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과 김현희 사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시절의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은 ○개 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중 제1단이 대공사건 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대공수사단’이었다. 1987년 11월29일 일요일, 대공수사단의 핵심 요원 K씨는 모처럼 집에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의 관심은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맞붙은 13대 대선에 쏠려 있을 때인지라, 그 또한 덩달아 바빴는데 그날은 용케도 집에서 쉴 수 있었다.
K씨는 저녁 때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데 화면에 KAL 858기가 비행중 실종되었다는 내용의 자막이 뜬 것이었다. K씨는 퍼뜩 ‘회사로 나가봐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북한의 소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KAL 858기 실종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왜 북한을 떠올렸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1987년이라는 시대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87년은 민주화의 봄이 펼쳐진 1980년 이후 가장 ‘뜨거운’ 시절이었다. 신년벽두인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 한겨울임에도 시위가 불붙기 시작했다. 시위사태는 곧이어 대통령직선제 개헌투쟁으로 비화됐고, 4·13 호헌조치를 거쳐 마침내 6·29선언이 나오게 됐다. 이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짐에 따라 1노3김이 출마한 13대 대선이 12월16일로 예정돼 있었다.
또 한 가지 KAL 858기 사건의 조작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울올림픽을 앞둔 당시 상황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기부 수사관 출신의 한 인사는 “김현희 사건은 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마감 50여일을 앞두고 터져나왔다”며 “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1987년 남북한이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지 않는 한, 사람들은 김현희 사건 조작설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올림픽 앞두고 치열한 신경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해 미국·한국 등 많은 서방국가가 불참했다. 1984년 올림픽은 미국 LA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공산국가들이 불참했다. 따라서 서울에서 열리기로 한 88올림픽도 반쪽짜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최대한 많은 나라를 참여시켜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르려고 했다. 이러한 한국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북한의 방해였다. 북한이 테러를 일으키면, 안전성을 이유로 불참하겠다는 나라가 늘 것이므로 한국은 안전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최대한 홍보해야 했다.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려니 시위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안 관계자들은 무엇보다도 서울올림픽이 제2의 뮌헨올림픽이 되는 것을 염려했다. 1972년 우리처럼 분단국가인 서독은 뮌헨에서 20회 올림픽을 치렀는데, 이때 ‘검은 9월단’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소속 테러조직이 선수촌에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살해한 후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돼 있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200여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서독은 특공대를 투입해 테러범 진압작전을 폈다. 그러나 작전이 치밀하지 못해 검은 9월단은 11명의 이스라엘인 인질 전원을 사살한 후에야 제압되었다. ‘피의 올림픽.’ 이 충격으로 20회 올림픽은 하루 동안 중단됐다가 다시 진행되었다.
공안 관계자들은 올림픽기간 중에 북한이 ‘한 방’만 날리면, 서울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방’의 위협을 예방하기 위해 한국은 황급히 프랑스로부터 휴대용 대공미사일인 미스트랄을 수입해 서울 주변에 배치하였다. 스위스에서 제작하는 오리콘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공포인데, 오리콘포도 수입해 수도권 인근의 산에 집중 배치하였다.
‘한 방’은 무기 발사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특수요원을 보내 한국군의 무기고나 레이더 기지, 공군 비행장 등 전략시설을 파괴하는 것도 회심의 일격이 될 수 있다. 한 방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한국은 비밀리에 전략시설 주변에 대인지뢰를 매설했다. 그후 세월이 흐르자 이 지뢰들이 폭우가 쏟아질 때 물살에 휩쓸려 강이나 하천으로 떠내려와 문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