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199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치과의사 엄씨와 복지부 산하 재단법인인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이하 장기기증본부)는 ‘사랑의 뼈은행’을 공동설립했다. 장기기증본부는 장기기증이 주업무 였지만 사후 시신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이후 장기기증본부엔 연평균 100여구의 시신이 기증된다. 국내 최초의 조직은행을 꿈꾸던 엄씨에겐 너무도 매력적인 파트너로 비쳤다. 조직은행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장기기증본부로서도 조직은행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피부·인대 같은 조직과 달리 뼈는 구하기 쉽고 보관도 쉬워 임상연구 및 현장 적용이 한결 빨리 진행된다. 1993년 미국 조직은행에서 관리자격증을 딴 엄씨는 한국이 인체조직 이식의 미개척지임을 알고 그 상업적 잠재성에 주목했다.
우선 시신의 안정적 확보가 필요했다. 당시 장기기증본부는 장기 기증운동을 선도했는데 엄씨는 뼈 등 인체조직도 장기기증본부처럼 체계를 갖춘 조직은행이란 시스템 아래서 안전하게 관리돼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홍보했다.
엄씨는 스폰서를 찾는 일도 추진했다. 장기기증본부의 명성은 큰 힘이 되었지만, 조직은행 설립은 기본적으로 설비투자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다. 담배인삼공사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10억원은 외환위기로 무산됐다. 그래서 대형병원을 포함한 범의료계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아쉬울 게 없는 대형병원들은 일개 치과의사와 손잡고 조직은행을 만드는 일에 회의적이었다.
이때 도움을 준 곳이 인천의 길병원. 장기기증본부와 친분도 있고, 조직은행의 필요성에도 공감한 길병원은 3억원을 투자해 장기기증본부와 함께 ‘한국조직은행’을 설립했다. 1999년 6월이었다.
벤처자금 동원, 수익사업 꾀해
그러나 시신 조달은 장기기증본부가, 자금과 의학적 자문은 길병원이, 실질 운영은 엄씨가 맡는 ‘한 지붕 세 가족’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면서 조직은행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게 됐다.
‘한 지붕 세 가족’은 한국조직은행이란 거창한 명칭이 공익성을 높이고 국내 조직은행의 주도권을 잡는 데도 유용하고 돈벌이 기회까지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하루 아침에 상황이 좋아질 리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분열이 시작됐다.
바이오산업 투자 열풍이 한창이던 2000년 5월, 의료기기 수입회사인 H사가 엄씨에게 10억원 투자를 제의해왔다. 파격적 지원이었다. H사는 인조피부 ‘알로돔’을 수입해 돈을 많이 번 업체. 인체 피부가 돈이 된다고 간파한 H사는 엄씨가 확보한 시신에서 뼈는 엄씨가 가공하고 피부는 자신들이 가공해 팔면 충분한 사업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H사는 중간 규모의 인체조직 가공회사였지만, 바이오벤처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순식간에 돈이 몰렸다.
엄씨는 공식적으론 H사 연구실장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론 한국조직은행과 H사를 오가며 조직은행에 기증된 시신을 가공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업이 본격화되기도 전 H사와 엄씨 간에 갈등이 싹텄다.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H사에 수십억원대의 투자금이 몰리고 액면가의 10배로 뛰어오른 발행주식에 대한 지분확보 싸움이 소송으로 번지면서 양측은 결별했다. 엄씨와 장기기증본부의 관계도 정리됐다. 실질적인 운영주체인 엄씨가 모든 인력과 시신을 H사 연구실로 이전하다시피하면서 한국조직은행도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엄씨와 H사는 한국조직은행의 인체조직을 훔쳐다 판 꼴이 됐다. 시신의 소유권을 놓고 한국조직은행 설립에 참여한 길병원측과 엄씨는 서로 상대방을 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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