 확산되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는 김화영 선생의 글을 이렇게 보고 있다.

    “…김화영은 언어의 수도원에 은거하는 수도승 같다… 고요와 집중의 책 읽기 그리고 정교하고 미학적인 글쓰기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김화영의 평론일 것이다.”

    투르니에 선생의 여행기에 매료된 독자들이라면 김화영 문학선 ‘한눈팔기와 글쓰기’의 ‘지중해, 나의 사상’, ‘내 청춘의 고향 프로방스’에 실려 있는 프로방스 이야기를 놓칠 수 없다.

    우리 시대 소설 독법의 나침반 같은 평론집 ‘소설의 꽃과 뿌리’에 이를 수 있는 독자에게 복 있을진저. 나는 복이 많아서 알베르 카뮈의 문학세계를 조망한 그의 논문집 ‘문학 상상력의 연구’에까지 이르렀다. 투르니에 선생과 김화영 선생, 내 선생님들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