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한반도에 전쟁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남북 체제간 대립적 요인이 제거되는 것이 급선무다. 현재 남한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구현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수령제를 고수하고 있다. 남북간 체제대립의 핵심이다.
민주주의와 수령제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융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현 상태에서 이와 같은 대립요인을 제거하려면 남한이 북한의 수령제로 가든가, 북한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남한 4700만 국민들 중에서 북한의 수령제로 통일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남한의 통일론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든, 3단계 통일방안이든 북한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실현되는 것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북한에 어떤 경로를 통해 뿌리내릴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현 중국식 정치 경제 체제의 과도기를 거치는 경로와 북한에 남한의 체제가 도입되는 경로를 상정할 수 있다. 통일문제는 민족문제이자 국제문제니만큼 어떤 경로가 더 나을지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도기를 거치든, 안 거치든 먼저 북한의 수령제가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개악된 수령제
구 소련은 스탈린 이후, 중국은 모택동 이후 수령제가 없어졌다. 북한에는 스탈린식 수령제에서 더 개악된 ‘수령절대주의’가 엄존한다. 북한의 ‘수령절대주의’와 전쟁 가능성은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대북정책의 방향은 명료해진다. 한반도에 전쟁 요인을 완전히 없애고 북한체제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수령독재’라는 꼭지를 먼저 따주는 것이다. 즉 햇볕정책이든, 봉쇄정책이든 수령독재의 꼭지를 따내는 데 대북정책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김정일 정권이 스스로 수령독재를 걷어내고 등소평 체제나 또는 더 진보된 민주체제로 나아갈 수 없다는 데 있다. 역사상 자기가 만든 독재체제를 제 손으로 걷어낸 독재자는 없다. 독재체제는 내부의 모순이 커지거나 외부의 힘이 작용하는 경우, 또는 두 가지가 혼합된 경우 외에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정일 정권 이후의 북한체제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를 상정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대비책이 우선돼야 한다. 그 다음 전략적으로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현재 북한이 처한 대내외 환경을 고려해볼 때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김정일 정권이 변화의 일단을 보이고 있다.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7·1 경제조치, 신의주 특구지정 등은 획기적인 시도임이 틀림없다.
북한 변화는 곧 기회
1995∼98년은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무려 300만 명이 굶어죽고, 수많은 탈북자들이 발생했다. 남한으로서는 통일로 가는 장정(長程)에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할 수 있는 호기였다. 하지만 남한은 그 시기를 놓쳤다. 위기에 처했던 김정일 정권은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포용정책과 남한의 햇볕정책 덕분에 간신히 파산을 면하고 일정 수준 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또 달라졌다. 1995∼98년을 거치면서 북한주민들은 ‘장군님’만 믿고 있다가는 굶어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것이다. 미미하지만 분명한 의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다소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이는 실로 ‘50년 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변화된 의식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의식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북한 군(軍)의 물질적 기반이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되고 있는 점도 변화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군 병력자원부터 문제다. 요즘 신병입대 대상자들은 1995∼98년 대량 아사 시기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이 덜 된 세대다. 따라서 군 병력 충원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정권이 군 병력 2만∼5만명을 감축할 것이라는 최근의 외신 보도도 이와 관련해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정일 정권이 자진해서 군 병력을 감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충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놓은 일종의 ‘고육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식량 위기를 겪으면서 군인들이 민간인들의 식량을 약탈하는, 이른바 군의 ‘토비화(土匪化)’로 민·군 관계가 벌어졌다고 한다.
김정일 정권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원천은 군이다. 군사력 약화는 김정일 체제전환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김정일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지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 변화를 촉진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북한 전역에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달러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당간부는 당당하게, 안전부는 안전하게, 보위부는 보란 듯이 빼먹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낡은 우스개다. 만연한 부패는 인체에 비유하면 심각한 내과질환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 즉 달러의 ‘효용가치’가 결정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여기에 9·11 테러 이후 완전히 달라진 세계 안보환경이 김정일 정권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김정일 정권이 남한에 먼저 회담을 제의해온 빈도를 테러 이전과 테러 이후로 나눠 비교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달라진 안보환경은 80년대 우리 경제에 찾아온 ‘삼저(三低)현상’에 버금가는 호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을 확실히 이용해야 한다. 이 호기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는 기회를 놓친 자는 처벌한다’는 경구를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