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우리의 동양학계는 공자를 경세가(經世家)로서가 아니라 유교의 성자로만 해석하고 있다. 유교를 믿었던 우리 선조들뿐 아니라, 종교로 믿지는 않지만 오늘날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공자는 불자의 석가처럼, 기독교인의 예수처럼, 도인의 노자처럼 위대하고 신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유교를 유일하고 영원한 국교로 믿은 선조들의 업적에 가위눌려 있기에 비판은 고사하고 이단으로 배척받을까봐 감히 선조들과 다른 해석은 내놓지도 못했다. 설령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다 해도 옥편에 수록된 한문 글자까지도 선인들의 해석을 반영한 뜻풀이로 확장 변형된 상태니 공자의 원형을 복원한다거나 새로 해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런 형편에서 도올이 새로운 해석을 했다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설교인가 학문인가
그래서 도올이 ‘논어’를 강의한다기에 단단히 마음먹고 청강생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역시 내 인내심으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도올의 강의는 학문이 아니라 설교였다.
설교란 다 마찬가지지만 교주가 살았고 고민하고 깨달았던 몇 천년 전 그 시대와는 상관없이 교주의 말은 시공을 초월해 진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 필요에 따라 변형 확대해석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 교주의 말은 신의 말이니 성서의 글은 그 당시에 국한된 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늘날 살아있는 교주의 말이 되어야 한다. 바로 설교자가 교주와 접신하여 오늘 살아있는 교주의 말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문에 구애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신들린 말일 뿐 냉정한 학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는 역사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므로 독자와 청중은 학문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얻어야 하며, 이로써 교주를 찬양하고 나아가 설교자를 교주의 대리로 믿고 따르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성소를 나오는 신도들이 무엇을 깨달아서는 안 되며 오직 할렐루야! 오! 아멘! 하도록 흥분시켜야 하며 가능하면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설교는 참으로 유용한 것이다. 삶에도 유용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학문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필자는 도올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최근에 필자는 ‘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 시리즈를 출간한 후 도올과 비교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고 부득이 ‘도올논어’를 사서 읽었다.
필자는 참으로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것은 도저히, 학문은 고사하고 설교도 아니며 새로 지어낸 ‘공상만화’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논어’ 해석이 유교라고 하는 종교적 경전 해석과는 다르다는 점, 봉건성을 걷어내고 21세기에도 유용한 담론으로 새 옷을 입혔다는 점, 그리고 위대한 철학이며 위대한 인생론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만 그가 말하는 공자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공자가 아니라 도올이 만들어낸 가짜 공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논어 해석은 여전히 공자를 성자로 인정하고 논어를 인류 불변의 도덕교과서로 읽는 점에서는 유교의 열렬한 신자들이 취한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