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부끄럽냐구요? 배부른 소리죠”

홍익대 관리장 김주한씨

  •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2-10-06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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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냐구요? 배부른 소리죠”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 흰 바탕에 푸른 색 한반도 모양이 그려진 한반도기, 어지럽게 나붙은 각종 현수막들, 바닥에 붙여놓은 포스터들…. 한총련 의장이 재학중이기 때문일까. 굵고 짧은 단음절의 구호 소리만 없을 뿐, 홍익대 정문 풍경은 여전히 1980년대 학생운동의 열정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게다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정문 앞 광장을 어슬렁거리는 마포경찰서 정보과 형사까지 맞닥뜨리고 나니, 풍경은 더욱 ‘과거지향적’이다.

    그러나 교문 밖을 채운 풍경은 영 딴판이다. 아방가르드에 포스트모던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옷차림, 총천연색의 거리 모습, 화려하고 세련된 ‘물 좋은’ 카페며 술집들. 유행과 패션의 첨단을 가로지른다는 ‘질주하는 젊음의 거리 홍대 앞’은 2002년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교문을 경계로 적잖은 시차가 있는 이 두 공간을 31년 동안 지켜봐왔다는 이 학교의 관리장 김주한씨가 이 달의 주인공. 그러나 나이 예순을 바라보는 수위라는 프로필만으로 그를 상상했던 필자의 머릿 속 이미지는 사정없이 어긋났다. 허리가 어느 정도 휜 듯하고 얼굴은 고구마처럼 시골스럽지만 한편으론 우직함이 뚝뚝 묻어나는 고정관념 속의 수위 아저씨 캐릭터와는 영 달랐다. 김주한씨는 한마디로 세련되고 단아한 모습의 빈틈없는 공무원 스타일이었다. 손에 가방만 하나 든다면 영락없이 교수로 보일 만큼 깨끗한 풍모다.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순간의 망설임이 필자를 스쳤지만 ‘어디 외모가 중요하랴, 중요한 것은 사연이지’하고 되뇌며 마음을 다잡는다. 한두 마디 건네다보니 깐깐한 외모와는 달리 풋풋하고 소박한 시선이 내비친다. 게다가 김씨의 아들도 아버지의 길을 밟아 수위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수위 2대 가족인 셈. 자식만은 이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지만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쯤 되면 놓칠 수 없는 취재 대상임에 분명하다.

    가난 때문에 시작한 천직



    정문 앞 수위실은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책 외판원에 길을 묻는 사람까지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람을 안내하느라 잠시도 여유가 없었다. 산만한 자리를 피해 이공관의 수위실 안쪽에 혹처럼 붙어있는 숙직실로 옮겼다.

    -도무지 수위로 보이지 않는 인상이어서 조금 실망했습니다. 상당히 깐깐해 보이시는데 실제로도 그렇습니까.

    나름대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이 없다. 별 시시껄렁한 질문을 다 한다는 뜻일까. 순간 흐르는 침묵이 어색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니 왼쪽 광대뼈 쪽에 난 큰 흉터가 눈에 들어온다.

    -왼쪽 뺨의 흉터는 어떻게 해서 생겼나요.

    “이 흉터요?”

    그제서야 김씨가 입을 열고 말을 잇는다.

    “초등학교 때 생긴 겁니다. 고향이 강원도 양양인데 어성전 초등학교를 다녔지요. 학교가 집에서 15리가 넘는 먼 거리에 있어서 등하교에 한시간 반이나 걸렸어요. 어린애들이 산길을 타고 학교를 다니다보니, 바위를 넘기도 하고 길 없는 비탈을 쏘다니기도 했지요. 그러다 바위에서 굴러떨어져 얼굴이 깨진 것이지요. 그때만해도 어려운 시절이어서 병원은 물론 약 바를 생각도 못했어요.”

    -수위를 직업으로 삼게 된 것도 역시 가난 때문이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수위라고 하지 않고 관리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당연히 제 직책은 수위장이 아니라 관리장이고요. 이 학교에서는 31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그보다 3년 전에(1970년) 수도공대에서 수위생활을 시작했어요. 수위로서는 제가 최고참일 겁니다.”

    -스스로 원해서 수위 일을 시작하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저 오갈 데가 없어서 시작한 것이 천직이 됐죠. 그래도 학교를 지키면서 아이들 키우고, 집 장만하고, 자가용(쏘나타)까지 샀으니 그만하면 됐지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나마 제가 직업에 충실했던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의 선친은 면사무소의 임시직 말단 공무원이었다. 농토라도 있었다면 먹고 사는 것이 나았겠지만 그의 아버지에게는 손수건만한 조각땅 하나 없었다. 아이들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것이 일과다 보니, 면서기로는 도저히 식솔을 거느릴 수 없다고 판단했던 아버지는 어느날 시장 바닥에 참빗, 실꾸러미, 러닝셔츠 등을 늘어놓고 잡화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경험이 없는 아버지는 밑천만 날리고 가족은 더 짙은 가난에 휩싸였다는 것이 김씨의 회상이다. 더구나 그의 나이 12세 때 어머니를 잃고 나자 삶은 더욱 가혹해졌다.

    전재산 1100원 갖고 무작정 상경

    곧 이어 새어머니를 맞았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모가 3남, 계모가 1남2녀를 낳아 모두 6남매나 되는 자식들은 매일 밥 한끼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산나물에 밀가루를 넣어 쑨 죽을 두 차례 먹으면 사치였다. 장남이자 한창 먹을 나이였던 김씨에게 배고픔의 고통은 더욱 컸다.

    “집안의 험한 노동은 전부 내 몫이었지만 먹을 것은 갓난애나 저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어요. 정말 원 없이 한번 먹고 죽는 게 소원이었어요. 남의 무밭깨나 드나들었지요. 배고프니 도리가 없었거든요.

    생모가 돌아가신 것도 가난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산에서 봄나물을 캐다가 죽을 쒔는데 그중에 독초가 들어있었던 거죠. 출산 직후라 죽을 가장 많이 드신 어머니는 쓰러져 며칠째 신음만 하시다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나 저도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렸고, 철없는 동생들은 배가 아프다고 방바닥을 기었죠. 어머니는 죄책감 때문에 아프다는 말 한마디 변변히 못하고 참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요즘은 수위하는 직원들 연령이 높지요.

    “비교적 높지요. 우리 학교는 아니지만, 얼마 전에 기업체에서 이사를 하던 사람이 수위로 일한다거나 군에서 대령까지 지낸 사람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학교 미화원들은 대개 50대 이상으로 연령층이 높지만 그중에는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도 적지 않아요. 수위 중에는 대졸 출신도 있지요. 모두들 현역에서 정년퇴직하고 오신 분들이라 자세가 당당하지요.”

    -연배가 높은 사람들이 부하직원으로 들어오면 아무래도 부담이 될 텐데요. 그 중에는 지휘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도 생길 테고요. 자리배치나 일 배분을 할 때 그런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제가 젊었을 때 당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한번은 학교가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직속 상관이 물청소를 시키더군요. 지금 해봐야 그다지 청소가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더니, ‘이 자식 건방지다’며 유배지 격이었던 과학관 후문으로 쫓아버리는 거예요. 물청소를 거부하다 물을 제대로 먹은 셈이죠.

    처음에는 정말 유배라도 온 듯 울화통이 치밀더군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요. 과학관은 평소에도 사람이 적은 데다 방학 때는 거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시간 보내기가 무료했거든요. 원래는 그러면 안되지만 도서관에서 한두 권씩 책을 빌려 읽다보니 공부가 되더라고요.”

    날아가버린 ‘고가 그림’

    이때 그는 한국소설전집을 독파했고, 세계문학전집을 대부분 마스터했다. 중국 소설들도 엄청나게 읽었다. 새벽까지 책을 들여다보니 동료들은 ‘저 사람이 한번 물을 먹더니 대학을 가려나 보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는 것.

    “그렇게 한 2년 들입다 책을 읽었어요. 저도 2년제 대학은 나온 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죠.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니까요. 결국은 좋게 끝난 셈이지만 그래도 그때 느낀 울분은 꽤 깊었거든요. 그 일을 거울 삼아 관리장이 된 후에도 부하들이 하찮은 일로 불이익을 당해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들으면 수위라는 직업이 항상 고달프고 재미없는 일인 듯합니다.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물론 아니죠. 추석 명절 때 교수님들이 양말 세트를 선물로 주고 갈 때는 고맙지요. 특히 김창집 총장님을 잊을 수가 없네요. 언제나 먼저 인사를 건네시곤 했거든요. 명절 때면 직원들과 함께 먹으라고 케이크를 보내오셨죠.

    동양화과의 교수 한 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학생시절 너무 어렵게 학교를 다니며 혼자 남아 그림을 그리곤 하셨죠. 이 분이 젊은 조교시절 때 내가 제상에 펴놓을 병풍용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얼마 후 열두 폭 그림을 그려줍디다. 모두 전지 그림이었는데 들여다보니 이게 영 괴상망측해요. 산이 있고, 냇물이 있고, 그 사이에 한가하게 낚시질하는 선비가 있는 평범한 동양화가 아니라 귀신 나올 듯이 요란한 그림이더라고요.

    그래서 동료들에게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한 장씩 나눠줘 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양반이 유명한 화가가 되고 학교 교수가 된 거예요. 그림 값도 국내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한다더군요. 그렇다고 동료들에게 20년 전에 나눠준 그림을 회수할 수도 없어서 가슴만 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교수님은 저를 만나면 ‘내 병풍 잘 있느냐’고 물으시곤 합니다만, 그럴 때 쑥스럽고 미안하지요. 그분 입장에선 어려운 학창시절 여러가지로 배려해준 게 고마워서 두말없이 그림을 그려줬을 텐데 그렇게 성의없이 내팽개쳤으니 나도 생각이 모자랐지요. 돈도 돈이지만 인연에 값하지 못한 게 아쉽죠.”

    김씨는 요즘 취미 삼아 등산을 자주 다닌다. 아내와 함께 매주 일요일 새벽 국민대 뒷산을 넘어 북한산을 오르는 것. 등산을 하면서 그는 주로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곤 한다.

    “요즘 들어 부쩍 1970년대 학생들과 형님 동생으로 지냈던 일이 자주 떠오릅니다. 토큰도 빌려주고, 하숙집에서 쫓겨나 갈 곳 없어 하는 게 딱해 책이나 가방을 맡아주곤 했는데 그 학생들이 이제는 어엿하게 사회 구석구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랬던 친구들이 학교를 찾아올 때 마음 뿌듯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 저를 보고 놀라는 눈치더군요.

    우리 시대의 대표 소시민

    간혹 학창시절 말썽 피우던 학생이 선생님이 되어 제자들을 인솔해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는 모습도 봅니다. ‘쟤는 도무지 사람이 될 것 같지 않아’ 하며 혀를 끌끌 찼던 친구가 실기대회에 학생들 데리고 왔길래 맥주와 대구포를 나누어 먹으며 숙직실에서 회포를 푼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 함부로 평가할 일이 아니죠.”

    그는 내년이 정년이다. 퇴직금으로 곱창집이나 구멍가게를 차릴까 궁리도 해보지만 평생 동안 수위만 했던 이가 뜻대로 사업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한 노릇이란다. 아무래도 다른 경비 용역회사에 나가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들 하잖아요. 일흔 살까지는 현역으로 뛸 자신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요. 수위에게는 체력보다 경험과 지혜가 더 중요한 거니까요.”

    그는 스스로 인기 있는 관리장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젠가 할 일이라면 지금 하고 누군가 할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한다며 솔선수범했지만, 늘 직원들을 독려하는 그의 스타일은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한 직장에서 수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남의 욕 안 먹기 위해 애쓰고 직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남의 것 공으로 얻으려 하지말고 노력해서 자기 분수대로 살자, 그런 겁니다. 이렇게 평범한 얘기에 뭐 쓸거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대표 소시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법한 홍익대 관리장 김주한씨와의 인터뷰 자리는 그렇게 정리됐다. 역시 사람이 지나치게 꼼꼼한 것일까. 심각한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혹 학교에 누를 끼칠 만한 얘기나 지나친 표현이 있으면 잘 녹여 써달라는 것. 처음에는 당부였던 것이 점점 부탁이 되더니 결국 나중에는 흡사 지시 비슷한 주문이 되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 역시 평범한 소시민 샐러리맨의 한 특징인 것을. 우리 모두 김씨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을.

    지금 생각에는 그때 병원을 갔더라면 살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병원에 갈 돈이 없기도 했지만, 그냥 그렇게 버티다 살아나면 좋고 죽으면 또 그만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게 자연스럽던 시절이었어요.”

    어머니가 독초에 중독되어 누워있던 어느날 어린 김씨는 밤늦게 불을 켜다 등잔을 엎었다. 등잔에 든 석유가 방바닥에 흘러 불이 확 붙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꿈결처럼 말했다.

    “우리도 언제 저 불꽃처럼 살림이 확 피어날까.”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남긴 채 어머니는 다음날 숨을 거뒀다. 초등학교 4학년 소년에게는 견디기 쉽지않은 경험이었다. 새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간신히 중학교(양양중)에 진학했지만 학교 공부보다 동생들 업어 키우기, 산에서 땔감 준비해오기 등이 주일과였다. 김씨보다 열두 살이 많았던,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더욱 엄하기만 했던 새어머니 밑에서 생활하는 것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중3 때 중간고사를 보는데 선생님이 시험을 못 치르게 하는 겁니다. 밀린 두 학기분 수업료를 내야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거예요. 집에서 돈이 나온다면 왜 그때까지 수업료를 안 냈겠습니까. 자꾸 미적거리니까 이번에는 교실 앞에 나와 손을 들고 서있으라며 벌을 주는 거예요.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는데, 여학생들 보는 앞에서 그러고 있으려니 학교 다닐 마음이 싹 사라지더군요. 그렇게 비인간적인 교사가 있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모두 가난 때문이었지만, 해도 너무했다는 비애는 지워지지가 않네요.”

    목소리가 좋아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어린 소년은 등록금 150원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양이처럼 숨어서 학교에 다녔다. 늘 버림받은 듯 외로웠던 사춘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군대를 가니 정말 살 것 같더라고요. 제가 1945년생 해방둥이입니다만, 해방된 기분이 그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호사’는 역시 금세 지나가버리더군요.”

    제대하자마자 그는 지옥 같은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부모는 물론 동생들도 사는 것이 너무 비참했다. 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이제는 어른이라는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그는 1100원을 전재산 삼아 서울로 뛰어들었다. 이때가 1967년, 세상 무엇보다 가난이 문제였던 한 평범한 젊은이의 상경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차비와 몇 끼 식사를 해결하고 나니 돈은 곧 바닥났다. 막막한 절망감을 안고 서울바닥을 헤매다 우연히 영등포구 당산동의 어느 허름한 주물공장 앞에서 마주친 같은 연배 ‘공돌이’들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게 됐다. 그러나 쓸 수 있는 월급은 없었다. 공장 한구석에서 시커먼 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고, 세끼 식사도 공장에서 얻어먹으며 한 달 몇 백원의 월급은 그대로 주인에게 맡겼다. 돈을 벌겠다고 찾아온 서울 땅에서 힘겹게 받은 월급을 차마 찾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는 영세 공장 직공들의 처지가 다 그랬어요. 고생하는 시골의 부모님이나 동생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돈을 쓸 수가 없었던 거죠.”

    이 무렵 그가 의지하던 사람이 수도공대 관리과에 근무하던 고향의 친척 어른이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수도공대 관리과를 찾아갔다. 친척 어른이 숙직을 보는 날이면 함께 밤을 새며 말벗이 되기도 했다.

    “한밤중에 몇 시간씩 어르신 대신 자리를 지키기도 했지요. 그때 어르신이 ‘이 녀석이 일을 찬찬히 잘 하는구나’ 눈여겨보셨던 것 같습니다. 수위 자리가 하나 비니까 얼른 그 자리에 저를 넣어주셨죠.”

    이렇게 해서 그의 30년 천직이 시작됐다. 당산동 공장을 그만두면서 받은 월급 겸 퇴직금이 7만원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그날 벌어 그날 쓴 돈을 그제야 한꺼번에 받고 보니 비로소 저축한 보람이 있었다. 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 돈으로 마포구 염리동 대흥극장 골목에 6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었다.

    “정복에 금테 두른 수위 모자까지 차려 쓰고 정문 앞에 서있을 때는 학장님도 부럽지 않았어요. 멋들어지게 거수경례를 하는 것도 이만저만 재미있는 게 아니었고요. 제가 그래도 허우대는 멀쩡하잖아요. 제복을 입고 서있으면 누구도 촌놈으로 보지 않았죠.”

    월급도 2만원이 넘었다. 처음 월급 봉투를 받던 날 그는 한없이 울었다. ‘나도 이제는 서울특별시의 어엿한 월급쟁이 사나이’라는 기쁨에 ‘이제는 살 것 같다’는 안도가 겹쳐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수도공대는 한전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재정자립도가 높았죠. 그래서 월급도 다른 곳보다 많았습니다. 수당을 챙기기 위해 다른 동료들의 야간 당직까지 빼앗다시피 해서 대신 섰습니다.”

    직장이 생기자 애인도 생겼다.

    “대흥동 전셋집 주인 아주머니가 여동생을 저에게 소개해주는 거예요. 제가 괜찮아 보이셨던 모양이죠. 함께 극장에 다니다 정이 들어서 사귄 지 1년 만에 결혼했습니다.”

    서울에 적을 두고 있는 50~60대 중산층으로 청년시절 맨몸뚱이 하나 믿고 시골에서 상경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품고있을 법한 작은 성공담이다.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가난했고, 그렇게 죽어라 일했고, 그렇게 소박하게 사랑했다. 홍대 앞을 가득 메운 요즘 젊은이들은 알지 못하는, 별 관심도 없을 ‘그 때 그 시절’ 30년 전의 이야기다.

    -평생을 수위로 살아오셨는데 ‘수위로서의 직업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뭘까요.

    “그야 근무중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안보는 것이지요.”

    직업관 치고는 너무 단순하다. 다시 한번 고쳐 물었다.

    -명색이 직업관인데 그것뿐이라면 좀 시시하지 않습니까.

    “관이고 뭐고 없다는 겁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앞만 잘 보라는 것이지요. 쓸데없이 한눈을 팔아서는 좋은 수위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김선생님은 그렇게 해오셨나요.

    “물론 그렇지요. 저도 젊었을 때는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학생들하고 나란히 서있으면 제가 더 그럴듯해 보였어요. 그렇지만 저는 제가 수위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개 젊은 수위들은 학생들이 앉아있는 벤치 주변에서는 쓰레기 치우기를 꺼립니다. 창피하다는 거죠.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어떤 때는 학생들 다리를 옆으로 제치고 쓰레기를 줍기도 했어요. 뭐가 부끄럽습니까. 한마디로 배부른 소리들이지요.”

    -그래도 자존심은 상하지 않을까 싶네요.

    “수도공대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학생들 등교시간에 멋지게 차려 입고 정문을 지키고 있는데 교문 옆쪽에 쓰레기가 쌓여 있더라고요. 정신없이 치우며 뒷걸음질치다가 그만 맨홀에 빠져버렸어요. 공사하던 사람들이 맨홀 쓰레기를 밖에 쏟아놓고는 뚜껑도 닫지 않은 채 자리를 비웠던 거죠.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보다 깨끗하게 빨아 입은 제복이 뻘흙으로 엉망이 된 것이 훨씬 더 억울했어요. 지켜본 학생들이 깔깔대며 등교하는데 정말 참기 힘들었죠. 그래도 그게 내 일이고 그것으로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창피해 하면 안되지요.”

    그는 관리장이라는 직위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냉정할 따름이다. 간혹 주변에서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라는 것. 그렇지만 그는 “책임자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연히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경기도 능곡 집에서 아침 6시에 출근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늦어도 오전 7시까지는 학교에 도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건물 안전도에는 이상이 없는지, 혹 간밤에 화재나 도난사고는 없었는지, 버릴 물건이나 쌓인 쓰레기는 얼마나 되는지 직접 꼼꼼히 점검한다. 그날 다른 방으로 이사 가는 교수나 교직원이 있는지, 잔디밭이나 수목 전지작업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살피면서 일과 전 아침시간을 보내는 것이 몸에 익은 습관이다.

    “직원들한테 모든 일은 자기 집 일처럼 하라고 말하지요. 나는 우리집 어디에 물이 새는지는 몰라도, 학교 건물은 기왓장 하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직원을 재량껏 채용하고 자르려면 일에 철저해야 권위가 섭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선뜻 인정해주겠습니까.”

    바로 그 철저함 덕분에 일개 용원에서 수위장을 거쳐 이제는 145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관리장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니냐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언뜻 자부심이 어린다.

    -예전에는 대학 경비들이 경찰서나 안기부의 첩자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많이 들었죠. 학생들한테서도 듣고, 정보과 형사들한테서도 들었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우리를 절대 믿지 않아요. 가끔 그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이 격렬했던 시절에 더욱 그랬죠.”

    -실제로 그런 오해를 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나요.

    “정보과 형사들이나 안기부 요원들이 정문 수위실로 전화를 걸어옵니다. 학내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정문으로 쏟아져 나오면 ‘몇 명이 나오느냐, 주동자가 누구냐’고 묻지요. 우리가 시위 학생들 중 누가 주동자인지 잘 알고 있다는 걸 훤히 꿰뚫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그쪽에서 캐물어도 언제나결정적인 것은 빼고 꼭 필요한 것만 얘기해 줍니다.”

    -그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불신을 사거나 첩자라는 말을 듣는 것 아닙니까.

    “몇 명이 모였느냐, 어느 과 학생들이냐 같은 단순한 질문까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찌됐건 그쪽은 공무원들이니까요. 그런데도 학생들은 우리가 돈을 받고 정보를 팔아먹는다고 오해하곤 했어요. 우리가 누구 편이겠습니까. 학생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결정적인 것은 절대 가르쳐주지 않죠. 나중에 정보과 형사들이 다른 데서 정보를 알게 되면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며 우리를 족쳐요. 심지어는 얻어맞은 수위들도 있습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학생들에게 재빨리 피하라고 알려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학생들이 번번이 우리를 의심하는 게 답답할 뿐이죠.”

    -그렇게 구해준 학생이 있었습니까.

    “부지기수죠. 한번은 마포경찰서에서 총학생회장을 잡으러 왔어요. 어찌 됐든 우리 학생들이 다치면 안된다 싶어 엉뚱한 장소를 댔지요. 사실은 이공관 다락방에 숨어있지만 학생회관에 있을 거라는 식으로 정보를 흘려주고, 경찰들이 학교를 뒤지는 사이에 회장단을 도망가게 해줬습니다. 그 일로 여러 사람들한테 봉변을 당했어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비를 서는데 인정을 안해주니 답답할 수밖에요.

    시위가 격렬할 때는 정문 앞에 최루탄이 밀가루처럼 쏟아져요. 그중에서 불발탄도 여러 발 나오지요. 악에 받친 학생들이 그걸 주워 가지고 학교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최루탄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만져서 중간에 터져버리면 곤욕을 치르게 되죠.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잘못 다루면 더 다칠 수 있으니 우리에게 넘기라’고 말하곤 하죠. 내가 보관하겠다고 말이에요.

    그렇게 수십발 모아놓았다가 잘못 건드려서 며칠 동안 눈을 뜰 수조차 없이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눈물깨나 쏟았지요. 묘하게도 그렇게 눈물을 쏟다 보니 정말 나라의 운명이 걱정되더군요. 어쩌자고 젊은 학생들이 저 고생을 하는가, 왜 고통을 자청하며 시위 대열에 끼어드는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최루탄 가스를 핑계 삼아 마음속으로 울어본 적도 있습니다.”

    -시위가 한창이던 무렵에는 ‘학생 시위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는 등 시민생활에 불편이 많다’는 식의 기사가 나오고, 그래서 많은 시민들도 ‘학생들이 나쁘다’고 생각하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따뜻한 밥 먹고 좋은 옷 입고 무슨 지랄들이냐’고 비난했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저 순수한 젊은이들이 할 일 없어서 얻어맞고 눈물 흘리고 밤잠 안 자가며 선언문을 만들까 싶더군요. 지내놓고 보니 젊은이들이 옳았다고 반성한 적도 있었지요.”

    -그에 비하면 지금은 한가로울 듯합니다.

    “그럼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조용하죠. 우선 최루가스가 없으니 살 것 같아요. 10년 전만 해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물청소를 해야 그나마 눈을 뜰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고 학생들처럼 도망갈 수도 없고, 경찰들처럼 한바탕 내지르고는 빠져나갈 수도 없고, 우리만 고스란히 그 매운 최루가스를 마시며 세월을 견딘 셈이에요.”

    -요즘의 홍대 앞은 흔히 유행의 거리로 불립니다. 퍼포먼스도 있고, 낭만과 파격, 예술성이 넘치는 독특한 분위기의 동네라는 거죠. 이런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까.

    “변화가 느껴지죠. 교문 밖 거리를 내다보면 돈이 넘쳐 흐르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홍대는 디자인이나 미술 학과가 강한 학교잖아요. 그래서 다른 학교보다 학풍이 자유분방하다고 봅니다. 교문 밖이나 안이 언제나 예술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납니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이들이 대개 사고뭉치들이죠. 차림새나 외모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경계부터 하게 됩니다.”

    한밤 교정의 ‘풍속사범들’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뭐가 있을까요.

    “남자 여자 구분이 안 가는 게 가장 큰 변화 같아요. 똑같이 담배 피고 맥주 마시고 옷도 비슷하고, 그래서 도저히 분간이 안 갑니다. 또 하나는 도통 유행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1970년대는 미니스커트, 1980년대는 장발, 이렇게 구분이 됐는데 지금은 어떤 것이 진짜 유행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장발이 있는가 하면 민머리가 있고, 초미니 스커트가 있는가 하면 길바닥을 온통 쓸고 다닐 듯 긴 치마나 바지도 있고. 찢어진 바지, 심지어 노 팬티에 찢어진 청바지도 있다니까요.”

    -‘풍속 사범들’도 심심찮게 나오겠군요.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골목이나 강의실, 숲속에서 ‘요상한 짓’을 하는 젊은이들을 날이면 날마다 보게 되지요. 근데 조사해보면 상당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아니에요. 학교가 개방적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독 외부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어요. 대개 밤늦게 사고를 치지요.

    특히 봄 축제 때는 문이 잠기지 않은 강의실 벽에 착 붙어서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젊은이들을 종종 봅니다. 이런 때는 잠깐 기다려줍니다. 그래도 너무 시간을 끈다 싶으면 플래시로 강의실을 한바퀴 휘휘 비추지요. 그래도 끄떡없어요. 숲속에서 어떤 여자가 젊은 녀석들에게 성폭행당하는 것을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그 녀석들을 하나도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게 두고두고 후회스럽더군요.”

    한번 옛날 이야기 보따리가 풀려나오자 김씨의 무용담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 통금이 있을 때는 학교를 지키기가 참 좋았어요. 통금시간에 정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었는데, 통금이 없어진 이후에는 24시간 정문을 열어두고 들락거리는 학생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게 가장 큰 애로지요. 게다가 밤늦게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술에 진탕 취한 경우가 많습니다. 술을 못 이기고 교정 이곳저곳에 토해놓는 경우도 많지요. 이럴 때는 도리 없이 삼촌이나 할아버지가 된 마음으로 등도 토닥거려 주고 준비해둔 소화제나 술 깨는 약도 먹이곤 합니다.”

    -강의실에서 기숙하는 학생들도 많죠?

    “철야 신청서를 내면 강의실에서 밤새도록 작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부 돈 없는 지방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자는 경우도 있지요. 원칙대로 하자면야 묵과할 수 없지만, 제 소년시절, 청년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가 없어요. 돈이 없어 그런다는 걸 어쩌겠습니까. 또 이런 학생들은 대개 착해요. 그래서 불러서 라면도 가져가라고 하곤 합니다. 대신 교실에서 불을 피우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못하게 하지요.”

    -홍대 앞 거리 풍속도에서 느껴지는 변화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뭐니뭐니해도 가게마다 통유리가 많아 안이 환히 보인다는 거죠. 전에는 커피숍이나 제과점, 술집이 온통 밀폐된 곳들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벽 대신 유리를 쓰더군요. 젊은이들이 예전보다 훨씬 개방적이기 때문이겠죠. 한밤에 이상한 짓을 하다 들켜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일 없이 모두 당당해요. 특히 여학생들이 더 당당한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럴 때는 무슨 생각이 드세요.

    “세상이 변했구나 싶죠. 우리가 자랄 때는 상상도 못했던 행동을 대낮에도 거침없이 하니까요. 이제는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아직도 직접 목격하면 내가 먼저 낯이 뜨거워집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피숍이 개방적인 요즘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홍대 앞의 젊은이들은 당당하다는 말이었다.

    -정문 앞에는 현수막들이 요란하게 걸려있는데, 구호도 예전과는 달라졌지요?

    “예전에는 ‘군부독재 몰아내자’ ‘파쇼정권 타도하자’ 그런 구호가 많이 내걸렸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노동자·농민 생존권 보장하라’는 현수막이 많았어요. ‘미군놈 몰아내자’는 구호는 1990년대 말부터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미군 탱크에 깔려죽은 여중생 살려내라’는 현수막과 한반도기를 바탕으로 ‘조국은 하나다’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더군요.”

    -그런 구호들을 매일 접하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을 듯합니다만.

    “때로는 ‘또 배부른 짓거리들을 하고 있구나’ 싶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솔직히 귀찮지요. 정문에서부터 학생회관 입구까지 길바닥에 도배질해놓은 포스터를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고요. 특히 요즘처럼 비가 많이 오는 철에는 오전에 붙여두면 오후에는 어김없이 빗물에 젖어요. 그위로 차가 지나가면 포스터들이 온통 떡이 되죠. 무겁기는 좀 무겁습니까. 치우는 사람 생각해서 이런 짓은 좀 안했으면 싶은데, 그렇다고 심하게 욕할 수도 없고….”

    -다시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수위 생활로 아이들도 키우고 집도 장만하셨는데 이제는 살만해졌습니까.

    “물론이죠. 고향에서 그냥 눌러 살았다면 이런 집을 구했겠습니까. 모두 서울을 30여 년 지켜온 덕이다 싶지요. 수도공대가 홍익대와 통합되면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게 1971년 10월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임시 용원이었지만, 6개월후인 1972년 5월에 정식 직원이 됐지요. 그래서 지난 5월에 만 30년 근속상을 받았습니다. 수도공대 수위시절 2만원이었던 월급은 홍대로 옮겨오면서 절반 이상 깎였어요. 그래도 그때는 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웠지요.

    결혼하면서 집도 늘려갔지요. 처음 얻었던 6만원짜리 방을 벗어나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라도 제대로 붙어있는 집을 구해보자 마음먹고는 창전동에 10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집에서 자그마치 10년을 살았습니다. 큰아이인 딸(미리·30)과 아들(유철·27)을 그 전셋방에서 얻었지요. 매년 전세금을 올려주다 보니 10년째인 1982년에는 전세금이 220만원이 되어 있더군요. 방은 똑같은데 매년 전세금을 올려주니 월급이 고스란히 전세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저축이 뭐 다른 게 아닙디다. 원금은 보증금으로 남고 이자는 주거비로 나간 셈치니까 그게 저축이지 별거 있나요.”

    아이들이 자라 덩치가 커지자 방 한 칸으로 버티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고, 학교에서 알선해주는 은행융자를 받아 창전동 시민아파트를 600만원에 샀다. 그게 그 유명한 와우아파트다. 김현옥 서울시장 시절, 부실 공사로 지어진 아파트 한 동이 와르르 무너져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던 끔찍한 아파트. 누구나 기피하던 그 아파트의 무너진 건물 건너편 동이 그의 집이었다. 다시 5년이 지나 3000만원을 주고 산 연립주택에서 이번에는 16년을 살았다. 실컷 살다보니 값도 배가 뛰어 6000만원이었다. 물론 강남에 살았다면 그보다 몇 곱절로 값이 올랐을 테지만 그걸 한탄해본 적은 없다.

    -김선생보다 성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도 단지 강남에 집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큰 부자가 되곤 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울화가 치밀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다. 강남 개발 시대였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계약금 50만원만 있으면 다음날 배로 뻥튀겨 돈을 벌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청 직원 한 명만 알아도 개발정보를 입수해 싼 값에 땅을 사서는, 불과 몇 달 만에 두세 배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적잖이 회자되곤 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일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학교 정문 앞만 뚫어져라 지켜보며 살아왔다. 한눈 팔기는 그의 적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대문구에서만 내리 30년을 살았습니다만, 그나마 잘 살아낸 것이 대견할 따름이지요. 강원도 산골에서 맨몸으로 서울에 와 번듯한 내 집을 구하고 아이들도 교육시켰으니 그 이상의 만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얼마 전에 정든 집을 팔아 경기도 능곡에 32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했다. 1억5000만원.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이다. 이곳에 살면서 그는 흡사 황제가 된 기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에서 잠시 얘기했듯, 아들 김유철씨는 강남의 어느 자동차 서비스센터에서 근무를 하다 뛰쳐나와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동대문에 있는 한 대형 쇼핑몰에서 경비가 주업무인 관리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남의 일은 도저히 못하겠다며 동대문 쇼핑몰에 점포를 하나 얻더군요. 그렇지만 해보지 않은 장사가 쉽게 되겠습니까. 결국 그만두고 경비업체에 들어가더군요.”

    처음에 그는 아들이 경비일을 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멱살을 잡고 끌어낼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다.

    “사실 경비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단순히 남들한테 대접 받는 직업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상가를 지키려면 얼마나 많은 사고를 당합니까. 저만 해도 숙직을 보던 날 연구실에 도둑이 들어 컴퓨터 칩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대로 목이 달아나니까 몰래 전자상가에 가서 새것을 사다놓고 모른 체했지요. 돈 날아가고 마음 썩이고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도둑을 지킨다는 게 어디 간단한 일입니까.”

    -그래도 요즘 기업체 경비는 상당히 전문화돼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김선생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안 그래요. 모멸감을 받는 경우가 한두 번이라야죠.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적 비애를 느낀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한테 오해를 받거나 형사들한테 협박당하는 건 둘째 쳐도, 교수들로부터 하대받을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어떤 교수들은 거수 경례를 해도 인사를 받지 않습니다. 다음날 똑같이 경례를 해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반드시 경례를 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무시하고 지나치거든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량을 점검하다 지체 높은 분한테 호통을 당하는 경우는 또 어떻고요. 그런 사람들이 내뱉는 모멸에 찬 언사들을 듣고 있으려면 정말 내가 이 직업을 계속해야 하나 싶어집니다. 나는 그렇다 치지만 내 자식까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더군요. 한번은 ‘너 이 녀석 계속 경비한다고 하면 죽인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 일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결국 아들은 제 길을 갔고, 이제 부자는 근무 시간이 맞지 않아 일주일 내내 얼굴 한번 마주치기도 힘들다. 가끔 새벽 무렵 핼쓱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바라보는 김씨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아이는 점포 월세도 다룬다고 합디다. 점포 전체를 모두 관리하는 거지요. 아무리 현대식 컴퓨터 시스템으로 관리한다 해도, 그런 직업일수록 사람이 다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요즘은 늘 나보다 아들 놈 안위가 걱정입니다. 녀석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지나쳐버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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