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월 미 국무장관은 레이건 행정부에서부터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국가안보보좌관(1987∼89년), 합참의장(1989∼93년)을 지낸 인물이다. ‘PBS Frontline’과의 인터뷰에서 파월은 9·11테러 뒤 이라크를 공격목표로 설정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미 행정부 내에서 벌어진 토론에 대해 언급했다. 아울러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장군을 포섭하기 위해 그에게 부채 탕감을 약속했음을 밝혔다.
2001년 9월11일 아침, 파월 미 국무장관은 페루 리마에서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과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미-페루 양국 무역관련 현안과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 헌장에 서구식 민주주의 조항을 삽입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파월의 증언.
“톨레도 대통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 비서가 쪽지를 전해줬다. 비행기 한 대가 세계무역센터에 부딪쳤고 두번째 비행기가 부딪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톨레도 대통령에게도 같은 내용의 쪽지가 전달됐다. 우리 두 사람은 앞서의 논의들을 이어가려 했으나, 다시 두번째 쪽지가 전해졌다. 그걸 읽고 테러라는 걸 깨달았다. 조찬회동은 깨졌고, 나는 비서에게 ‘바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을 잡아라’고 지시했다.”
파월이 페루를 떠나 워싱턴에 닿기까지는 8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안에서는 전화통화도 잘 안돼 답답했다. 국무부 부장관 아미티지와 두어 번 짧은 통화를 하다 끊어졌을 뿐이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했다. 나는 한때 미 합참의장이었지만 지금은 미 국무장관이지 합참의장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외교가가 아닌 군사전문가의 시각에서 사태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끔찍한 위기상황에 미국은 어떤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워싱턴에 닿은 파월은 곧바로 백악관으로 갔다. 그곳 상황실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 그의 핵심참모들과 마주앉았다. 파월의 증언.
“나는 9·11테러가 우리 미국에 전세계적인 연합전선을 이룰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안보리가 곧 소집될 것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회원국이 공격을 당했을 경우 상호방위를 규정한 5조항을 적용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9·11테러의 용의자인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간에 있다는 사실에 바탕해 파키스탄이 중요한 구실을 맡게 될 것이란 얘기도 나눴다.”
캠프 데이비드 모임의 결론
나흘 뒤인 9월15일 부시 미 대통령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그의 핵심참모들을 소집했다. 테이블 중앙에 부시가 앉고 그를 사이에 두고 체니 부통령, 파월 국무장관이 앉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파월 옆에 앉았다. 파월의 증언.
“캠프 데이비드 모임의 목적은 미국이 정치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처음 몇시간은 각자가 준비해온 아이디어를 브리핑했고, 부시 대통령이 이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자유토론이 이어졌다. 이 회의가 열리기 전 우리는 이미 영국·파키스탄을 비롯한 주요국들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정치적 연합이지만, 곧 군사적 연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회의 참가자들은 이런 국제연합이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동적(fluid)인 연합이란 측면을 깨닫고 있었다.”
캠프 데이비드 모임에서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이라크를 공격목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파월은 반론을 폈다. 이와 관련한 파월의 증언.
“당시 나는 이미 드러난 범죄자들에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아프간에 있고 탈레반의 지원을 받는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이다. 물론 이라크도 위험한 체제지만 당장은 이라크를 다루지 말자, 알 카에다를 쫓아야 전세계가 미국을 납득할 수 있다는 내 주장에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월포위츠 부장관이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그의 요점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면 지금이 좋은 때 아니냐’는 것이었고, 우리 모두 그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내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 공격도 고려할 수 있다는 중간적인 입장이었다. 이어 체니 부통령, 조지 테닛 CIA 국장 등의 견해를 듣고난 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간에 숨어있는 가해자들을 먼저 처리한 뒤 이라크 문제를 다루자’고 결론을 냈다.”
전쟁 초반 지지부진에 백악관 초조
한달 뒤인 2001년 10월 중순 파월은 파키스탄을 방문, 무샤라프 장군(대통령)과 마주앉았다. 10월7일 아프간 공습이 시작되고 1주일 뒤였다. 당시 무샤라프 장군은 아프간전쟁으로 인한 파키스탄 내의 정세불안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한 파월의 증언.
“당시 상황은 무샤라프 장군에겐 큰 모험이었다. 파키스탄의 정치적 불안으로 수출입 계약들이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무샤라프 장군은 아주 현명하게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외국인 투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수출입도 잘 돌아가야 한다. 무역상황이 호전되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도와달라. 파키스탄은 대외채무를 많이 지고 있다. 이 짐을 덜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어야 한다’ 파키스탄 체류중 무샤라프 장군은 나를 만날 때마다 채무 삭감을 화제로 꺼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잘 알았다고요(I’ve got it, I’ve got it). 그 문제는 내 이마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부채 삭감’이라고 말입니다. 내 마누라조차도 내 이마에 그렇게 적힌 걸 알아볼 정도인 걸요’.”
군 장성 출신답게 두 사람은 탈레반에 맞서는 아프간 북부동맹의 군사적 활용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무샤라프 장군은 타지크족, 우즈베크족이 중심이 된 북부동맹이 카불을 접수할 경우 아프간 다수족인 파슈툰족이 소외되고 또다른 정치불안이 일어날 거라고 걱정했다. 파월의 증언.
“우리는 아프간전쟁에서 북부동맹군을 활용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나는 여러 정치적 불안요소를 감안해, 북부동맹군은 파슈툰족이 다수인 카불에 입성해서는 안되며 카불에 다민족(multi-ethnic)을 대표하는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무샤라프 장군에게 거듭 확인해주었다.”
10·7 공습이 시작된 뒤 10월 한달간은 믿었던 북부동맹의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전쟁은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탈레반 정권은 여전히 건재했다. 백악관은 초조해졌다. 당시 분위기를 파월은 이렇게 전한다.
“우리도 힘든 나날을 보냈다. 국민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가 빨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인내심을 잃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그렇듯 비판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아프간 북부도시로 진격해 탈레반의 거점인 마자르이샤리프를 점령하고, 동시에 북부동맹으로 하여금 쇼말리 평원을 가로질러 카불을 점령해야 하는데 왜 지지부진하냐고 말했다. 당시 우리는 날마다 백악관에 모여 회의를 거듭한 끝에 먼저 한 군데를 집중공격해 점령하고, 다음 단계를 밟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뒤 사태는 우리가 결정한 대로 돼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