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혁당 재건위 사건’재판광경(위)과 피의자들에게 가한 ‘통닭구이 고문’(아래)
우선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망각 속에 묻혀있었던 이유와 그 메커니즘, 관련자들에게 가해진 고문의 실상과 그로 인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나아가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입은 상처를 살펴보고, 당시 사법부가 채택했던 증거들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그 증거는 무엇인지 또한 제시해 보겠다.
마지막으로는 이 사건을 기획한 집단과 이 기획에 근거해 실제로 조직사건으로 만들어낸 집단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부딪혔던 장벽 등에 대해 때로는 사실적 근거를, 때로는 느낀 바를 서술하려 한다.
발표는 있었으나 실체는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잘못된 기억과 고정관념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한가지는, 사건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가급적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인민’이나 ‘혁명’ 같은 단어들이 갖는 고정관념에서 비켜서달라는 것이다.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리며 27년 전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보자.
기억 1. 1964년 8월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부장은 1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다. 그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했으며 이들은 데모 주도학생을 포섭하여 -(중략)- 지령하는 동시 현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학생 데모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에 따라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을 목표로 암약해왔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4년 8월14일 기사 참조).
기억 2. 1974년 4월25일과 5월27일 두 차례에 걸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등이 개입되어 있으며 - (중략) - 이들은 공산비밀지하 조직을 결성하여 학생 데모를 조종하여 폭동을 야기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74년 4월25일, 5월27일 기사 참조).
1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었지만 발표 내용은 매우 흡사하다. 직급은 달라졌지만 핵심인물인 신직수씨(전 중정 부장)와 이용택씨(전 중정 6국장)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두 발표가 ‘진실’이란 이름으로 통용된 기간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의 유통기한은 8개월에 불과했지만 후자는 27년이나 되었다.
1차 인혁당사건 발표 시점에 박정권은 정치적으로 위기상황에 몰려 있었다. 1964년 봄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갓 출범한 박정희 정권의 안보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6월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대량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바로 2개월 후에 ‘기억 1’의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는 달리 당시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은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결과적으로 사건 자체가 기소할 수 있는 사안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기소를 포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담당이었던 이용훈 부장검사 등 공안검사들과 이 사건 담당 변호사들의 진술 그리고 판결문은 1차 인혁당 사건을 적발했다는 당시 중정의 발표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 발표가 정권 안보를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은 중정의 압력에 굴복하여, 수사에 전혀 참여하지도 않았던 당직검사에게 기소를 지시했다. 이에 반발해 이용훈 부장검사와 장원찬 검사, 김병리 검사 등 담당검사 4명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며 결국 사정이 있던 한 사람을 제외한 세 사람이 사표를 제출했다. 재판과정에서도 ‘인혁당’이라는 조직의 실체는 부정됐다. 인혁당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한 적도 없다는 것이 사법부의 판단이다.
인혁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10년 뒤 ‘인혁당의 재건’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국방부에서 제출받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은 관련자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라기보다는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말해주는 웅변이나 진배없었다.
우선 경찰과 중정이 압수한 품목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인혁당’은커녕 조직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수사기록을 시간 순서에 따라 분석하면서 우리는 수사관들이 사건 초기에는 이 사건을 ‘조직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 대다수는 신문 지상에 이 사건이 대서특필된 후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기의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정 발표와는 달리 세칭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증거도 전혀 없었다. 물증이 없다면 사전 내사를 통해 혐의자들이 북한과 접촉하거나 아니면 학생세력과 연대하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지하 비밀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내부적인 혐의를 갖고 수사에 착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당시 수사관들에 따르면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 1974년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수사관들 중에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수사관은 없다.
그렇다면 사전 내사도 없었고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중정의 발표와 같이 조직원이 수십 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비밀 지하당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올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당연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위원회의 조사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