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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취재

‘주먹’은 가고 ‘돈’이 말한다.

‘야인시대’ 건달세계의 달라진 풍속도

  • 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주먹’은 가고 ‘돈’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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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역’ 주먹 7인의 증언, ”조직간 전쟁 시대는 끝났다”
  • ●거침없는 서울의 30대 보스들, 정기모임 갖고 사업정보 교환
  • ●최초공개 주먹계 최강 모임 우정회의 실체
  • ●정권 실세 둘러싼 호남주머계 실력자들
‘주먹’은 가고 ‘돈’이 말한다.

10월10일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이정재 추모행사에 참석한 원로주먹들.

10 월10일 오전 11시. 경기도 이천 설봉산 기슭에 있는 한 묘지에 100여 명의 사내가 모여들었다. 이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50∼60대가 주축을 이룬 가운데 지팡이를 짚은 은발의 70대 노인이 있는가 하면 한창 기운 좋을 나이의 20∼30대 청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서열’ 순으로 무덤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술 한 잔씩을 들었다. 이들에게 절을 받은 고인은 5·16 직후 대표적 정치깡패로 낙인찍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왕년의 주먹 이정재. 이 날 행사는 이정재의 사망 41주기 추도식이었다. 일반인들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이정재의 추도식에 전례 없이 주먹들이 잔뜩 참석한 데는 최근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TV 드라마 ‘야인시대’의 영향도 있었다.

이정재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이 날 모임을 계기로 이정재 명예회복 운동에 나설 예정이다. 아울러 당분간 유보하긴 했지만, 주먹계에서 최고의 ‘악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범죄단체구성에 관한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을 낼 계획까지 갖고 있다.

이날 모임을 주도한 이는 ‘야인시대’의 주인공 김두한의 후계자인 조일환씨(65). 충남 온양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조씨는 1970년대 전국구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지금도 주먹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주먹계에서 ‘우국지사’로도 불리는 조씨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에 항의하는 뜻으로 부하 110명을 이끌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단지(斷指)의식을 감행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8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에 항거해 독립문 앞에서 단지의식을 치른 25명의 ‘구국결사대’(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폭력조직 송악파의 일원이다)도 조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정재 추도식엔 조씨말고도 몇몇 유명한 주먹이 참석했다. 조씨의 선배로, ‘오따’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정종원씨(70), ‘낙화유수’ 김태련씨(68) 등이 그들이다. 두 사람 모두 한 시절을 풍미한 원로 주먹으로 주먹계에서 대선배로 대접받고 있다.

그밖에 이천 주먹계의 대부인 김상○씨도 눈길을 끌었다. 김씨는 이정재에 버금가는 정치주먹으로 일본 야쿠자와도 친분이 깊었던 유지광의 후계자. 이 지역에서 300명의 건달을 동원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실력자다.

“전쟁 벌이면 함께 죽는다”

조일환씨를 비롯한 이들 ‘왕년의 주먹’들은 현 주먹계 세태를 개탄한다. 한마디로 의리는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실력 좋은’ 주먹이라도 돈이 없으면 후배 주먹들한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의리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시금석으로 여기던 건달세계의 질서와 풍류는 사라진 지 오래고 요즘의 젊은 주먹들은 돈의 향방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요즘 주먹들을 만나 주먹계 실태에 대해 물을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바로 “돈 있으면 보스”라는 것이다. 수사기관 시각도 일치한다. 검찰에서 손꼽히는 조폭 전문가인 대검 강력과장 김홍일 검사는 “돈 되는 곳, 특히 쉽게 돈 버는 곳에 깡패가 있다는 사실은 조폭수사의 기본”이라며 “자금을 동원하는 힘을 잃으면 두목으로서 입지를 상실한다”고 진단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조직간 다툼이 크게 줄었다는 점이다. 한국 조직폭력 실태에 관한 책을 낼 정도로 조폭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안흥진 경위(서울 송파경찰서)는 “‘범죄와의 전쟁’ 이후 예전과 달리 조직끼리 싸우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경제성장에 따라 조폭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영역이 넓어져 예전처럼 목숨 걸고 싸울 일이 없다. 혹시 이권 다툼이 생겨도 몇 사람만 보내 해결하지 조직 전체가 동원되는 싸움은 피한다”고 분석했다. 조일환씨는 “요즘 조직들의 평균 조직원 수는 20∼30명이다. 더 많아봐야 수사기관 눈에 띌 뿐 도움이 안 된다”며 “조직간 전쟁이 없는 것은 싸우면 함께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찰 통계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노태우 정부가 전개한 ‘범죄와의 전쟁’으로 구속된 조폭은 274개파 1421명에 이른다. 웬만한 조직의 두목이나 주요 간부는 이때 다 구속됐다. 이들이 장기간 감옥에 갇혀 있다보니 상당수 조직이 와해되거나 내부 갈등으로 분열됐다.

5년형 안팎의 비교적 짧은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이들도 수사기관의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감시망에 걸려 재차 구속되는 일이 흔하다. ‘한번 주먹은 영원한 주먹’이고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신조를 갖고 있는 강력부 검사들은 출소한 주먹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무렵 다시 잡아넣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때론 실적을 위해 무리하게 구속하기도 한다.

주먹계 주변을 살펴보면 검거될 때는 온갖 혐의로 요란했다가 법정에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가벼운 형에 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먹계에서는 ‘표적수사’라며, 또는 “주먹에게도 인권이 있다”며 반발하지만,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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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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