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는 몰랐다’는 결론 대신 ‘왜 몰랐나’ 따져야
- 김씨 피랍 인지한 AAFES 매니저의 미군당국 보고 여부는 왜 확인 않나
- ‘테러첩보 즉시 보고’ 대통령권한대행 지시 무시한 외교부 간부는 면책?
- ‘대테러 매뉴얼’ 등 기초자료도 제대로 파악 못한 감사원
- 5월10일 가나무역 직원 테러첩보 묵살한 국정원의 책임
6월29일 5명으로 구성된 감사원 조사단이 주이라크 대사관을 상대로 김선일씨 사건의 대응태세를 조사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출국했다.
감사원의 결과발표 소식을 접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발표시점에 관한 의문이었다. 왜 감사원은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추석연휴 직전에 결과를 발표했을까. 이 의문은 감사원 감사결과를 직접 확인하자 어렵지 않게 풀렸다. 감사결과에 대한 평가가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감사원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감사결과를 금요일에 발표하면 그에 대한 반박이나 평가는 토요일에 쏟아져 나오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문은 토요일부터 추석 내내 휴무였다. 결국 감사결과 발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고, 감사결과에 대한 비판도 언론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감사원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와 감사원의 감사는 동시에 진행됐다. 쓸데없이 예산을 중복 사용해 낭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중으로 검증함으로써 오히려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도 있다. 그 가운데 어느 쪽인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결과’뿐이다. 하지만 조사가 마무리된 지금 사건의 진실이 낱낱이 파헤쳐졌는지를 묻는다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중의 검증은 결국 낭비였던 셈이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나칠 수는 없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감사원의 의도가 무엇이었고 결론이 어떠했든 간에 국회 김선일 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국정조사에 참여한 당사자로서 감사원이 발표한 감사결과에 대해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국회 조사특위가 제기한 쟁점에 대해 이후 감사원이 얼마나 밀도 높은 조사를 벌였는지, 그 자세는 어떠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사원 감사의 세 가지 쟁점
감사원이 김선일씨 피랍·살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투입한 시간은 6월25일부터 8월6일까지다. 이 시기 감사원은 외교통상부 본부 등 5개 기관에 대해 감사를 실시했다. 9월24일 감사원이 공개한 ‘재이라크 교민보호실태’ 감사결과 발표자료에 따르면 감사원이 ‘감사 목적’으로 설정한 것은 ▲‘김선일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한 실체적 진실의 규명 ▲관련기관의 위기관리시스템 등의 개선을 통한 재발방지대책 강구 두 가지였다.
결론적으로 감사원의 감사결과는 이 두 목적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국정조사 결과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긴 시간과 인력, 법률로 보장된 권한을 투입한 감사원의 감사는 왜 기대한 바를 이루지 못했나. 무엇이 어떻게 충족되지 못했는지 그 주요 쟁점을 국정조사 결과와 비교하며 하나씩 검토해보겠다.
국정조사를 마무리하면서 특위 위원들은, 이후에도 계속될 감사원 감사에서 국정조사에서 확인된 다음과 같은 최소한의 쟁점을 더 조사하기를 기대했다.
첫째, 정부가 사전에 김선일씨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 이 문제는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시스템과 위기관리시스템 점검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한다. 정부는 김선일 피랍사건에 대해 알자지라 방송이 테이프를 입수하고 확인을 요청하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국정조사를 하면서 확인된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에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정부가 사전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사전에 피랍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를 몰랐다는 것은 외교안보 라인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단순히 ‘김선일씨가 일하던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이 피랍사실을 알고도 정부에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다’고만 한다면 이번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 미국이 피랍사실을 사전에 알았느냐는 의혹이다. 김천호 사장의 주장이나 바그다드 공항매장의 매니저인 장계민씨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의 미국측 사업파트너인 AAFES(Army&Air Force Exchange Service)의 매니저 짐(Jim)이라는 사람에게 자세한 내용을 전달했다. 여러 차례 보도된 대로 AAFES는 미국 국방부 소속인 현역 대령이 관리하고 다수의 군무원과 미군이 운영에 참여하는 반군반민(半軍半民) 조직이다.
물론 AAFES에 피랍소식이 전달됐다고 해서 현지 사령부나 미 국방부가 이를 알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쟁점은 AAFES 매니저 짐이 이를 현지 미군에 알렸느냐다. 미 국방부 한국담당관은 이와 관련해 “(피랍사실을) MP나 미군에게 알려줬다면 상황은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AAFES 매니저 짐이 이 사실을 MP나 미군에게 알려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나 국방부에서는 이와 관련해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는 점을 국정조사 특위는 확인했다. 따라서 미국의 사전인지 여부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셋째, 재발방지대책 마련에 대한 부분이다. 청문회를 통해 정부의 모든 부서와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잘못됐지만, 과정이나 총론에서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진솔한 반성이 없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을 통해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게 된다. 재발방지대책 역시 공염불된다.
앞에서 제시한 핵심쟁점 가운데 우선 ‘외교통상부를 포함한 관계기관의 피랍인지 시점’ 관련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감사원의 발표결과는 이 문제에 대해 ‘김천호와 가나무역 직원, 주변 인물, 주이라크대사관 직원, AP통신 관계자 40여 명을 참고인으로 조사하였으나 사전인지 했다는 진술이나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였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미리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번 감사의 목적이 ‘실체적 진실의 규명’과 ‘재발방지대책 강구’라면, 정부가 사전에 알았다는 증거가 없음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는데 왜 정부만 알지 못했느냐, 즉 ‘우리 정부는 왜 사전에 알 수 없었는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김천호 사장이 다른 교민들에게 김선일씨 피랍사실을 알려줬고, 현지 대사관에서도 가나무역 직원의 신상변동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정부는 몰랐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사전에 알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 작업 없이 ‘위기관리시스템 개선’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은 과연 정부에서 말하는 ‘위기’시점이 언제냐는 점이다. 위기는 김선일씨 피랍순간부터 시작되는가, 아니면 한국인에 대한 테러조짐이 발생한 순간 시작되는가. 이번 사건에서 위기의 출발은 김선일씨 납치 시점이 아니라 오무전기 직원이 살해된 2003년 11월이나 한국인 억류가 있었던 4월7일, 최소한 재외국민 보호매뉴얼이 시작된 이후 가나무역 직원에 대한 테러첩보가 처음 국가정보원에 입수된 5월10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위기관리시스템의 문제를 확인하려면 김선일씨 피랍 시점부터 시스템을 점검해서는 안 된다. 즉 김선일씨 피랍의 사전인지 문제와 위기관리시스템 점검은 같은 차원에서 진행돼야 하는 것이다. 이 둘을 분리하면 김선일씨 사건에서 교민관리 문제는 현지 대사관만의 문제, 즉 전체 위기관리 시스템 밖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현지 대사관 직원에게만 책임을 묻고 외교안보 라인에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감사원의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
다음으로 미군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발표 내용에 따르면 감사원은 ‘미군은 사전에 납치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을 미발견했다’고 결론내렸다. 다음은 그에 관한 감사원 발표를 인용한 것이다.
▲김선일이 6월17일 KBR(가나무역에 군납업무 하청을 준 업체·편집자주) 직원과 함께 납치된 뒤 AAFES에 통보하고 모술에 KBR측과 협의차 갔다는 당초 진술을 김천호가 번복하고, 특히 AP통신이 입수한 비디오테이프에서 납치시점이 5월31일경으로 드러난 것으로 볼 때 김천호의 당초 진술에 신빙성이 없으며
▲미 국무부, 다국적군사령관 등도 ‘언론보도 이전에는 몰랐다’고 확인하고 있는 등 미군이 사전인지하였다는 사실 미발견.
이를 살펴보면 감사원은, 논란이 된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의 진술, 즉 피랍사실을 KBR에 알리고 이를 협의했다는 진술에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미군의 사전인지도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듯하다. 그러나 김천호 사장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과 미국이 사전에 몰랐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전자가 후자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적 연관성이 없는 두 사실을 병렬적으로 나열해 결론을 유도하는 데 어떤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국정조사에서도 김천호 사장의 1차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미군 사전인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 정부가 고 김선일씨의 피랍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추정되는 6월21일 이전에 미국이 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였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이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추가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됨. … 판단근거 - 6월2일 AP통신이 바그다드 지국이 고 김선일씨 피랍사실이 녹화된 테이프를 입수한 사실이 밝혀졌는바, 이라크에서 가장 막강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미국이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임. 고 김선일씨 피랍 당시 미국계 회사인 KBR 소속 차량이 함께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있고, 6월10일 김천호 가나무역 사장이 가나무역 원청업체인 미국회사 AAFES에 고 김선일씨 실종에 관해 문의한 사실이 있음.’ (국회 국정조사 결과보고서 36쪽에서 인용·강조는 필자)
중요한 것은 가나무역이 미군 AAFES에 군납을 하고 있던 업체라는 점과 여러 증언에서 나왔듯이 김선일씨 납치사실을 AAFES의 매니저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미군이 알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미군의 사전인지 여부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외교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미 국방부 한국담당관이 ‘(AAFES 매니저인) 짐이 MP 등 미군 당국에 별도로 보고했다면 상황은 달라지니 이 부분에 대해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데 동감 표시’라고 한 내용이 있다. 따라서 이 후속조치를 확인한 후에야 미군의 사전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외교부에 보낸 전문에는 ‘미 관리 마이크 월시의 개인적 의견 : 실무선에서 실수하거나 상부 보고가 지연될 수는 있음. 그러나 파병문제 때문에 고의은폐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움’이라는 보고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나는 짐이 MP나 미군에 보고했는지 여부, 다른 하나는 보고받은 MP나 미군이 ‘실수하거나 상부에 보고를 지연’했는지 여부다. 이와 관련해 조사하기 전에는 미군이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다만 미군이 사전에 알았는데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정황’은 분명히 있다.
따라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보낸 전문 내용과 상황을 종합해보면 필요한 것은 ‘미군이 사전에 인지하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미군이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감사원은 이와 관련해 ‘외교부가 미국 정부로부터 우선 이 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 옳다. 이는 파병의 목적인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미군이 운영하는 군납업체의 매니저 한 명에 대한 조사결과도 전달받지 못한다면 어떤 한미동맹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교부는 끝내 AAFES의 매니저 짐에 대한 미국 정부의 확인결과를 통보받지 못했고, 감사원은 이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위에서 인용한 주미 한국대사관 전문은 6월24일에서 7월2일 사이 주미 한국대사관이 외교통상부에 보낸 전문의 일부다. 국정조사 당시 특위위원들이 단 한 시간 동안 자료를 열람하고 확인한 위 내용을 감사원이 몰랐다면, 감사결과 전체에 대한 신뢰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원은 위 전문내용에 대한 판단과 조사결과를 밝혔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결과발표 어디에도 없다. 이 문제는 뒤에 나올 이라크 대사관에서 보낸 공문과 함께 감사원이 제대로 감사한 것인지 회의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 지시 불이행은 책임 없다?
감사원은 ‘AP통신 서울지국의 김선일 실종문의에 대한 조치 태만’으로 정 모 외무관이 ‘상부 보고 및 해당 영사과 또는 중동과에 확인도 하지 아니하고 무책임하게 지나침으로써 정부가 조기에 인지할 수 있는 기회를 일실’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재외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전화문의에 대한 답변을 태만히 한 6등급 외무관 정모 징계’를 요구했다.
4월8일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은 테러관련 관계장관 대책회의에서 “해외 국민 테러에 관한 사소한 것도 보고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청문회에서 밝혀졌듯 외교부 주요 간부들은 이 지시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정 외무관을 비롯한 외교부 직원에게는 지시사실을 전달하지 않았다. 다음은 청문회에서 질의응답한 관련 내용이다.
윤호중 위원 : 4월 재외국민 테러와 관련된 첩보를 입수하면 즉시 보고하라는 총리의 훈령(대통령권한대행의 지시사항을 의미·필자 주)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맞지요?
증인 신봉길(외교부 공보관) : 예, 그렇습니다.
윤호중 위원 : 그런 총리의 훈령을 정 증인(AP 통신과 통화한 외교부 직원)에게 전달했습니까?
증인 신봉길 : 총리의 훈령을 구체적으로 전달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원은 전화통화 내용을 ‘상부 보고 및 해당 영사과 또는 중동과에 확인’했다면 ‘정부가 조기에 인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정 외무관에 대한 징계만을 요청하고 있다. 이 논리대로라면 외교부의 주요 간부들이 대통령권한대행의 지시사실을 전직원에게 알렸다면 정 외무관은 이라크교민 실종문의 전화를 받은 뒤 바로 상부에 보고하거나 해당 영사과나 중동과에 확인했을 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감사원의 결론대로 ‘재외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를 태만히 다룬’ 사람은 정 외무관뿐 아니라 지휘감독 책임이 있는 장관, 차관, 공보관, 영사국장, 아중동국장 등 외교부 간부도 포함되어야 한다. 정 외무관은 실수를 했을 뿐이지만 외교부 간부들은 대통령권한대행의 지시사항을 무시했다.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는지는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6월29일 5명으로 구성된 감사원 조사단이 주이라크 대사관을 상대로 김선일씨 사건의 대응태세를 조사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출국했다.
외교부의 거짓말
감사원은 짧은 시한 등으로 인해 정부의 석방노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정부의 파병원칙 재천명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간의 한계, 그리고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대해 이의를 달지는 않겠다. 하지만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테러사건 발생시 언론에 협조 요청’하는 지침을 ‘테러관련 재외국민보호 매뉴얼’에 반영하도록 통보’한다는 결론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 ‘테러관련 재외국민보호 매뉴얼’에는 이미 ‘언론통제’ 조항이 있다. 이 매뉴얼 단계별 조치사항을 보면 초동조치 단계에서 ‘사태 완전파악시까지 언론보도 통제’라고 되어 있다. 반영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 문제일 뿐이다. 감사원이 과연 ‘테러관련 재외국민보호 매뉴얼’을 제대로 읽어보기라도 한 것인지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살해위협 방송 이후의 정부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김선일씨 납치시점을 각 정부기관이 언제 알았느냐는 점이다. 김천호 사장이 납치시점을 6월17일에서 5월31일로 번복 진술한 상황에서, 이 사실을 외교부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언제 알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청문회 증언이나 정황으로 볼 때 NSC는 정확한 김선일 피랍날짜를 김선일 사망 이후에야 알았다. 이것이 정상인지, 정상이 아니라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국정조사에서 확인된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에서 외교부 본부로 보낸 공문에 따르면 외교부에서 납치시점 인지사실을 감추려고 한 정황이 드러난다. 청문회에서 외교부 간부는 처음에는 이와 관련된 공문을 보고받지 않았다고 거짓증언을 했다. 이에 대해 감사원이 감사하지 않고서는 6월21일 알자지라 방송 이후의 정부 대응에 대해 근본적인 조사를 할 수 없다. 김선일씨가 살해된 직후 작성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고도 아무런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면 감사원 조사관 자격에 이상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1. 연호, 금 6월22일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당관과의 면담시 재진술한 바에 따르면 김선일이 5월31일자로 납치된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연호 납치일자와 상충됨으로써 일단 김 사장에게 납치일자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게끔 조치해놓고 있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지 KBS 및 MBC는 납치일자가 5월31일이 아닌지에 관해 당관에 확인을 요청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추가정보가 없는 상태라고만 대응하였는바, 앞으로 납치일자 문제로 인한 파장이 우려되오니 동 문제에 관한 본부 입장 회신 바람. 끝.]
문서자료 기초조사마저 부실
감사원은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테러관련 전담부서를 설치하거나 총괄부서를 지정·운영하는 내용으로 ‘직제 시행규칙’을 개정하고, 테러사건대비 비상조직의 운영이 명확하고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테러업무 매뉴얼을 개정하라고 통보’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는 테러업무 매뉴얼이 문제인지 그 매뉴얼을 다루는 사람이 문제인지에 대한 구분이 없다. 매뉴얼을 다룰 사람이 문제라면 아무리 매뉴얼을 개정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이미 완성되어 있던 매뉴얼대로 김선일씨 사건에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과연 실제로 벌어진 것과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매뉴얼을 정확하게 시행했을 경우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비교한 것이 오른쪽 표이다.
또한 감사원은 ‘테러위험이 높은 지역·국가에 대해 미리 종합적인 예방대책을 수립하도록 외교통상부 기관주의’ 조치를 내렸다. 감사원의 판단처럼 외교부가 ‘우리 군 파병 및 테러가 빈발하는 등 테러위험이 점증하는 이라크에 대하여는 사전적·종합적 보호대책이 필요한데도…사후적·단편적인 보호대책만을 수립·시행’했다면 이것은 중대한 실책이다. ‘사후적’이라는 말에 이번 사건의 핵심이 있다. 그런데 감사원의 조치사항은 ‘종합적인 예방대책 수립’이다.
종합적인 예방대책은 많았다. 대테러매뉴얼도 있고 대통령 지시사항도 있고 ‘일일점검’을 포함한 이라크 교민 안전대책도 있었다. 그러나 감사원은 그 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원인을 묻고 그 책임자를 찾아내야 했다. 그런데도 감사원이 ‘예방대책 수립 기관주의’로 결론을 내린 것은 감사원 스스로 제대로 감사하지 않았다는 자기고백일 뿐이다.
감사원은 현지공관에 대해서는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이라크대사대리 임모에 대한 징계 여부를 자체 결정하도록 인사자료 통보’라는 조치를 내린다. 이는 다른 부서와 비교할 때 매우 가혹한 조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감사원은 ‘2004년 6월9일부터 6월12일까지 공무목적으로 요르단으로 출장하는 것으로 승인받고도 실제로는 개인용무 및 친교활동에 출장일 대부분을 소비하는 등 근무기강도 해이’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임 대사는 현지부임 이후 단 하루의 휴가도 갖지 못했다. 현지 대사관 직원들도 위험한 곳에서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해 있다. 파병결정이 난 뒤 이라크 현지사정이 긴박해졌으나 외교부 간부 중 어느 한 사람 이라크 현지를 직접 방문한 적이 없다. 아무런 지원과 관심도 없다가 사건이 나자 현지대사관에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어려운 지역에 외교관으로 부임하려고 하겠는가. 외교부 본부 간부에 대한 징계요구는 전혀 없이 현지대사에 대해서만 징계를 요청한 감사원의 판단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 및 현지대사관 사정을 감안할 때 공무목적 출장에서 개인용무를 보았거나 전쟁터에서 벗어나 잠시 긴장을 푼 것이 징계요청의 사유라면, 다른 나라 공관과 비교해 열악한 근무환경을 방치한 외교부 본부의 책임은 없다고 할 수 있는지 감사원에 묻고 싶다. 이 사건 당시의 공보관과 영사국장은 이후 인사발령을 통해 영전했다.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김천호 사장의 책임을 묻는다면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선일씨가 피랍되기 3주 전인 5월10일, 가나무역 직원에 대한 테러첩보를 입수하고도 이를 외교부에 전달하지 않은 국정원의 책임문제다.
감사원은 감사결과를 정리하면서 김천호 사장이 위험지역에서 실종된 직원에 대한 구출노력보다 사업에 더 열중했기 때문에 ‘검찰총장에게 김천호의 행위가 형법 제271조(유기죄)에 위배되는지를 수사요청’했다. 민간기업 사장이 직원을 구출하기 위해 제대로 노력했는지에 대한 판단이 감사원의 감사목적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김 사장을 검찰에 고발하는 일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나 ‘위기관리시스템의 개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만약 김 사장을 검찰에 고발한다면, 같은 논리로 5월10일 첩보를 소홀히 하고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국정원과 외교통상부 간부에 대해서도 ‘직무유기’ 여부를 수사요청해야 한다. 2004년 1월1일부터 7월10일까지 국정원 본부가 해외거점에서 입수한 이라크내 테러관련 첩보 가운데 이라크 한국교민을 목표로 한 테러첩보는 모두 13건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이 바로 5월10일 입수된 가나무역 테러관련 첩보였다. 대통령권한대행의 지시가 있었으나 그러한 첩보를 청와대나 NSC, 외교부, 국방부 아무데도 보고하지 않은 국정원의 책임이 김천호 사장의 책임보다 미약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감사원의 판단인가.
테러의 원인부터 없애야
감사원은 결과발표를 통해 이번 감사의 의미를 ‘국민 앞에 전혀 그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외교안보 라인의 운영체계를 김선일씨의 피랍과 죽음을 계기로 검증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정리한 바 있다. 즉 이번 감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국민이 전혀 알 수 없는 음지에서 진행돼온 외교안보 운영체계가 과연 국민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지를 양지에서 비춰보는, 최초의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평가에도 국회 국정조사 특위에 참가해 감사원의 기관보고와 청문회를 지켜본 본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감사원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감사를 진행했다. 기본적인 문건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조사대상기관에서 제출한 자료(테러관련 재외국민보호 매뉴얼에서 언론관련 부분을 의미)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 없이 감사가 진행된 것이다. 한 국가의 외교안보체제에 대해 감사를 벌이면서 어떻게 가장 기초적인 자료도 부실하게 검토할 수 있었는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감사 결과에서 실체적 진실을 찾는 것은 서로 민망한 일이다.
둘째, 감사원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외교안보 라인의 운영체계가 가진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한 결과, 다음에 또 이번 사건과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감사원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국정조사도 끝났고 감사원 감사도 끝났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선일씨 사건도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테러단체에서 한국인과 자이툰 부대원에게 현상금을 걸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재외국민 테러뿐 아니라 본국 내의 테러가 가시화되는 형국,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테러를 방지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테러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 아닌가. 바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재외국민이 테러로 죽은 다음에야 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감사는 이번으로 끝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