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역사 발굴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사료를 통해 본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주장의 오류

  • 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2/6
중국인들은 소위 중국인이 아닌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특히 한민족과 관련되는 민족은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동이란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중국인이 아닌 민족이라고 부른 동이와 중국인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필자는 훈족(흉노(匈奴))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사료 등을 통해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제66호)와 ‘고대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신동아’ 2003년 11월호)을 통해 375년 서유럽을 공격,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반도 남반부의 가야·신라와의 친연성을 제기했다. 중국과 끊임없이 경쟁을 벌였던 흉노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신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적어도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이들을 중국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가야·신라가 흉노의 일파인 훈족과 친연성이 있다면 가야·신라보다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고구려는 흉노와 어떤 관계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사에서 흉노가 나타나기 전까지 주로 동이(東夷)들이 살고 있던 동북 지역은 한민족의 원류가 정착한 지역이자 부여와 고구려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흉노와 고구려의 연계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근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흉노란 중국 북방에서 처음으로 유목민 국가를 건설한 제국의 명칭이지,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들이면서 점점 강성해졌다. 그러다 기원전 4세기부터 비로소 여러 유목민 부족들을 망라하여 하나의 포괄적인 기마민족 집합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들은 ‘흉노’라는 이름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고, ‘노(奴)’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란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흉노에서 흉(匈)자를, 선비(鮮卑)에서도 비(卑)자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에서 따온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로 ‘사람’이란 뜻이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흉노가 ‘노예 같은 오랑캐’란 뜻이었다면 흉노 제국이 이런 이름을 용납했을 리 없다. 특히 진나라의 뒤를 이어 들어선 한(漢)이 흉노에게 조공하는 입장에서 상대를 비하하는 뜻으로 ‘흉노’라 칭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상당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를 의미했다. 고구려의 5대 부족인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도 흉노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 있다.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에 자리잡은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에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 대사에 등장하는 ‘노(奴)’나 ‘아노(阿奴)’의 어의를 살펴보면, 이는 남편을 지칭하는 ‘낭(郎)’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다. 즉, ‘노(奴)’자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흉노의 어감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선입견은 버려도 좋지 않을까.

漢에게서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흉노 간 본격적인 대립의 역사는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 중국인 한(漢)을 세운다. 당시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한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북쪽 흉노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흉노는 몽골 중앙부인 상원(上原; 현재의 산서성 북부, 운중(雲中)에 상당하는 위치) 지역에 본영을 설치하여 선우(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의 아들’, 즉 흉노의 왕을 뜻한다)가 직접 통치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으로 나누어 각기 동서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상원 지역은 광활하면서도 비옥한 초원지역이자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지다. 흉노를 비롯해 칭기즈칸, 돌궐, 위구르 등이 모두 이 지역에 본영을 설치했다.

2/6
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목록 닫기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댓글 창 닫기

2022/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