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100년 전 일본이 강탈한 북관대첩비, 왜 못 오나

반환추진위 VS 외교부 책임 공방

  •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08-25 1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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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때 의병의 승전을 새긴 북관대첩비가 100년째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다. 우리에게는 국보급 문화재이나 일본인에게는 수치스러운 패전 기록인 대첩비의 반환, 왜 이리 더딘가.
    100년 전 일본이 강탈한 북관대첩비, 왜 못 오나

    ‘북관대첩비’탁본을 펼쳐놓고 감회에 젖은 초산 스님.

    “임진왜란 당시 적을 무찌른 용맹스러운 이야기는 세상에 명성이 높다. 해상에서는 이순신의 한산도 대승리, 육지에서는 권율 도원수의 행주산성 승리, 또 연안성에서의 전과로 이월천(이정암)의 승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武將의) 지위에 있는 공적이며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10인, 5인(의병)의 궐기다. …정문부(鄭文孚)는 무사의 재능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전쟁을 하려 해도 군사가 없어 산골짜기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의병궐기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여기에 참가하였다.”(北關大捷碑 일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11년 후(1709년) 숙종은 의병장 정문부 등이 관북지방에서 일본군을 8차례나 격퇴시킨 공을 기려 함경북도 길주(현재 김책시)에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높이 187cm, 너비 66cm의 이 비석에 새겨진 1500자는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을 세세히 전한다.

    이 대첩비는 현재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전 기록인 이 비석을 수치로 여겨 일본으로 옮겨갔다. 그 후 1969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북관대첩비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 비석의 존재가 알려지자 한국 정부와 관련 단체, 해주정씨 종친회 등 후손들이 반환운동을 펼쳤으나 야스쿠니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 채 30여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현재 북관대첩비 위에 갓처럼 씌워진 큰 돌은 마치 호국영령의 기상을 제압하려는 듯 탑신을 짓누르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야스쿠니는 4년 전 비석을 어둠침침한 숲 속으로 옮기고 높은 철책을 둘러쳤다. 이렇게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 북관대첩비는 100년 세월의 풍화에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1996년 비문의 탁본을 뜬 일본의 원로서예가 요코 세이자부로씨는 “탁본을 하면서 비석이 진동하며 우는 것을 느꼈다”며 “하루 빨리 한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탁본은 일한불교복지협회 회장인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74) 스님에게 전달됐다가 2000년 반환운동을 함께 펼치는 징표로 초산 스님(76·한일불교복지협회 회장)에게 건네졌다. 아산 독립기념관에는 이 탁본의 사본이 전시돼 있다.



    [장면 ②] 노스님의 결심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 한·일간 해결하지 못한 3대 과제로 ‘임진왜란, 한일합방, 재일본 한국인 처우문제’가 거론되자 일본 천태종(일본불교의 중심 종단)의 고승인 가키누마 스님은 이렇게 결심한다. ‘내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재일본 한국인 처우문제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대신 승려로서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에 관해서는 뭔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가키누마 스님의 머릿속에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는 북관대첩비가 떠올랐다. 전쟁의 원혼을 위로하고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라면 승려의 본분에 맞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미 가키누마 스님은 1989년 한국 불교계로부터 ‘귀무덤’의 한국 봉환사업을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한불교복지협회를 설립한 바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승리의 증거로 조선인 전사자의 귀와 코를 잘라갔다. 그 중에서도 귀무덤은 400년 동안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 앞에서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양국 불교계의 노력으로 1990년 4월 ‘귀무덤’의 원혼이 고국 땅에 안치됐다.

    그 후 일한불교복지협회는 간토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캐간 희귀 동백나무의 묘목 반환, 안중근 의사를 위한 일한 합동법요, 오카야마 ‘코무덤’ 환국 봉송, 이(李) 왕조 황세손 이구씨 환국, 시베리아 억류 일본국 외국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법요, 일본에서 창씨개명에 반대하다 감옥에서 순국한 강상호 의사의 유골 환국 봉송 등 일련의 한국 관련 사업을 성사시켰다. 또 1995년 8월 광복 40주년을 맞아 가키누마 스님이 직접 일본의 민간인 참회사절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해서 과거 일본의 한국침략을 사죄하는 ‘한일역사 총참회식’을 갖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을 왕래한 것이 150여 차례. 가키누마 스님이 1990년부터 부단히 노력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한 일이 딱 하나 있다. ‘북관대첩비’의 한국 반환이다.

    “야스쿠니 신사 한구석에 쓸쓸히 서있는 비(碑)가 조국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국민의 눈에 띄게 될 것이고 반일(反日)감정도 풀릴 거라 생각합니다. 진실한 평화운동에 참가하여 힘을 합쳐서 실현되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가키누마 센신)

    100년 전 일본이 강탈한 북관대첩비, 왜 못 오나

    가키누마 스님

    2000년 4월 어느 날, 초산 스님은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일본의 가키누마라는 스님이 한국에 와서 꼭 한 번 뵙고자 하니 00호텔 로비로 나와달라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초산 스님은 연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가키누마 스님이 귀무덤, 코무덤의 환국을 주도했고 사재를 털어가며 수년째 북관대첩비 반환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물끄러미 초산스님을 바라보던 가키누마 스님은 종이에 쓱쓱 ‘줄탁동기(啄同機)’ 넉 자를 써서 내밀었다. 줄은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탁은 밖에서 어미닭이 쪼는 것을 가리킨다. 즉 새끼가 두꺼운 껍질 안에서 연약한 부리로 신호를 보내면 어미닭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쪼아 껍질이 깨지면서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벽암록’에 나오는 그 네 글자를 보는 순간 초산스님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때를 놓치지 말고 나와 함께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하자’는 숨은 뜻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가키누마 스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세 번 머리를 숙여 미소에 답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노승의 인연은 북관대첩비 반환추진위원회(이하 반환추진위) 공동의장직을 맡는 것으로 발전한다.

    “일본의 한 스님이 과거사를 참회하는 것으로 수행목표를 삼고 이렇게 10년 넘게 묵묵히 한 길을 걸어왔다면 이것은 진짜다, 누군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한일불교복지협회도 만들고 반환추진위원회도 발족한 겁니다. 벌써 4년이 넘었는데 하도 힘들어서 둘이 손을 부여잡고 운 것이 수차례요.”(초산)

    [장면 ④] 2004년 7월13일 서울, 기자회견

    “만일 이번에도 한국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7월13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가키누마 스님은 선언했다. 이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 15년 쌓아온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키누마 스님은 “대첩비는 일본에서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요청만 있으면 반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한국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했다.

    “일본이 북관대첩비를 소유해서 득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일본 내 한국문화재 반환의 선례와 남북관계의 문제점을 들어 반환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키누마 스님이 부랴부랴 서울까지 날아와서 기자회견을 한 것은 일주일 후 한국에서 열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회담에서 ‘북관대첩비’ 문제가 한마디라도 거론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문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임기 동안에는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굴욕외교’ 파문을 일으켰다. 이제 북관대첩비를 포기하는 일만 남았는가.

    7월13일 가키누마 스님의 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된 후 외교통상부는 즉각 반박자료를 냈다. 요지는 “일부 언론에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북관대첩비가 반환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외교부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79년 이래 우리 정부는 한일 외교채널 등을 통해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계속 요청해 왔으나, 일본 정부는 동 대첩비의 원소재지가 북한이라는 점과 민간 종교법인의 보유물에 대한 정부의 관여가 곤란하다는 점 등으로 한국 반환이 용이하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측은 한국과 북한의 합의가 도출된 후 일 정부의 공식요청이 있어야 반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반복해 오고 있다.

    둘째, 북관대첩비 반환과 관련 일본 승려(가키누마 센신)는 야스쿠니 신사 측으로부터 남과 북이 합의할 경우 반환할 수 있다는 서약을 받아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야스쿠니 신사측은 동 승려가 활동하기 전부터 우리 정부에 남과 북의 합의가 반환의 전제조건이라고 밝혀 왔고, 또한 어떠한 민간단체나 개인에게도 반환을 약속한 바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가 일본측에 ‘요청’만 하면 반환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외교부의 반박 “할 만큼 했다”

    셋째, 동 승려는 야스쿠니 신사측이 한국정부에 외교적 동의를 요구했으나 이뤄지지 않아 반환이 무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정부는 1979년부터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계속 주장하고 있으며 야스쿠니 신사측이 한국정부에 외교적 동의를 요청한 사실이 전혀 없다.

    ‘북관대첩비 관련 보도에 대한 우리부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위와 같은 내용의 외교부 반박문이 나오자 초산 스님과 반환추진위는 즉각 외교부 앞으로 재질의서를 보냈다. 다소 흥분한 어투로 민간차원의 반환 노력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외교부를 질타했다.

    100년 전 일본이 강탈한 북관대첩비, 왜 못 오나

    숲 속으로 옮겨지기 전 북관대첩비. 탑신 위의 돌이 불균형한 데다 위태로워 보인다.

    “민간 종교법인의 보유물에 대한 정부의 관여가 곤란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한국으로의 반환이 법적으로 용이하지 않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기만적인 궤변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적 유물을 강탈한 행위도 법적이란 말인가. 언제 정부가 관여해서 귀무덤, 코무덤, 안중근 의사의 유물 반환이 이루어졌나. 그렇다면 민간종교 차원에서 하는 북관대첩비 반환운동도 법적으로 곤란하다는 의미인가.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선열을 모시는 곳이다. 우리의 호국영령이 그 한구석에 방치돼 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보고 느껴야 하는가. 우리는 기필코 북관대첩비를 이 강토에 모셔올 것이다.”

    외교부 주장에 따르면 지난 25년 동안 정부 차원에서 꾸준히 반환을 시도했지만 일본정부와 야스쿠니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일본 승려가 나타나 한국정부가 일본 측에 ‘요청’만 하면 야스쿠니가 북관대첩비를 내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확인결과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한·일 두 고승이 외교 관례도 모르는 ‘황당한’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일까. 야스쿠니 신사는 북관대첩비를 내줄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한쪽(가키누마 스님)에는 주겠다, 다른 한쪽(한국정부)에는 줄 수 없다고 말을 바꾼 것일까. 북관대첩비, 100년 만의 귀향길을 막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가키누마 스님이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시작한 지 6년이 되었지만 야스쿠니는 “북관대첩비는 남북한이 갈라지기 전에 일본에 가지고 온 것이니까 남북한이 하나가 되면 돌려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북통일이 되면 돌려주겠다는 것은 돌려줄 의사가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야스쿠니 궁사의 약속

    1996년 가키누마 스님은 일본에 체류중인 이구씨(영친왕의 아들) 환국을 돕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의 영구귀국에 맞춰 북관대첩비를 환국선물로 보내자고 하면 어떨까.”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 마지막 황세손이니 명분도 있었다.

    당시 이구씨는 17년 동안 미국 국적으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어 귀국에 앞서 신원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가키누마 스님이 지인(知人) 자격으로 일본 외무성에 제출하는 이구씨의 신원보증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1996년 11월 귀국일정에 맞춰 반환을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이듬해 6월, 이구 구(舊)조선왕조 황세손과 가키누마 일한불교복지협회회장은 공동명의로 야스쿠니 신사의 유자와 다다시(湯澤貞) 궁사(宮司 : 신사의 총책임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내용인 즉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것은 외국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황세손의 영구귀국에 맞춰 일본측의 성의(誠意)표시로 반환한다면 세계평화를 향한 한일 우호관계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요청이었다.

    이때부터 가키누마 스님은 매달 신사참배를 하면서 조금씩 유자와 궁사에게 다가갔다. “이구씨는 남북이 하나일 때 마지막 황세손이니 남한 정부도 북한 정부도 아닌 그분에게 북한대첩비를 드리는 게 어떠냐.” “야스쿠니가 이 비석을 갖고 있다 해서 무슨 유익한 일이 있는가. 우리(일본)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알려줄 뿐이다. 이렇게 버려두느니 돌려줘서 이웃나라(한국)가 평화를 위해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일본의 도리요, 국익이다.”

    이렇게 2년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설득하자 유자와 궁사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9년 6월, 유자와 궁사가 가키누마 스님에게 한 통의 서한을 내준다. 북관대첩비 반환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의 입장을 밝힌 첫 공식문서였다. 서한은 “당 신사에서는 귀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의 조정이 서로 이루어지고 한국 정부로부터 외교절차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의뢰가 있으면, 속히 반환할 용의가 있음을 확인하여 드립니다”고 명시했다. 야스쿠니측이 비석의 반환 의사를 문서로 남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환 약속은 야스쿠니 궁사와 가키누마 스님간에 이뤄졌지만 이 서한의 수취인은 가키누마 스님이 아닌 이준학(당시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 부회장), 이환의(전주이씨대동종약원 이사장)씨로 되어 있다. 가키누마 스님은 이씨 종친인 이들과 함께 이구씨의 환국을 추진한 바 있고, 한국의 문화재가 반환되는데 수취인이 일본인일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뺐다.

    이 무렵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가 다른 루트를 통해 독자적으로 북관대첩비 반환을 추진하고 있었다. 1997년 7월 발족한 이 위원회는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가이 F. 토졸리 총재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북한과 직접 접촉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북관대첩비를 원래 있던 자리(북관)로 돌려보내는 것.

    토졸리 총재는 1999년 5월 이형철 유엔주재 북한대사와 만나 반환 문제를 논의하고, 6월 이 대사로부터 “조속한 시일 내에 북관대첩비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순조롭게 반환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문서를 받았다. 덧붙여 토졸리 총재는 반환작업과 운송과정에서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대겠다고 약속했다. 북측의 인수의사가 공식 확인됐다.

    더욱이 야스쿠니 궁사로부터 반환약속을 받아낸 가키누마 스님이 이 일에 협조하기로 하면서 반환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한국 언론도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한국, 일본에 각각 협회가 있음)가 2년여의 노력 끝에 ‘북관대첩비 94년 만의 귀향’을 성사시켰다고 대서특필했다. 1999년 7월17일 도쿄에서 일본 아키히토 천황, 이구씨, 토졸리 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반환기념식을 갖고, 7월20일 부산항에 도착하면 8월20일경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인도한다는 일정표까지 나왔다.

    노벨평화상과 북관대첩비

    그러나 마지막 순간 가키누마 스님이 반대했다. 북관대첩비 반환과정에서 한국이 단순 경유지로만 이용되는 것은 애초의 반환운동 취지에 맞지 않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가키누마 스님은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하는 뜻에서 한국에 북관대첩비를 보내고, 한국정부가 중심이 되어 다시 원래 소재지인 북한으로 돌려보냄으로써 한·일관계 개선과 남북한 화해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동북아시아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토졸리 총재의 계산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직접 북관대첩비를 가지고 북한으로 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기를 원했고 남측 인사를 포함한 대규모 방북단을 꾸릴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노벨평화상’을 향한 야심이 깔려 있었다.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가 밝힌 ‘북관대첩비 환국운동의 연혁’을 보면, 1999년 5월20일 위원회 명의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가이 토졸리 총재가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매개로 한반도의 긴장완화 및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제출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해 노벨평화상은 ‘국경없는 의사회’가 받았다. 위원회 홈페이지에는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도 실려 있다.

    “국경없는 의사회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나 그들은 심사순위에서 14위였다고 한다. 노벨상 한림원 세테르 사무총장의 이야기로는 1∼13위가 정치인이었는데 토졸리 총재가 1위,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이 2위, 김대중 대통령은 12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관대첩비 반환) 행사가 진행되지 못한 까닭에 토졸리 총재가 상을 받지 못했다.”

    가키누마 스님과 토졸리 총재의 의견차로 북관대첩비의 한국 반환은 마지막 단계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2000년 4월 한국의 초산 스님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외교부는 자꾸 대첩비의 원 소재지가 북한이라면서 마치 우리가 이 문제에서 제3자인 것처럼 말하는데, 대첩비의 건립취지는 의병장 정문부 장군의 전공을 기리자는 것이지 당시 격전지를 알리는 단순한 표지가 아니에요. 또 해주 정씨 문중만의 일도 아니고 우리 국민의 일입니다. 이 대첩비를 세운 것은 숙종이에요. 그리고 가키누마 스님이 왜 굳이 한국을 통해 북한으로 반환하려 하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곧바로 북한에 주려 했다면 5년 전 이미 했지요. 북측도 조총련을 통해 야스쿠니 신사와 일한불교복지협회에 반환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스쿠니는 이미 가키누마 스님에게 주기로 약속한 상태고, 가키누마 스님은 한국을 통해 북한에 전달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반환을 요청하면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그러면 곧 야스쿠니와 반환 조인식을 할 수 있어요.”(초산)

    번번이 놓친 기회

    초산 스님은 4년 내내 정부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1999년 가키누마 스님이 야스쿠니로부터 받아낸 서한에서 반환의 전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남북한 조정, 둘째 외교절차를 통한 일본정부에 정식 의뢰. 반환추진위 주동진 사무처장은 외교부가 이 전제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남북한 문제는 이미 북측 이형철 대사가 인수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결된 셈입니다. 북측도 아직 북·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북관대첩비를 일본으로부터 직접 돌려받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 정부가 종교법인의 소유물에 대해 관여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해요. 북관대첩비는 전리품(국제법상 돌려줄 의무가 없다)도, 일본의 문화재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 정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일본 정부가 줄 수 있다, 없다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죠. 북관대첩비는 야스쿠니의 의사에 따라 언제, 누구에게라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야스쿠니가 정부 차원의 외교절차를 요구하는 것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정부가 이렇게 외교절차를 밟아서 공식 요청을 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준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죠.”

    주동진 사무처장은 외교부가 1999년 이후 일본 외무성에 반환 요청을 했다는 문서 한 장이면 충분한데 그것조차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1979년부터 계속 일본에 반환을 요청해 왔다는 외교부의 주장은 무엇인가.

    “7월23일 외교부 동북아1과에 1999년 이후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 요청한 문서가 있다면 그것을 복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문서만 가지고도 야스쿠니와 반환조인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지난해 10월 주일대사관에 내려간 전문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문화재청의 문화재반환위원회가 외교채널로 일본정부에 요청을 해왔으니 그곳에 알아보라고 하더군요.

    다시 문화재청에 전화를 했습니다. 확인 결과 문화재반환위원회가 아니라 문화재위원회가 있고, 위원회는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대해 외교부에 건의만 할 뿐 외교채널로서의 기능이 없다는 겁니다. 문화재청은 1994년 주일대사관에서 보낸 문서를 보관중인데 ‘일본의 입장변화가 없다’는 내부문서여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했습니다. 이러니 외교부가 정말 일본에 공식요청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어요.”

    1년 전 당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과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외상의 회담을 앞두고 반환추진위는 외교부에 양국 외무장관회담에 북관대첩비 반환 문제를 포함시켜달라는 협조공문(북관대첩비 환국·평화기원 대축제를 위한 협조)을 전달했다. 그러나 8월22일 회담에서 윤 장관은 야스쿠니에 건립예정인 제3의 추도시설을 언급하면서 “앞으로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한일관계에서 부담을 주지 않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을 뿐 그곳에 있는 북관대첩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반환추진위는 즉각 외교부에 항의했다.

    “야스쿠니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추도시설 이야기까지 하면서 북관대첩비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했더니 담당자가 관련 서류를 6일 동안 보관하면서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어이없었습니다. 당연히 장관은 그런 보고를 받지도 못했죠.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할 좋은 기회를 또 놓친 겁니다.”(주동진)

    올해가 마지막 시도

    사실 가키누마 스님은 2000년 7월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차관(현 장관)을 만나 북관대첩비 관련 자료(야스쿠니 공식서한, 토졸리 총재와 이형철 대사 서한 등)를 전달하고 협조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4년 동안 외교부는 일본 외무성에 반환을 요청했다는 사실조차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민간 차원에서 추진되는 반환운동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외교부 담당 공무원이 어째서 야스쿠니 신사가 가키누마 스님에게 북관대첩비를 준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 민간단체에서 북관대첩비를 가져올 준비를 다 해놓았으니까 정부가 요청만 하면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정부가 꼭두각시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정부 차원의 외교적 성과가 아니에요. 가키누마 스님과 다다시 궁사 그리고 한국의 초산 스님 사이에 구축된 인간적인 신뢰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연로하신 가키누마 스님과 초산 스님의 신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10여년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주 사무처장은 가키누마 스님이 암 투병중이고 초산 스님은 심장병을 앓고 있어 하루하루가 위급하다고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안에 3자(야스쿠니 궁사, 가키누마, 초산)간 반환조인식을 갖고 북관대첩비를 한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일본에 가서 북관대첩비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소. 비록 강탈해 갔지만 일본인에게는 수치스러운 패전의 기록일 뿐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한데 가루로 만들어버리거나 땅속에 묻어버려도 시원치 않았을 것을 용케도 지금까지 놔두었구나. 내년이면 꼭 100년이오. 이제는 자연풍화로 언제 훼손될지 모르니 우리 땅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돌려달라’ 한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초산 스님은 이 말을 하면서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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