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박은 게임과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어떤 것(대부분 화폐로 환원된다)이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가 결합했을 때만 도박이 된다. 아무것도 걸지 않은 고스톱은 도박이 아니다. 게임 없이 재물을 주고받는 것은 자선사업일 뿐이다. 게임의 종류는 한정이 없다. 위에 든 것 외에 동전의 홀수·짝수 맞히기도, 가위바위보도 도박이 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 올리기
내 생각에 도박은 두 가지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 최적의 먹이획득이론. 생명체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먹이를 획득하려 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이 원리의 제도화다.
도박과 자본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노동과 합리적 경영을 필수적인 매개물로 표방하지만(표방만 한다. 실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도박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생략한다. 즉 도박은 노동과 합리적 경영을 생략한 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획득하려 한다. 도박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불확실성. 도박은 불확실한 미래에 운명을 맡긴다. 도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필연과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과 불확실성일 뿐이다. 이것이 도박의 세계관이다.
도박의 역사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도박의 유행 정도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손에서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낮은 생산력의 사회에서 도박이 성행할 확률은 높지 않다. 높은 생산력은 도박을 성행케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도박이 성행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경제적 후진사회에서도 도박은 성행할 수 있다. 이래서 둘째 조건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도박이 성행할 수 없다. 도박은 불확실성의 증가에 따라 성행한다.
이 글에서 나는 조선후기 사회와 도박의 관계를 검토한다. 경제적 변화가 역사학의 관심사라면, 그것이 인간의 구체적 일상적 삶과 의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내 관심사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관들이 도박에 탐닉하는 것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것은 ①바둑 ②장기 ③쌍륙 ④투패(鬪牌 즉 마조馬弔인데, 보통 말로 투전鬪?이라 한다·원주) ⑤강패(江牌 즉 골패骨牌 원주) ⑥척사(擲柶 우리나라 풍속의 윷놀이·원주)이다. ‘대명률’에 ‘모두 장(杖) 80에 처한다’고 한 것은 어떤 놀이를 막론하고 재물을 걸고 도박한 자는 장 80에 처한다는 것이다. 무릇 놀이로써 재물을 취하는 자는 그 형률이 모두 같은데 오직 바둑은 천한 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니 구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산은 여섯 가지 도박을 들고 있는데, 여섯 가지 모두가 균등하게 유행한 것은 아니었다. 미리 말하자면 다산이 같은 글에서 지적했듯,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투전·골패·쌍륙이었고, 그 중에서 투전이 조선후기 도박계 제왕의 지위를 점하였다. 바둑·장기·윷놀이는 조선후기에 생겨난 종목이 아니라, 고래로 있었던 것이고 도박으로 특별히 유행한 것도 아니니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