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1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모스크바 외교활동을 자세히 복기해보면 이런 비판론과는 다른 차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푸틴 관저에서의 회담, 단독정상회담, 확대정상회담, 만찬의 4차례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노 대통령이 러시아 문학을 화제로 꺼내면서 양 정상의 대화는 시작됐다.
노 대통령 : 러시아엔 대문호가 많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를 읽었습니다.
푸틴 대통령 : 아, 그렇습니까.
노 대통령 : 한국에선 최근 3년 동안만도 이 소설이 40만부나 팔렸습니다. 고전이 이렇게 인기가 높은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어 노 대통령은 “그러나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입니다”라고 했다. 1928년 발표되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로, 백군과 적군 사이를 방황하며 파멸해가는 한 청년의 삶과 비극적 사랑이 주제다. 노 대통령은 이 소설에서 받은 인상을 덤덤하게 얘기했다. 권양숙 여사 역시 톨스토이, 푸슈킨 등 러시아 문호들의 팬이라는 소개도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외교통상부에서 준비한 ‘말씀자료’에 따라 대화한 것이 아니었다. 푸틴 대통령은 노 대통령 내외가 실제로 러시아 문학에 조예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대화에 흥미를 느끼는 표정이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청소년이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고 화답했다. 푸틴 대통령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북한 핵’에서 ‘아침이슬’까지
방러기간 동안 노무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회담한 시간은 총 6시간. 한미정상회담 시간 30분과 대비된다. 대화가 사무적 내용이 주가 되어 형식적으로 흘렀다면 6시간을 채우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양 정상은 ‘북한 핵’ 문제에서부터 영빈관의 ‘나폴레옹 회화’, 만찬장에서 연주된 한국가요 ‘아침이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놓고 의견을 나눴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노 대통령은 “러시아 에너지 개발계획 발표가 늦어져 한국도 관련사업이 지체되고 있습니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른 시일 내 결정하겠습니다”고 답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동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유전에서 연해주 나홋카를 잇는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는 양국에 모두 이익이 될 것입니다”며 한국 기업의 송유관 건설 참여를 요청했다. 푸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따라 양 정상이 ‘송유관건설 공동협력’에 합의했는데 이는 한국측이 당초 기대하지 않은 성과였다.
이 건설사업은 100억달러 규모다. 같은 노선으로 80억달러 규모의 가스관건설 공사도 예정되어 있어 ‘시베리아발(發) 건설특수’도 기대할 수 있다. 일부에선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착공이 임박(내년 예정)한 시점에 양국 정상이 협력을 합의한 것은 의미있는 진전이다.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준 셈이다. 한국석유공사와 건설업체들은 이를 ‘과실’로 연결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S건설사는 이미 러시아 고위 관계자를 서울 본사로 초청해 자사의 송유관 건설 계획을 브리핑하기도 했다.
고유가의 일상화 시대가 다가왔다. 향후 20년 내 석유는 감산, 고갈의 위기를 맞는다.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확보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일이 되었다. 이번에 노 대통령은 사할린 및 캄차카 유전개발, 카스피해 유전개발, 텐지 유전개발, 우라늄광산 개발에 한국 공기업들이 참여하기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대통령들과 협정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