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작업은 교편을 잡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1980년은 서슬 퍼런 정부의 연극 검열이 있던 때다. 형의 극단 원각사가 대한민국연극제에 ‘뉘랑 같이 먹고살꼬’를 출품했다. 우렁이설화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탐관오리와 민중과의 갈등구조를 그린 작품이었다. 검열을 거친 대본의 절반에 붉은 줄이 쳐져 있었다. ‘공연 불가’라는 표시였다. 수정해서 올리면 또 절반이 ‘공연 불가’로 내려왔다. 이때 이장관은 희곡을 쓴 이하석(55·영남일보 논설위원)씨와 대본 수정작업을 했다. 이씨와는 여섯 살 차이로 대구고와 경북대 선후배 사이다.
여관을 잡아 같이 밤을 새웠던 이씨는 “창동이는 느린 듯 보이지만 순발력이 있고, 치밀했다”고 말했다. 공연이 불가능했던 것이 이장관의 손을 거치면 작품의 뜻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거부감을 주지 않는 대사로 탈바꿈했다. 이씨는 “사고가 유연하고, 열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연극과 영화는 인큐베이터는 달라도 같은 드라마구조를 내놓는다. 이렇게 볼 때 이장관의 연극 열정은 영화에 큰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이창동 표’ 영화의 정교한 내러티브는 정평이 나 있다. 서사적인 구조도 완벽에 가깝다. 소설가로서의 문학작업 덕분이다.
한번은 “좀 밝고, 예쁜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산업사회의 이면에서 무너져가는 한 젊은이의 비극(‘초록물고기’), 현대사의 아픔을 빼곡이 넣은 ‘박하사탕’, 순수하지만 오금 저리게도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 ‘오아시스’. 하나같이 등짐 지고 고개를 넘는 것처럼 힘겨워 보여 그랬다. 물론 ‘오냐! 그러지’라는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칼에 “자기 만족을 위한 영화는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투철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없는 작품은 안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하긴 그는 소설가로서도 그랬다. 분단상황을 그린 ‘소지’나 한국 소시민의 아픔을 그린 ‘녹천에는 똥이 많다’처럼 항상 묵직한 주제를 던졌다. 그러나 소설가로는 그렇게 빛을 보지 못했다. 한번은 “한국 독자 안 믿는다”는 말로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1983년 서울 신일고 교사로 있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중편 ‘전리’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등단했다. 이때 심사를 맡았던 한 선배 문인은 “꼼꼼하게 잘 썼지만, 산만했다”고 했다.
2권의 창작집을 냈지만 결국 장편은 내지 못했다. 소설가로서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수많은 날이 고민의 연속이었을 게다.
민중문학론, 민족문학론 등 시대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제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1980년대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 사회가 변하면서 이데올로기며, 사회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실효가 없어졌다”며 “작가로서의 한계보다 세태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컸다”고 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그가 영화로 눈을 돌린 것은 한국 영화계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한국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감독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소설에서의 한계를 영화로 풀어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혹자는 이장관을 ‘변신의 귀재’라고 했다. 언뜻 들으면 쉽게 변하는 ‘해바라기 같다’는 소리로 들린다. 30년 지기인 심만수(50·살림출판사 대표)씨는 “부단한 자기 변신과 자기 단련은 내면의 강한 힘에서 나온다”며 “그것이 바로 현명하다는 증거”라고 변호한다. 연극광에서 교사로, 다시 작가로, 영화감독으로의 변신은 도전과 자기 단련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1993년, 마흔의 나이에 그 힘들다는 영화판에 뛰어든다는 것은 분명 무모한 일이었다. “마흔이 되니까 내리막길이 보이더라구요.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대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의 조언으로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조감독을 맡게 됐다. 1982년부터 절친했던 명계남씨가 합류했고 명씨와 친한 문성근씨가 주연을 맡았다. 이렇게 의기투합한 세 사람의 인연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의 등장에 대해 영화판 사람들이 “소설 소재나 찾으려는 겔 것”이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이 판명됐다. 몸을 던져 고군분투하는 소설가에게 감동받은 것이다.
배우 문성근씨의 경우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찍으면서 “다음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 될 것”이라 공언했고, 실제로 ‘초록물고기’에 출연해 놀라운 연기로 영화에 빛을 더했다.
감독 이창동은 관객의 반응에 비교적 무덤덤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느 술자리에서 “나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무척 뜻밖이었다. 끊임없이 관객과의 소통을 갈망했다는 것이다. “관객이 잃어버린 순수를 그리워하든, 삶의 누추함에 슬퍼하든 그건 관객의 몫”이라던 그다. 관객을 저버릴 수 없는 영화감독의 태생적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갈망한 관객과의 소통 또한 성과가 적은 것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본 한국 관객 10명 중 3, 4명은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면 2, 3명은 열광한다. 특히 30, 40대가 공감할 만한 얘기를 20대가 많이 봐준 것에 무척 고무되는 눈치였다. ‘오아시스’를 내놓고는 고정 팬도 늘었다. ‘이창동 표’ 영화를 분석하고 공부하는 모임도 많이 생겼다. 일종의 마니아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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