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나는 내 음악 했을 뿐…저항가요라 평하지 말라”

한국 포크의 선구자 송창식

  • 임진모·대중음악 평론가 www.izm.co.kr

    입력2002-10-06 0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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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음악사는 1969년 발매된 트윈폴리오의 데뷔작을
    • 한국 최초의 포크앨범으로 기록하고 있다. 1970~80년대
    •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포크음악의 서장을 열어제친 트윈폴리오는
    • 아쉽게도 이듬해 해산했으나 그후 30여 년 동안 송창식은
    • 전혀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음악적 실험을 거듭해왔다.
    • 늦여름 깊은 밤, 미사리의 한 카페에서 못다 부른 노래를 계속하고 있는
    • ‘작가’ 송창식을 만나 시대와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 음악 했을 뿐…저항가요라 평하지 말라”
    송창식은 모든 점에서 ‘둘도 없는 사람’이다. 우선 음악이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독창적 세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 또한 범인(凡人)의 그것과 크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와 절친한 가수 조영남은 그를 가리켜 “일반적인 잣대로는 풀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독자성의 광채를 발하는 비범한 음악’ 그리고 ‘별난 사람’이라는 두 마디 말이 송창식을 가장 잘 축약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송창식은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를 완전히 정복한 주인공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된 그 시대 포크문화를 대표하면서 그의 노래들은 모든 세대와 계층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대학생들은 저항의 찬가인 양 ‘고래사냥’을 목놓아 외쳤고,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은 마냥 ‘왜 불러’를 따라 불렀으며,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도 ‘상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트로트에서 느끼는 구수함과 애절함을 맛보았다.

    그다지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지만 듀오 트윈폴리오 시절 부른 ‘하얀 손수건’은 그를 여학생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로 만들었고, 대중가요를 외면한 고매한 사람들마저 가곡풍의 ‘그대 있음에’에 감동했다. 그가 포크가수 가운데 유일하게 방송사의 가수왕(1975) 자리에 오른 것도 그처럼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한 광대한 흡인력 때문일 것이다. 국민가수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이미 국민가수였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가 조용필, 1990년대가 서태지 시대라면 ‘1970년대는 송창식 시대였다’는 규정은 아주 자연스럽다.

    밤창식, 별창식, 왜창식

    그런 시대의 거목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에게도 충분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은 두려웠다. 그에게 따라붙는 무수한 수식들과 별명들이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낭만파 시인’이나 ‘저잣거리의 현자(賢者)’와 같은 그럴듯한 것들도 있지만 밤에만 활동한다고 하여 ‘밤창식’ ‘별창식’, 모든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서 붙은 ‘왜창식’이란 별칭이 먼저 떠올랐다. 한마디로 ‘기인(奇人)’임을 말해주는 수식들이 아니던가.



    올해 초 서유석, 김도향, 남궁옥분 등 포크 가수들 9명이 모여 만든 앨범 ‘프렌즈’ 때도 송창식은 홍보를 위한 TV 출연 섭외를 거절했다. 아직도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련만 그는 좀처럼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오전 5시 취침, 오후 2~3시 기상에 깨고 난 뒤에도 몇 시간 운동’이라는 오랜 생활패턴은 누구도 파고들지 못하는 ‘금지영역’이다. 그래도 그의 지인들은 불만의 토를 다는 적이 없다. ‘송창식이니까’ 하는 말은 그들의 오랜 양해사항이 됐다.

    이런저런 걱정에 싸여있는 필자 앞에 예의 손수 지었다는 그 개량한복을 입고 나타난 송창식은 “이거 말 잘해야 되겠는데”라고 운을 뗐다. 그의 얼굴에 팬들에게 너무도 친숙한 하회탈 같은 히죽웃음이 떠오르자 인터뷰 자리의 긴장감은 말끔히 사라졌다. 음악 얘기를 많이 하고 싶다는 청에 유난히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요즘 송창식은 1990년대 포크가수의 부활 아지트가 된 미사리 소재 ‘록시’라는 이름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며 관객들과 만난다. ‘송창식이 노래 부르는 곳’이란 간판이 말해주듯 카페가 지어질 때부터 실내장식, 무대, 조명 장비에 자신이 관여했다고 귀띔한다. 주위가 어스름해지는 저녁무렵 이 카페의 옥상에 마련된 출연 가수들의 대기실에마주앉자, 그의 표정은 ‘모든 질문에 답할 준비가 돼있다’는 듯 넉넉하고 여유에 넘쳤다. 미처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그가 먼저 자신의 인생역정, 음악에 대한 접근법과 시각, 남에게는 별종이라 할 라이프스타일 등을 주섬주섬 꺼내 들려주기 시작했다.

    -조금 바빠 보입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매년 열 차례 정도의 공연을 합니다. 그 공연 개런티로도 충분히 음악하고 생활할 수 있으니까요.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고 기(氣)와 관련된 운동 때문에도 더 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올해는 추석 전후에만 11회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왜 일이 갑자기 몰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월드컵 효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웃음).”

    그의 답변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그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나이가 들어 활동을 중단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대부분 세월과 함께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은둔’ 아니면 ‘칩거’가 그의 이미지로 굳어진 진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더러 동료 가수들과 함께 공연과 음반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평범한 대중 입장에서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가 동참한 앨범에 손이 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지속적인 활동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이렇듯 둔감하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 가요계가 현실을 좇느라 지나간 과거에 너무 인색한 때문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한번도 내 앨범에 만족 못했다”

    왜 그가 1987년 ‘참새의 하루’를 끝으로 독집 앨범을 내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신세대 가수에게 몰려있는 음반 회사들이 상업적으로 한물간 그를 외면한다는 소문을 접한 적이 있다. 그의 침묵은 대한민국 가요시장에 대한 환멸 때문일까.

    -이런저런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독집 음반으로만 따지면 무려 15년간 공백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음반이 음악가의 중요한 호흡무대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직도 송창식의 앨범을 찾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많은 곡을 써놓았다는 말도 들은 바 있습니다. 일각의 얘기처럼 음반회사에서 앨범 출반을 주저하는 건가요.

    “누가 그러던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음반을 내겠다고 결심하면 음반을 내주겠다는 레코드사는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까지 써놓은 곡도 1000곡쯤 될 거고.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한창 때 무려 20장이나 되는 음반을 내놓았지만 솔직히 그때마다 단 한번도 앨범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항상 부족하고 불만스러웠지요. 하지만 대중의 요구나 음반사의 행정을 고려해서 그냥 내곤 했던 겁니다.

    지금도 내 곡에 만족스럽지 않은 건 마찬가지죠. 음반 발매를 위해 곡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자리하면 아득하고 혼미스럽기만 해요. 인기나 판매량과 같은 이윤동기는 이제 내게 의미가 없어요. 만약 내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장 앨범 출반이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써놓았던 곡들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새로 쓸 겁니다.”

    결코 쉽게 흘려 들을 말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대중은 쉬 받아들이지 못할 언급이다. 그와 비슷한 연령대인 가요계 선배들의 경우 앨범을 내고자 해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이 역시 언제나 ‘내 멋대로의 삶’을 구가해온 송창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주변인들이나 많은 가요계 사람들이 송창식씨에게 기인이란 표현을 들먹입니다. 스스로 남과 비교할 때 기이한 사람이라고 여긴 적이 있습니까. 또 오래전부터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지요.

    “보편적인 눈으로 보면 제가 기인이 되겠지요. 하지만 난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기인이 아닌데 내가 하는 행위나 표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으니까 그렇게들 부르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보편적인 잣대로 볼 경우 나를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친한 사람들도 다 기인이 될 겁니다. 조영남도 기인이고, 윤형주도 기인이죠.”

    그는 먼저 자신이 1947년 인천 태생으로 해방 후 우리의 여건이 가장 나빴던 시절에 자라났다는 점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953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지만 전쟁 통에 1년 늦은 1954년에야 학교에 들어갔고, 그 훨씬 전인 다섯살 어린 나이에 경찰관이었던 부친은 전사했으며 아홉 살에는 행상을 다녔던 어머니가 가출해 사실상 그는 고아로 컸다.

    불우했지만 놀거리도, 특별한 낙도 없었던 시절이라는 점이 도리어 소수의 뛰어난 학생들에게 강한 성취동기를 자극해, 자신의 또래들 가운데는 한가지에 흥미를 붙이면 놀라운 재주를 발휘한 사람, 말하자면 기인이 많았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그러면서 자신이 만약 기인이라면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설가 최인호, 김홍신, 시인 김지하, 가수 조영남 등을 그 또래의 예로 들면서 그 사람들이야말로 한국문화에 획을 그은 재주꾼들이라고 덧붙인다.

    송창식에게 그 재주는 물론 음악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여 노래에 취미를 붙이자마자 ‘노래와 악보와의 관계’를 금세 파악해 1년 만에 작곡을 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재능이 특별한 나머지 인천중학교 재학 때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스스로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중3 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도 잘해 늘 엘리트 그룹에 속했지만 인생목표를 음악으로 정한 그는 제물포고를 가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한 채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한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겨우 이어가긴 했으나 지독한 가난으로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유급통지서를 받아 그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야 만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것은 ‘음악도 공부하는 것, 다시 말해 지성적인 연구로 이뤄지는 것이 음악’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음악관련 외국서적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사춘기를 보낸다. 덕분에 얻은 전리품은 영어와 독일어, 일어 해독 능력. 그가 나중에 트윈폴리오를 통해 팝송을 능란하게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이 시절 노력의 결과였다.

    -데뷔 무대가 서울 무교동의 유명한 음악감상실 ‘세시봉’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시봉은 대학생들의 전당이었는데 어떻게 고교 중퇴자가 출연하게 된 건가요. 또한 데뷔할 때 팝송 천지였던 그곳에서 왜 하필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불렀는지도 궁금합니다.

    “고교동창이 홍익대 미대로 진학해서 나도 덩달아 홍대에서 살다시피했어요. 수업도 듣고 교정잔디에서 매일 기타를 퉁겼으니까요. 그러다가 세시봉의 MC로 활약했던 홍대 공예과 2학년 이상벽이 출연을 섭외해 얼떨결에 ‘홍대 대표’로 출연하게 된 거예요. 나한테는 인생의 커다란 전기였지요. 거기서 연세대에 다니고 있던 윤형주와 이익근을 만나 ‘세시봉트리오’를 만들었거든요. 얼마 되지 않아 이익근이 입대하는 바람에 1968년 2월1일 윤형주와 둘이서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오페라를 한 것은 클래식밖에 몰랐기 때문이죠. 멋있다고 생각해서 클래식 기타를 이미 배운 상태였고 명색이 성악과 출신이라 오페라 아리아쯤은 능히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제게 클래식이 전부였어요.”

    -그럼 팝송으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뭡니까. 클래식 음악을 하던 사람이 대중음악 분야로 관심을 돌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대중음악이 출세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 아닌가요.

    “성공하려는 욕심 이전에 포크라는 외국 팝송에 흠뻑 빠졌어요. 윤형주가 부르는 팝에 큰 충격을 받았고, ‘와! 대중음악도 장난이 아니구나’하고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은 ‘배운 대로’ 해야 하는 클래식과 달리 대중음악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가요계는 트로트 아니면 약간은 변형된 서구 팝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통기타 포크는 그것과 달랐지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 상상만 해도 얼마나 흥분되고 즐거운 일입니까? 전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점이라면 대놓고 끌려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트윈폴리오 앨범에는 창작곡이 하나도 없고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축제의 노래’ 등 모두 번안곡들입니다. 아까 얘기대로 따르면 작곡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왜 자작곡을 수록하지 않았나요. 혹자는 ‘가수는 노래만 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가 자기 곡을 썼던 한대수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작곡을 시작했다고 분석합니다만.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충분히 작곡을 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아직 틀을 잡지 못했을 뿐이었죠. 내 눈으로 볼 때 완성되지 않았던 겁니다. 1970년 솔로로 독립해 창작곡 ‘창밖에 비오고요’를 발표했는데, 그것도 욕 먹지 않을 정도의 곡이어서 앨범에 한번 실은 거예요. 솔직히 그 곡이나 ‘딩동댕 지난 여름’은 가사와 멜로디가 딱 달라붙지 않았어요. 다만 팬들이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해 발표한 거지요.

    한대수 음악은 결코 내가 지향하는 패턴이 아니었습니다. 난 보브 딜런 류의 사실적 포크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그런 식의 포크 가수들이 내는 목소리는 흥미가 없었어요. 난 가수가 노래를 하려면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엄청난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한대수가 출현한 뒤 자극 받아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 전환하게 됐다는 말은 전적으로 틀린 얘기예요. 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렇지, 난 이미 곡 쓰는 데 자신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곡 쓰기나 노래 부르기라는 점에서 한두 차례의 진통과 굴곡을 겪기 마련입니다. 송창식씨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고요. 실제로 트윈폴리오 시절과 솔로로서 전성기 때의 송창식씨의 노래는 판이한 양상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하얀 손수건’과 ‘한번쯤’은 목소리부터가 전혀 이질적입니다. 곡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도 갈수록 점점 변화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음악가로서 그 무렵 도약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제가 1973년 병무청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제 음악을 찬찬히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나를 보게 된 거죠. 그랬더니 내가 만든 음악이 너무나도 형편없게 느껴졌습니다. 노래만 따지더라도 ‘아마추어 국악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여학생보다 내 노래가 못하더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정말로 창피했고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괴감에 군 복무 3개월 내내 눈물로 지샜어요.

    제대한 후 작심하고 내 음악체계 모든 것을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음계, 소리, 화성학 체계를 위시해 음악 전반을 다시 연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음악’, ‘한국인 송창식, 내 속의 것’을 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지요.

    그러고 난 뒤 발표한 곡이 바로 ‘피리 부는 사나이’였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의 ‘어~언제나’ 부분은 특이한 음정이 구사됐는데 나의 그런 연구를 실제로 적용한 겁니다. 이후 실험적인 소절을 대중반응의 추이를 보고 점차 늘려나갔어요.”



    인터뷰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 음악 얘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송창식 하면 결부될 만한 대중적 관심사로 얘기를 돌렸다. 민감한 질문을 연이어 던졌지만 그는 단 한차례의 머뭇거림이나 숙고 없이 일사천리로 응답했다. 먼저 필생의 동반자이자 껄끄러운 사이로 알려진 윤형주에 관해 물었다.

    -윤형주씨와는 트윈폴리오를 통해 천상의 화음을 들려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스타일이나 사회적 삶의 방식이 전혀 달라 보입니다. 트윈폴리오에 대한 팬들의 줄기찬 재결합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각각의 길을 달려간 것도 사실이구요. 지금은 관계가 어떻습니까.

    “윤형주와 내가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삶의 접근법도 차이가 났지만 내가 트윈폴리오를 멀리했던 것은 음악적인 이유였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솔로 이후 상당한 음악적 변화를 겪었어요. 가창부터가 달라졌지요. 그러나 대중은 트윈폴리오에 대해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예전의 음악을 원했고 윤형주는 미성(美聲)의 패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죠.

    이미 음악적으로 다른 길을 밟아간 내 입장에서 그와 화음이 양껏 맞을 리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나 트윈폴리오를 재결성했지만 그 차이로 인해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솔로로 열심히 음악을 했지만 대중들은 저와 트윈폴리오를 함께 기억하고, 때로 트윈폴리오를 나보다 더 기억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곧바로 다시 갈라서게 된 거죠. 근래 포크 빅3 공연 등 수차례 같이 노래하고 있듯 일반의 선입견과 달리 인간적인 트러블은 거의 없습니다.”

    -송창식은 서슬 퍼런 유신시대의 대마초 파동을 딛고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로 기록됩니다. 단 한 가수도 살아남지 못한 전체주의적 압박의 ‘서바이벌 게임’을 어떻게 탈출한 겁니까. 그래서 당시 어쩔 수 없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대한 죄의식이랄까, 어떤 일말의 회한이 없었나요.

    “맹세코 전 대마초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동료 뮤지션들이 설령 피울 때도 난 빠졌고 도리어 그들에게 ‘언젠가는 큰 일 터질지도 모른다. 하지 않는 게 좋다’며 충고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1975년 가수왕이 된 뒤 가수 정훈희와 동거설이 퍼졌고 대마초 혐의를 받은 정훈희와 덩달아 묶여서 수사대상에 오르게 됐습니다.

    취조를 받는 가운데 자연스레 동료 이름을 거명하게 됐고 윤형주에 대해 묻길래 ‘그 친구는 대마초 하지 않았을 거다’라고 답하는 와중에 저절로 주소를 알려준 꼴이 됐어요. 취조기술에 내가 말려든 겁니다. 더욱이 나중에 알았지만 취조실에는 신문사 기자가 있었어요. 다음날 기사를 통해 나는 졸지에 동료 가수들에 대해 불어버린 밀고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수들은 나만 보면 눈을 부릅뜨곤 했지요. ‘망할 놈’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때의 황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대마초 파동의 험한 파도를 넘긴 그는 1978년 완구공장 창고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대뜸 빌려줘, 이제는 전설이 된 노동가 ‘공장의 불빛’을 탄생시킨 일화로 다시 한번 인구에 회자된다. 송창식은 김민기와 많은 작품을 공작하지는 않았지만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 노래의 ‘내나라 내겨레’는 최고수들끼리의 환상적 합작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작업실을 내준 것이 과연 동료에 대한 연분이었는지, 아니면 대마초 파동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죄책감에 의한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1978년이면 유신체제의 억압이 극에 달한 시절인데 가뜩이나 불온한 인물로 지목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내준 것은 당시 분위기를 전제하면 상상할 수 없는 용단으로 비쳐집니다. 아무리 동료가수라고 해도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습니까. 나중에 밝혀지면 공범(?)이 되는 것 아닙니까.

    “난 아무 생각 없었어요. 원효로에 내 연습실이 있었는데 김민기가 녹음을 하겠다고 하길래 선뜻 빌려준 겁니다. 뭐 때문에 두려움을 느낍니까? 난 그 시대를 전혀 위기라고 인식하지 않았고 내가 본래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 일이 용기고 뭐고 할 것도 없지요.”

    -기념비적인 곡이라 할 ‘왜 불러’나 ‘고래사냥’과 같은 곡은 금지곡으로 묶였지만 오히려 대학생들에게는 마치 유신시대에 대한 저항의 찬가로 애창되었습니다. 송창식씨의 우렁찬 외침에서 반항의 힘을 체감했는지도 모릅니다. 3공과 유신이라는 압제의 시대를 호흡하며 살아갔던 입장에서 막상 저항가요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그 노래들은 내 소리를 낸 것이지 시대와 대치하는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항성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냥 그때의 내 음악이었을 따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저항가요에 약간은 부정적입니다. 김민기 얘기를 다시 해볼까요. 전 그가 등장했을 때 ‘와 큰 별이 떴구나!’했습니다. 브람스 수준의 천재라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그가 나중에 저항적으로 변화했을 때 안타까웠습니다.

    음악가는 음악이 우선입니다. 사고와 고민 그리고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그 모든 것을 음악이란 그릇에 용해시켜야 합니다. 저항운동을 위해 음악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위험하죠. 내 곡 중에 김민기가 쓴 ‘강변에서’가 있는데, 김민기 곡이라 그런 건지 운동권에서 많이 불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전 몇 년간 일부러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송창식씨의 음악을 들으면 여러 음악적 세례 가운데 트로트의 과정도 밟은 것 같아 보입니다. 1978년엔가 TV에서 ‘나그네 설움’을 감칠맛나게 불렀던 걸 본 기억이 나거든요. ‘상아의 노래’를 위시해 실제 트로트도 불러 음반에 수록했습니다. 포크나 국악쪽 음악가들은 트로트를 상당히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왜 트로트를 무시합니까? 전 트로트도 많이 불렀고 트로트가수인 김연자씨에게 ‘당신은’이나 ‘안돼’ 같은 곡을 주기도 했어요. 내 노래 가운데 ‘토함산’ 같은 곡은 사실 트로트를 만들겠다고 만든 곡이에요. ‘피리 부는 사나이’도 그렇고요. 단지 ‘트로트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시범의 의미를 담았을 따름입니다.

    음악은 다 똑같은 겁니다. 자전거의 따르릉 소리부터 바흐까지 다 같아요. 트로트가 단순히 반복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음악적 표현입니다. 단지 트로트가 경시되는 이유는 가수들이 음악 외적(外的)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이겠지요.”

    향군법 위반 혐의로 1977년 한해를 쉰 송창식은 고교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인 한성숙씨와 결혼하고 이듬해인 1978년 회심작 ‘토함산’을 내놓는다. 이전의 작품과는 사뭇 기조가 다른 이 앨범을 계기로 그는 음악생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국악과의 접목’으로 숨가쁘게 내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1980년 ‘가나다라’와 ‘에이야홍 술래잡이’, 1982년 ‘마의태자’ 같은 현대 가요사의 유산이라 할 만한 값진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 자신 음악적 진화의 절정을 굴삭해낸 것이다. 그 무렵 그는 가사를 쓸 때도 말로 쓰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쓴 뒤 그 의성어들과 비슷한 언어를 찾아 노랫말을 짰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국악에 심취했을 때의 음악적 관점은 지금의 신세대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다.

    “우리 음악은 서양음악과는 모든 게 달라요. 그들 음악은 수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해 음이 분류되어 7음계 형식으로 정착되었어요. 상당히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음은 수학이나 철학이 아닌 우리 몸에 내재된 힘이나 영혼의 개념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에 잘 안 맞는 서양음악의 방법을 덧씌우면 제대로 될 리 만무하지요.

    일례로 외국의 유명 지휘자가 한국 연주자나 성악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다 훌륭한데 기본이라 할 음정과 박자가 안 맞는다’고 토를 답니다. 당연하죠. 생래적 음의 표현방식이 다른데 어찌 그들과 같겠어요?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 단지 다른 것뿐인 겁니다. 이것은 애초 우리가 서양으로부터 음악을 잘못 받아들여 잘못 알고있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고유의, 전통의 음을 찾는 것은 의당 제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두고 197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에 맞섰다고 평가하는 것, 시대성과 사회적 맥락을 결부시키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로운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송창식 본인은 언제나 음악의 근원을 면밀히 탐구해나간 ‘순수음악가’라는 것이 정확할 듯했다. 소리와 음악에 대해 장광설을 피울 때의 모습에선 마치 도인의 경지를 느끼게 했고, 또 그만큼 어렵게 들렸다. 의미를 따라잡는 데도 진땀이 났다.

    -송창식씨의 음악은 듣기는 쉬운데 막상 부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후배들이 리메이크를 많이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독특함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내 음악이 독특하다고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애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 소리를 살펴 찬찬히 풀어놓은 것일 뿐이니까요.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하게 된 것이겠죠. 그러니까 제 음악이 그때 사람들에게 새로웠을 겁니다. 전에는 그런 노력이 없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대중들이 좋아하게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은 ‘운’이었을 겁니다. 시대적으로 맞았던 것도 운이고. 하기야 ‘우리나라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곡은 없었어요. 내 음악에 대해 만족할 수 없지만 그래서 대중적으로는 괜찮았을 거예요.”

    그는 “나는 어떤 후배들에게도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후배들은 “음악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성공만을 본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1978년 데뷔한 정태춘, 비슷한 길을 밟아간 김수철, 그리고 지금도 음악적 도약을 위해 국악을 기웃거리는 신세대 뮤지션 등 그의 사정권에 들만한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도 거명하지 않았다.

    송창식에게서 음악적 완성이나 포만감이란 있을 수 없는 듯했다. 앨범을 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설령 목표에 근접한 음악을 구상했어도 혼연일체로 소리를 내줄 연주자가 없어서 앨범의 실현가능성은 없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듯 여전히 음악의 심연을 향해 파고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어쩌면 음악을 통해 구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부나 명예, 유행, 시대의 요청 같은 음악 외적인 것들은 창공에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하잘 데 없는 것들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면서 그는 피곤해하기는커녕 도리어 처음보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카페로 내려오자 그를 알아본 손님들의 사인공세가 쇄도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요!” “요즘에 들으니까 더 후련해요!” 비틀스의 고(故) 존 레논이 노래 속에서 그랬던가.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와 같이 가게 되리라고.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한국에도 이 정도 크기의 음악세계를 가진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은 기억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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