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 일선에서 물러난 3세대 정치지도자들. 주룽지 총리, 장쩌민 국가주석, 리펑 전인대 상무위원장(왼쪽부터). 그러나 장주석은 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절반의 은퇴에 그쳤다.
불운한 사람은 자빠져도 코가 깨지나 그는 정반대였다. 하방된 지 얼마 안돼 평생의 후원자인 쑹핑(宋平) 간쑤성 당시 서기를 만나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 저우언라이의 비서 출신에다 칭화대 학장, 노동부 부부장 등 굵직굵직한 자리를 역임한 쑹은 과연 거물다웠다. 마치 명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처럼 대번에 후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오로지 그를 중용하기 위한 인사만도 수차례 실시했다. 후는 이로 인해 20대 후반의 일개 기술자에서 일거에 중견 간부로 몇 단계나 뛰어넘는 수직 출세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조차 서막에 불과했다.
성 건설위 비서, 부처장, 부주임을 최연소 기록으로 역임하면서 1980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부부장급에 해당하는 간쑤성 공청단 서기로 발탁되는 출세 가도를 정신없이 내달린다. 이 기간 그는 쑹의 배려로 당 간부 양성학교인 중앙당교에 입학, 고급 간부에게 필요한 소양을 쌓기도 했다.
당의 고급 간부이기는 했으나 벽지 간쑤성에서만 지내 중앙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는 1982년 드디어 중앙에 이름을 알릴 결정적 기회를 잡는다. 쑹의 전폭적 후원이 그에게 중앙에서 출세를 약속하는 보증 수표와 다름없는 공산주의청년단 서기라는 막강한 자리를 안겨다줬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행보는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었다. 당시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이 79세, 총서기인 후야오방이 67세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 40세에 불과한 나이에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전국청년연합회 주석 등의 요직을 겸직하며 승승장구를 구가했다.
중앙에서 후진타오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자 젊고 패기 있는 인재의 등장에 목말라하던 덩샤오핑의 눈은 번쩍 뜨이게 된다. 후에게 반한 덩은 자신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던 후야오방 총서기에게 “이 사람은 진짜 쓸 만한 인물이다.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그를 더욱 크게 키울 것을 은연중에 부탁하고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85년부터 구이저우(貴州)성과 티베트 자치구 서기 및 당 중앙위원을 차례로 역임한 후 50세의 나이에 7명 정원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했다. 덩의 지원을 고려할 때 경천동지할 사건은 아닌 셈이다. 덩의 관심은 물론 평생의 후원자인 쑹핑이 1992년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나는 은퇴해도 좋다. 단 내 자리는 그에게 넘겨달라”고 당시 실력자 차오스(喬石)에게 간절히 부탁한 상황에서 그가 상무위원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