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1월 가나 잔사유 분해공장 준공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문우행 사장.
나는 그 시간을, 하나를 위한 ‘최고(Best)’가 아닌 모두를 위한 ‘최적(Optimum)’을 실현하는 데 쓰려고 노력했다. 뭔가 하나를 아주 잘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경영자는 모두를 아우르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들 모두를 꼼꼼히 살펴야 하며, 그들 모두를 고려하여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장이 되기 전부터 늘 모두를 위한 최적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나는 스포츠라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데, 특히 럭비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럭비부에서 활동했다. 작은 키의 내가, 지금도 좀 생소하지만 당시에는 더 낯설었던 운동인 럭비를 한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럭비는 일견 단순하고 과격한 운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훈련을 통해 다져진 팀워크와 끈질긴 승부근성을 요하는 운동이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남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자란 나는 그래서 럭비를 통해 남다른 즐거움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동에 너무 몰입했던 탓일까. 나는 서울대에 원서를 넣었다가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나름대로 아쉬움이 컸기에 재수를 했고, 1년 후 다시 원서를 쓰는 기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대 입시에 재도전하는 내 의지보다 집안의 장남이라는 위치를 고려하는 게 더 중요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고민 끝에 결국 목표를 낮춰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지원했는데, 이로써 건설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극한체험’이 자양분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1년, 당시 국내 최대의 강괴 생산업체인 흥화공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4년 후인 1975년에는 철골 전문가로 인정받아 한국해외건설주식회사(KOCC)에 들어갔다.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이듬해엔 내게도 중동으로 나갈 기회가 왔다. 아내는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그것도 운명 때문이었는지 왠지 모르게 ‘한번 해보자’ 하는 오기가 솟아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사우디아라비아. 61-B 도로공사 현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동의 사막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사막이라고 하면 그저 ‘열사(熱砂)’만을 생각했는데, 견디기 어려운 것은 더위뿐만이 아니었다. 바람 또한 무시무시했다. 사막에 바람이 한번 불면 차곡차곡 쌓아둔 드럼통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식량이 순식간에 모래더미에 묻히곤 했다. 그나마 바람이 잦아든 후 모래를 헤치고 다니며 캔 음식 몇개라도 찾아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아침에 현장으로 작업하러 나간 인력들은 모래가 길을 덮고 이곳저곳에 모래산들이 생겨 딴판으로 변해버린 지형 때문에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허다했다.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 웬만한 고통은 비교적 잘 참아내던 나로서도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 그런 극한상황에서 맨주먹으로 역경을 이겨내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목표를 성취해낸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됐다고 확신한다. 훗날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기어이 극복할 수 있게 한 힘도 여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