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카터정권 설득 도운 도고 주미일본대사와의 인연

  • 권병현 <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

    입력2004-11-09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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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시다, 기시, 사토, 후쿠다로 이어지는 일본 보수의 본류는 한일회담 과정에서 청구권자금, 재일동포 법적지위문제, 등 복잡한 현안을 일괄타결하면서 국교정상화를 이루어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구일본군 출신이 큰 축을 이룬 한국의 군맥을 활용하여 한일안보의원연맹까지 결성했다.
    필자는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37년 동안 한국의 외교일선에 몸담았다. 한반도의 안보와 남북관계에 대한 한미간의 시각차가 벌어져 양국 외교관계가 오늘날처럼 위기를 겪는 상황을 과거에도 경험한 바 있다.

    1977년 카터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선거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한반도의 안보와 한미 두 나라 관계가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당시 어려워진 한미관계에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 주미일본대사가 펼친 한·미·일 3국간의 외교비사를 곁들여 그 무렵 내가 도쿄와 서울에서 체험하고, 지켜본 몇 가지 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 고향은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으로 뒤에는 지리산이 자리하고, 옆으로는 섬진강 물이 휘돌아 나가는 곳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굽던 유명한 사기마을이 있어 일찍이 일본과 도자기 교류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고향에 자리한 이 분청사기 가마와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분청사기 가마는 조선 초기부터 막사발을 구워내다가 임진왜란 때 엄청난 수난을 겪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가마도 완전히 망가졌는데, 1970년대에 옛 모습을 살려 복원되어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1962년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 1965년 6월에 외무부 사무관으로서 관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미국 아시아재단의 도움으로 1년간 미국 연수를 마치고 초임 부영사 시절을 미국 LA에서 보냈다. 그리고 중국과장을 거쳐 김동조 외무장관의 비서관을 하다가 1976년초 주일본대사관에 정무과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의 주일대사는 김영선씨였다. 김 대사는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일제시대 고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충남 대덕군수를 지냈다. 김대사가 대덕군수이던 시절, 뒷날 일본수상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조그만 건설회사사장으로 충남 대덕군에 와 있었는데 이때 김군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김대사는 장면씨와는 정치적 동지였고 종교적으로도 대자(代子)와 대부(代父)관계였다. 장면 정권 당시에는 재무부장관으로 정권의 돈주머니를 찼던 실세 경제통이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박대통령은 다나카씨가 수상과 자민당의 최대파벌 영수로 군림할 시절, 한일 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김영선씨를 일본대사로 임명했다.

    1977년에는 카터 정부의 대선 공약중 하나인 주한미군 철수가 한미간에 첨예한 이슈였다. 당시 카터 미국대통령은 인권외교를 앞세워 유신통치로 인권탄압과 장기집권 시비를 불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다. 박대통령으로서는 카터 행정부의 대한 외교정책이 매우 불편하였고 이 문제로 여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대통령은 미군의 한국 주둔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절대 필요하다는 논리로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를 설득해 나갔다. 박대통령은 당시 김영선 주일대사를 통해 직접 대일 외교를 챙겼다. 필자 기억에는 적어도 매월 1회씩 정기적으로 김영선 대사가 박대통령에게 친필서신을 통해 보고했고, 박대통령도 친필서신으로 대일 외교 주요사안을 지휘했다.

    김대사는 이런 일을 비밀리에 해나갔지만 정무과장인 필자는 김대사의 측근으로 드나들면서 대일 외교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김대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이를 통하여 당시 박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심하는가를 역력히 알 수 있었다.

    박대통령은 뼈아픈 김대중 납치사건과 가슴에 사무치는 문세광 사건을 완전히 묶어 패키지로 봉합하고, 일본 국회가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을 비준한 것을 계기로 한일관계를 굳건히 다지려고 했던 것 같다. 이렇게 공고히 다진 한일 선린우호관계를 통하여 불편한 대미관계마저 돌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대통령은 한일 국민들이 서로 반감으로 들끓고 있는 와중에서 한일 안보협력을 증진할 대담한 구상을 갖고 구체적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이는 한일안보의원연맹을 구성하여 양국 안보협력을 강화하려는 구상이었다. 한일안보의원연맹을 만들어 나가는 핵심세력은 과거 일제시대에, 같은 군복을 입고 같은 군가를 부르던 한일 양측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역시 일본군 장교였던 박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전면에 나섰다.

    한국 측은 중진의원이며 국군 원로인 문형태 의원을 주축으로 정래혁, 최경록, 장지량, 장성환 의원을 앞세웠고, 일본측은 자민당 보수우익 본류인 후쿠다파의 사카다 미찌다(坂田道太·당시 방위청장관으로 후에 중의원 의장을 지냄), 에자키 마즈미(당시 자민당 3역의 하나인 정조회장을 역임), 겐다 미노루(하와이 진주만 공격 작전계획을 입안한 일본군의 신화적 존재) 등 거물급이 전면에 나섰다.

    그 배후에는 후쿠다 총리와 함께 일본 정계의 괴물 야인으로 알려진 야스기 가즈오씨가 막후 역을 담당했다. 야스기 가즈오씨는 2차대전 때 중국에서 암약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한국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이른바 ‘호랑이’ 논쟁을 벌였던 한일 수교의 막후 인물이었다. 그는 한일관계에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가진 일본 보수세력의 재야 보스라 할 만한 인물이다.

    요시다, 기시, 사토, 후쿠다로 이어지는 일본 보수의 본류는 박대통령의 집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일회담 과정에서 청구권 자금, 재일동포 법적 지위문제, 평화선과 어업문제 등등 복잡하게 얽힌 현안들을 일괄타결하면서 국교정상화를 이루어냈다.

    당시 한일 안보족 의원들이 빈번하게 오고가며 양국간의 선린우호를 안보 협력의 차원으로 한단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측에는 보수 본류의 배경을 업은 안보족 정치인들이 있었고, 한국에는 박대통령을 위시한 구 일본군 출신 정치인들의 군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때가 양국의 인맥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한일 양국 협력관계가 정점을 이룬 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일개 정무과장으로서 나는 한일 양국민 간에는 연령과 계급이 파괴된 허물 없는 접촉과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당시 한일 안보족 의원들의 아카사카 요정 파티가 열리면, 한일 우호가 술잔에 넘쳐흘러 일본 군가의 합창으로 이어진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이 시기는 막대한 자금과 인맥이 동원되어 한일관계를 다지던 때였다. 또 일본이 동북아시아 안보의 일역을 맡아 한일안보협력으로 한미동맹을 보완하고 카터 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압박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던 시기였다.

    그 이상의 한반도 안보에 관한 박대통령의 원대한 구상도 있었으나, 그의 갑작스런 서거로 진전은 이루지 못하였다. 한일 안보 협력 강화 움직임에 대한 평가는 후일 역사가의 몫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 인맥이 끊긴 지금 1970년대 같은 한일 안보협력체제를 다시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카터 미국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과 인권외교로 인한 한미간의 외교적 마찰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박대통령과 한국 외교팀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전방위 외교에 나섰다. 특히 박대통령은 김영선 주일대사를 앞세워 일본을 통한 우회적인 대미방어외교를 전개하였다.

    카터대통령은 주일대사로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로 미국의 정계는 물론 외교를 휘두르던 맨스필드 상원의원을 파견했다. 김영선 대사는 맨스필드 대사와 접촉하여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필자는 김영선 대사를 모시고 노령의 맨스필드 대사 관저까지 방문하여 한반도 안보의 특수성과 주한미군 철수가 가져올 위험을 설명했다. 맨스필드 대사는 김대사가 설명하는 한반도의 안보상황을 경청하고, 즉시 본국의 카터행정부를 설득해보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주미일본대사로 근무하던 도고 후미히코 대사가 미국에서 도쿄에 일시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대사는 즉시 접촉에 나섰다. 김대사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도고대사는 1973년 8월 한일각료회의 당시 외무성 심의관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한일외교 현안이었던 김대중 사건 등의 처리를 협의하기도 했다.

    도고는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이후 한국을 다시 방문하여, 김영선 대사와 함께 사건수습에 진력한 바 있다. 그후 외무성 차관을 사임한 후 부부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여 판문점과 휴전선 부근의 남침 땅굴을 참관하고, 북한측과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한의 안보적 상황을 체험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도고대사는 한국에 대해 매우 이해심이 깊은 일본의 외교관이었다. 김영선 대사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무과장이었던 필자를 심야에 수시로 관저로 불러 대책을 숙의하곤 하였다.

    김영선 대사는 당시 도고대사에게 주한미군철수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안보에도 역행한다는 논리를 들어 일본의 입장에서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미국 조야에 알려 카터행정부의 미군철수 입장을 바꾸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도고대사는 김대사의 입장과 논리를 수긍했다. 그는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과 휴전선 땅굴을 참관하고 한국의 안보와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면 일본 입장에서 카터행정부를 설득하겠다고 하였다.

    도고대사는 미국으로 돌아가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몇 차례 더 일본에 귀국하여 김영선 대사와 만나 진행상황을 전해주면서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도 전했다. 정말 고마웠다.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필자는 그때 김영선과 도고 두 노대사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한일간의 팀플레이 외교가 상대방 국가에 깊이 먹혀들어 결국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이 현명한 결단을 내리는 데 두 대사가 한몫을 단단히 해낸 것이다.

    필자는 1978년 9월에 일본 정무과장을 마치고 서울 본부의 일본담당관으로 임명됐다. 귀국하자마자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주한미군문제와 연관된 작은 역할 하나를 맡았다. 1978년 말 미국측은 ‘앤터니 레이크’ 국무부 정책실장(후에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안보보좌관 역임)을 단장으로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및 미 중앙정보부의 중견 간부로 구성된 선발대를 보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한국측 카운터 파트들과 곧바로 경주로 내려갔다. 한국측은 당시 외교부 박쌍용 차관보(후에 주UN대사), 유종하 미주국장(외교부장관 역임), 박건우 주미 참사관(후에 주미대사 역임), 손장래 국방부 작전기획국장 외에 청와대, 안기부 간부와 필자가 동행했다.

    서울발 경주행 새마을호 특별열차 한 량을 한미 대표단이 전용해서 갔는데, 이 차량은 박대통령이 지방 출장시에 쓰던 특별열차로 알려졌다. 경주 코오롱호텔에 여장을 풀고 편한 복장으로 2박3일간 같이 먹고 자면서 주한미군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반도문제로 난상 토론을 벌였다.

    그러고는 헬기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울산의 현대조선, 현대자동차 등 산업시설을 둘러보고, 다시 창원으로 날아가 우리나라 자주국방산업의 간판격인 현대양행을 둘러보았는데 정인영 현대양행 회장이 직접 브리핑하고 안내했다. 미국 선발대의 경주, 울산, 창원 일정을 보면 박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자주국방 의지의 카드를 내보이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후 박대통령이 카터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대비한 면담록을 직접 친필로 꼼꼼히 적어서 준비했다가 한미정상회담에서 카터대통령에게는 발언기회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시간 가량을 설교하는 식으로 발언을 독점하여 카터대통령을 격노케 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외교 비사다. 카터대통령은 귀국한 후 얼마 있다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백지화했다.

    필자가 본 것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철회시키기 위한 박대통령의 치밀한 외교 노력 가운데 한 단면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유비무환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주 국방과 안보외교를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면서 카터대통령과 벼랑끝 승부수까지 던지면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무산시킨 것이다.

    한국인들이 철군 반대를 위해 각자 맡은 분야에서 노력한 것은 국익을 위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도고가 주미일본대사로서 자국 이익을 위해서든 개인적 인연에 의해서든 주한미군 철수를 막는 데 한몫을 한 데 대하여 우리는 빚을 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애증이 혼재하는 오늘의 한일관계 속에서 도고대사는 무언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듯하다.

    한일 양국 국민간에 오랜 세월을 두고 섞이고 쌓이고 얽히고 맺어진 인연과 업은, 국익이나 국경 같은 인위적인 것을 초탈하는 무위자연의 세계에서 가식과 계산 없는 이웃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78년 가을, 필자는 종전 당시 일본 외무장관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도고 후미히코 대사의 부친)의 고향인 가고시마현 사쓰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때 납치되어 온 조선 도공들이 이룩한 도자기문화의 고향이다. 이곳 도요지에는 심수관씨를 비롯한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400년 동안 당당하게 조선의 피를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일본 도예문화의 훌륭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 사쓰마 도자기의 본고장에 또 하나의 자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도공의 후손인 도고 시게노리 외무장관이다.

    필자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조선인의 핏줄문화는 정말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년시절 박무덕(朴茂德)이란 한국이름으로 불렸던 도고 시게노리는 1945년 8월 서슬 푸른 군부의 반대와 위협에 굴하지 않고 쇼와(昭和) 일왕 앞에서 포츠담선언 수락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만약 그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훨씬 더 철저히 파괴되어 오늘날 같은 번영을 누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이런 목소리가 일본에서 여론화되어 도고 시게노리 기념사업회가 생기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저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는 사쓰마의 자랑이 아니라 전일본의 자랑이 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는 1882년 조선 도공의 후예인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에시로가와에서 고등학교를 마친후 도쿄제대 문학부 독문학과를 나온 수재다. 법학을 공부해 내무성 관리가 되라는 아버지의 분부를 거역하고 문학도의 길을 걸었던 그는 졸업 후 어떤 계기로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독일과 소련주재대사를 역임한 뒤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인 1941년 외무장관에 발탁되었다. 1945년 4월에는 외무장관에 다시 기용되어, 일본의 개전과 종전에 직접 관여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도고는 일본현대사의 주역이란 이유 때문에 종전 후, 연합군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금고 20년형을 선고받고 스가모형무소에서 복역중, 1950년 7월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도고가 조선의 박씨에서 성을 바꾸게 된 것은 그가 네 살 때인 1886년 9월이었다. 당시 일본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내세운 정한론(征韓論) 때문에 조선인의 후예란 이름으로는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고는 우여곡절끝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조선인의 후예란 핏줄의 비밀을 안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도고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고국 조선을 많이 그리워했고,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도자기 사발을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외무성 국장 시절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외무성 과장으로 부임한 경주 출신의 장철수 과장을 몹시 아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퇴근 무렵 술을 한잔 하자고 허름한 술집으로 장과장을 불러, 자기도 조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실토하면서 앞으로 독립된 조선정부의 외무부 기초를 다지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도고는 30세가 훨씬 지나서 주베를린 일본대사관에 부임해 독일 여비서와 결혼한다. 그는 조선인 후예였기 때문에 일본가문과 결혼할 수가 없었다. 도고는 독일인 아내 사이에 아들 없이 딸 하나를 두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관이었던 도고 후미히코를 사위로 맞아 양자로 입적시켰다. 도고 후미히코와 외동딸 사이에 아들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중의 한 사람은 현재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워싱턴포스트지의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필자는 2001년 2월 도쿄를 방문하여 도고대사의 두 아들 중 워싱턴포스트 도쿄특파원인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본 외무장관 공관 부근 작고 아담한 술집에서 우리는 산토리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여러 잔 마셨다. 일본인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원하고 활달한 미남인 시게히코와의 첫 만남은 10년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편안했다.

    이때 나는 시게히코씨에게 아버지와의 인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행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며 놀라면서 무척 기뻐하였다. 필자가 아버지의 고향 사쓰마를 방문한다면 만사를 제치고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는 매우 세련된 신사였다. 그는 한국을 이해하는 일본인 기자로 한국을 방문해서 워싱턴포스트지에 기고한 몇 편의 한국 관련 기사를 보여 주었다. 그 기사는 예리한 통찰력과 따뜻한 가슴으로 쓴 글이었다. 그는 앞으로 시간이 나면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한국에 관한 글을 많이 쓰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도고 대사의 아들에게 술의 힘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겁 없이 소설 쓰듯 말하였다.

    ‘당신 도고(東鄕) 집안의 원래 성씨는 박씨인데 400여 년 전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일본으로 납치되어 왔다. 당신네 조상의 고향이 어쩌면 경남 하동군 진교면인 내 고향일지도 모른다. 400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인연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사쓰마를 함께 다녀온 후 가까운 장래에 당신 조상의 고향인 동시에 나의 고향인 진교 포구 사기마을 옛 가마터에 같이 가보자. 그곳 가마터 바로 뒤 야산에는 매우 오래된 ‘박팽의’씨의 무덤이 있다. 같은 박씨요 도공이었을 가능성이 큰 이 무덤의 연대를 임진왜란 무렵으로 추정하는 도자기 전문 사가도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도쿄에서 받은 그의 명함을 꺼내 그에게 안부전화를 하였다. 그러나 건강상 이유로 연락이 되지 않는 먼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어 무척 안타깝다. 문득 시바요타로(司馬太郞)가 쓴 사쓰마의 조선 도공 이야기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가 떠올랐다. 2000년 8월7일 필자는 2년 4개월 동안 주중한국대사의 임기를 마감하고 외교일선에서 물러났다. 나의 베이징 고별 회견을 보도한 모 석간신문 기사는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 막사발을 구우며 살고 싶어한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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