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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던 통장 사본, 마약 조직 붕괴시키다

사상최대 히로뽕 거래조직 검거 비화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잠자던 통장 사본, 마약 조직 붕괴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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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마약수사부 누구도 계좌추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특수부나 강력부에서는 계좌추적을 빈번하게 하지만 마약수사부에는 이 ‘복잡한 수사기법’을 처리할 인력이 없었다. 지난 연말 김진모 검사가 확보해둔 11개의 통장사본이 책상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김포공항 분실에서 근무하던 윤재권 계장이 마약수사부로 발령받은 것은 지난 2월. 강력부에서 근무하면서 계좌추적을 해본 경험이 있는 윤계장이 온 것은 마약수사부에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11개의 통장사본이 윤계장에게 건네졌다. 하나 둘 계좌를 훑어가던 윤계장은 이들 통장에서 돈이 이체된 새로운 계좌 몇몇에서 거금이 오간 흔적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더 이상 잔챙이들의 푼돈 거래가 아니었다. 급히 계좌추적을 전담할 인력 두 명이 보강되어 서울지검 별관 마약수사본부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윤계장에게도 마약수사 계좌추적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우선 작업의 성격 자체가 강력부 시절과는 판이했다. 한 계좌에서 다른 계좌로 뭉칫돈이 오간 흔적만 잡아내면 끝나는 조직폭력사건 계좌추적과는 달리 마약수사 계좌는 수상한 거래를 모두 훑는 저인망식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의심이 가는 계좌에 대해 영장을 발부받아 은행마다 팩스를 보내 거래 명세를 확인하고, 그 거래 명세에서 이상한 징후가 발견되면 다시 영장을 발부받아 또 은행마다 팩스를 보내는 식이었다. 계좌 하나를 새로 열 때마다 확인해야 할 거래 명세가 수십, 수백 건으로 불어났다.

계좌추적에 착수한 지 두 달이 지난 4월 무렵, 드디어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뻗어나간 계좌들의 현금흐름 속에서 한 밀매조직의 윤곽이 잡힌 것. 이미 검거된 히로뽕 소매책이 그중 한 계좌를 통해 도매책에게 자금을 입금한 흔적이었다. 이 도매책에서 흘러나간 자금의 흐름을 쫓다 보니 다른 도매책들과 국내공급책이 딸려 나왔다. 계좌추적을 통해 한 조직 전체의 ‘그림’이 그려진 셈이었다.

수사팀이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급파됐다. 국내공급책의 집에서 히로뽕 5.1kg이 발견됐다. 히로뽕 1회 투약분이 0.03g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외풍이 심해 봄에도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마약수사반 사무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대형거래 흔적이 속속 떠올랐다. 마약 조직들이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온라인으로 돈을 받고 오토바이 택배나 고속버스 송달편을 이용해 물건을 보내는 방식은 거래 범위에서 기존 방식과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위협적이었다. 예전 방식으로는 마약거래가 일부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온라인-택배’ 방식은 전국 어느 곳으로나 물건을 보낼 수 있었다. 이 방법이 확산되면 마약유통이 전국으로 번져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마약조직들의 관계가 이전보다 긴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왼손 오른손’ 방식이 ‘불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새 방식은 철저한 ‘신뢰’를 근거로 하고 있었다.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이들끼리 휴대전화 한 통화와 계좌번호 한 줄을 믿고 거래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대한민국 전체 밀매 조직이 하나의 거대한 신디케이트를 형성해가는 징후였다.

4월17일 서울지검 마약수사부가 계좌추적팀을 신설해 본격적으로 작업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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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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