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37년 동안 한국의 외교일선에 몸담았다. 한반도의 안보와 남북관계에 대한 한미간의 시각차가 벌어져 양국 외교관계가 오늘날처럼 위기를 겪는 상황을 과거에도 경험한 바 있다.
1977년 카터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선거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한반도의 안보와 한미 두 나라 관계가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당시 어려워진 한미관계에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 주미일본대사가 펼친 한·미·일 3국간의 외교비사를 곁들여 그 무렵 내가 도쿄와 서울에서 체험하고, 지켜본 몇 가지 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 고향은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으로 뒤에는 지리산이 자리하고, 옆으로는 섬진강 물이 휘돌아 나가는 곳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굽던 유명한 사기마을이 있어 일찍이 일본과 도자기 교류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고향에 자리한 이 분청사기 가마와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분청사기 가마는 조선 초기부터 막사발을 구워내다가 임진왜란 때 엄청난 수난을 겪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가마도 완전히 망가졌는데, 1970년대에 옛 모습을 살려 복원되어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1962년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 1965년 6월에 외무부 사무관으로서 관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미국 아시아재단의 도움으로 1년간 미국 연수를 마치고 초임 부영사 시절을 미국 LA에서 보냈다. 그리고 중국과장을 거쳐 김동조 외무장관의 비서관을 하다가 1976년초 주일본대사관에 정무과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의 주일대사는 김영선씨였다. 김 대사는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일제시대 고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충남 대덕군수를 지냈다. 김대사가 대덕군수이던 시절, 뒷날 일본수상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조그만 건설회사사장으로 충남 대덕군에 와 있었는데 이때 김군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김대사는 장면씨와는 정치적 동지였고 종교적으로도 대자(代子)와 대부(代父)관계였다. 장면 정권 당시에는 재무부장관으로 정권의 돈주머니를 찼던 실세 경제통이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박대통령은 다나카씨가 수상과 자민당의 최대파벌 영수로 군림할 시절, 한일 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김영선씨를 일본대사로 임명했다.
1977년에는 카터 정부의 대선 공약중 하나인 주한미군 철수가 한미간에 첨예한 이슈였다. 당시 카터 미국대통령은 인권외교를 앞세워 유신통치로 인권탄압과 장기집권 시비를 불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다. 박대통령으로서는 카터 행정부의 대한 외교정책이 매우 불편하였고 이 문제로 여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대통령은 미군의 한국 주둔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절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를 설득해 나갔다. 박대통령은 당시 김영선 주일대사를 통해 직접 대일 외교를 챙겼다. 필자 기억에는 적어도 매월 1회씩 정기적으로 김영선 대사가 박대통령에게 친필서신을 통해 보고했고, 박대통령도 친필서신으로 대일 외교 주요사안을 지휘했다.
김대사는 이런 일을 비밀리에 해나갔지만 정무과장인 필자는 김대사의 측근으로 드나들면서 대일 외교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김대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이를 통하여 당시 박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심하는가를 역력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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