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도 통신보안을 위해 대(對) 도청 보안측정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기업이 증가하고, 365일 상시도청 감시장비를 설치하는 추세다. 보안점검중 도청장치를 찾아줬더니 “사실 이건 상대방이 왔을 때 그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우리가 설치한 것”이라고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말하는 고객마저 있을 만큼, 그간 도청과 관련해 많은 의식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대형빌딩 통신실의 주요전화 단자함가운데는 누군가 엿들을 수 없도록 봉인 스티커로 도배한 곳도 적지 않다. 전신주에서 전화선로 보수작업만 하고 있어도 ‘혹시 우리 집 전화를?’하고 의심하는가 하면, 인근 주차장에서 사람이 타고 있는 차량을 보아도 혹시나 싶어 그냥 넘길 수 없는 게 오늘의 세태다.
이처럼 불신은 극에 달해 있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에까지 미니카메라가 장착돼 원하는 모든 것을 즉석촬영해 무선전송할 수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전자계산기, 벽에 걸린 액자뿐 아니라 휴대전화까지 다시 봐야 할 지경이다.
O양, B양이란 이름의 비디오테이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화장실 가기 무서워 여성들이 미니 ‘몰카 탐지기’를 갖고 다니는 게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도청과 몰카의 위협에 묻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의 ‘도청 공포’가 마치 ‘도청 문화’처럼 뒤바뀌면서 시작된 시대적 산물은 아닐까. 더 나아가 ‘도청 신드롬’까지 생겨 대화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눈에 띌 때는 도청이란 것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하위문화로 자리잡았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서울은 ‘스파이 천국’
한번은 모 수사기관에서 도청 실태 파악도 하고 곧 있을 대대적 단속을 위한 준비를 한다며 협조를 요청해왔다. 물론 특정사건을 해결하는 차원은 아니고, 그저 도청전파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춰 서울 시내를 한번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대체 얼마만큼 도청행위가 자행되고 있기에 도청관련 사고가 끝이 없느냐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오전 10시 여의도 사무실에서 출발해 마포, 신촌, 남대문을 거쳐 강남으로 이동했는데 놀랍게도 그때 포착된 도청신호가 10여 개를 웃돌았다. 도청이란 것이 필요할 때 이뤄지고, 전화의 경우 통화중에만 전파가 발사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수였다. 그중엔 통화내용, 실내의 대화, 팩스 송수신신호까지 실로 다양하게 포함돼 있었는데 당시 수사관들이 용기백배했음은 물론이다.
올해 국정감사 당시 경찰청장이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답변에서 전국적으로 1400여 사설업자들이 도청을 자행한다고 보고했을 정도니 서울하늘이 도청전파로 어지러울 만도 하다.
더 큰 문제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산업스파이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고스란히 국부 유출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국가경쟁력 상실이라는 엄청난 손실로 이어진다.
흔히 ‘서울은 스파이 천국’이라고 한다. 이 불명예스런 명칭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쓴 게 아니고 외신이 처음 붙인 것이다. 그만큼 서울엔 고급정보가 많고, 한편으론 스파이들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갖췄다는 뜻도 되는데, 남북 대치상황에 따른 특수성(이번에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한 것을 보라!)에다 미국·일본·러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한국 주재 외국 대사관들이 치외법권지대임을 최대한 활용해 외교업무 외에 산업스파이의 거점이 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한다.
최근 또 다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 휴대전화 도청 논란이 제기되었다. 2년 전 국정감사 당시 미국의 모 업체가 휴대전화 도청장비를 개발했다는 논란이 벌어진 이후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의혹이 다시 증폭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