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간첩 누명 쓰고 혹독한 고문받은 두 여인의 ‘잃어버린 30년’

“벗겨진 가슴 막대기로 찔러대며 ‘이북 갔다왔다고 하면 옷 주지’…”

  • 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4-10-26 19: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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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1971년,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들이 살림을 돌보던 두 여인을 어디론가로 끌고갔다. 이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일주일 넘게 온갖 폭언과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고정간첩 혐의 때문이었다. 미혼의 젊은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성학대까지 받았다. 이들은 33년 전의 일을 털어놓는 동안 온몸을 떨며 오열했다. 한 여인은 인터뷰를 마친 뒤 결국 실신했다.
    간첩 누명 쓰고 혹독한 고문받은 두 여인의 ‘잃어버린 30년’

    간첩으로 오인돼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정례(왼쪽)씨와 강덕례씨. 김씨는 얼굴이 밝혀지는 걸 꺼려 모자이크 처리했다.

    지난 7월 ‘신동아’ 편집실로 한 건의 제보가 날아들었다. 30여년 전에 일어난 ‘간첩조작 고문의혹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제보자는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에 사는 김기웅(46)씨.

    ‘1971년 9월21일, 전남 여천군(현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 작은 섬마을에서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섬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양 자식과 남편밖에 모르고 사시던 저의 어머니 강덕례(당시 32세)와 막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아름답던 사촌누나 김정례(당시 26세)가 가사 일을 보고 있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 15명에 의해 영장도 없이 질질 끌려간 것입니다. 당시 화정면사무소(전남 여수시 화정면)에 근무하던 큰아버지(김익환) 또한 군수실에서 호출이 와서 나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정보요원 두 명에게 바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여수시 관문동 소재 여천군청 관사로 끌려간 어머니와 사촌누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캄캄한 방에 따로따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어 김씨는 세 사람에게 가해진 섬뜩하고 충격적인 고문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곳에서 어머니와 사촌누나는 치욕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특히 사촌누나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성학대까지 받았습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어머니는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으며 다리를 온전히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촌누나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터라, 낯선 남자 앞에서 알몸으로 고문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까지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병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싸워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려지는데, 우리 가족은 고정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 말한마디, 하소연 한번 못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에게 행해서는 안 되는 잔인한 고문을 했던 자들은 지금 잘살고 있겠지요. 자유민주국가에 사는 국민으로서 침해받은 인권과 박탈당한 행복추구권을 찾고 큰아버지, 어머니와 사촌누나의 삶을 되찾고자 하니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4 용지 두 장 반 분량의 제보 내용을 읽고 나니 막막했다. 33년 전 일이니 고문 피해자들은 이미 60∼70대가 되었을 터였다. 또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구체적인 정황과 피해사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을지, 입증할 만한 물증이나 증인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더욱이 가해 당사자로 지목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이 소속과 신분을 밝혔을 리 없을 것이기에 무척 난감했다. 그나마 글 끝에서 김씨 가족을 고정간첩으로 지목해 신고한 사람이 ‘현재 여수에서 회사를 경영중’이라고 밝힌 부분이 사건의 실마리를 잡는 단서가 될 것 같았다.

    부역자 안다는 이유로 끌려가

    일단 제보자 김씨와 연락을 취했다. 김씨는 고문 피해자 강덕례, 김정례씨가 현재 서울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김씨는 “언제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러 갈 것인지 미리 내게 연락해달라. 그러면 내가 약속시간을 정해 알려주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강덕례, 김정례 두 사람은 지금도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낯선 사람의 전화는 일절 받지 않으며 가족이 아니면 대문도 절대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8월27일, 어렵게 약속을 정하고 신도림역 근처의 한 아파트로 이들을 찾아갔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준 사람은 김정례씨였다. 거실로 들어서자 ‘10년 만의 폭염’이라는 날씨에도 강씨가 거실에 이부자리를 편 채 누워 있었다. 그는 “척추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짜가 미뤄져 몸이 불편한 상태”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한숨 끝에 강씨가 말문을 열었다.

    “그날 오전 11시쯤 되었을까. 밭에서 돌아오는 길에 낯선 남자 여럿이 시숙(김익환 지칭) 집에 들어가 마구잡이로 뒤져 쑥대밭을 만들어놓는 걸 보았다. 놀라서 우리 마당(김익환씨 집과 강씨 집은 한쪽 담이 터진 채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으로 뛰어가 그 사실을 말했더니 애아버지(김기웅씨의 아버지 고 김인환씨)가 득달같이 큰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한 남자가 애아버지한테 ‘골통을 부숴버리겠다’고 고함을 치며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놈들은 옷이고 시숙 책이고 할 것 없이 다 땅바닥에 팽개쳐놓고 구둣발로 밟고 다녔다. 하다못해 부엌 아궁이 속 재와 화장실 똥통까지 막대기로 휘저었다.”

    남자들은 마을 앞 부두에서 강씨를 경비정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갔다. 김익환씨의 부인과 조카 김정례씨는 강씨보다 하루 앞서 끌려간 상태였다.

    “형님(김익환씨 부인)은 이름자도 못 쓰고 묻는 말에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니까 그놈들도 답답했던지 바로 풀어줬지만 나는 일주일 가까이 잡혀 있었다.”

    당시 화정면사무소에서 부면장으로 근무하던 김익환(75)씨는 집안 식구들이 고정간첩 누명을 쓰게 된 것은 자기집 머슴이었던 이기철(가명·당시 나이 30대 중후반으로 추측)씨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한국전쟁 당시 마을 인민위원회에서 부역자로 일하다 전쟁이 끝나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강씨는 “내가 시집왔을 때 이씨는 없었다. 집안 사람들 얘기를 통해서만 이씨를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저고리 한 감을 끊어들고 시숙 집을 찾아왔다. 그때 일이 빌미가 돼서 간첩질했다는 소리를 들을 줄 누가 알았겠냐”며 한숨을 쉬었다.

    “‘이기철에게 밥을 해줬나’ ‘이기철이 잘 방을 닦아주고 이부자리까지 펴줬지’ ‘보리밭 매러 가서 이기철이 간첩이라는 소릴 한 적 있지’라고 말하면서 몽둥이로 패고 발로 차고 닦달을 해대는데 그 고초를 어찌 말로 다하겠나. ‘간첩에게 밥해먹이고 재워줬으니 그간 얼마나 통간을 하고 살았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머리채를 잡고 책상에 처박는데 몇 번을 까무러쳤는지 모른다.

    또 ‘황○○를 아느냐’고 묻고는 ‘황○○이 말하기를 네가 보리밭에서 이기철은 간첩이라고 했다더라. 그래서 너를 잡아다 취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낯선 남자들이 시숙 집을 뒤질 때 황○○ 아버지가 손자 손을 잡고 담 너머로 우리집 안을 살피던 일이 기억났다. 그 시간이면 사람들이 다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나가서 동네가 텅 비는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내가 그놈들한테 끌려갈 때도 동네사람은 하나도 안 보였다.”

    원래 황○○(62)씨 집과 강씨 집은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두 집안은 자주 왕래하며 가족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황씨는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머리채 패대기치며 알몸 고문

    강씨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정례씨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작은어머니보다 하루 먼저 서너 명의 남자한테 끌려갔다. ‘네가 김정순이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남자 두 명이 양쪽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어릴 적부터 ‘정순’으로 불리던 김씨는 조사관들에 의해 자신의 호적 이름이 ‘정례’인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배에서 내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 멈췄다. 눈을 가린 천을 풀어줘 주위를 살펴봤더니 책상 하나가 놓여 있는 조그만 방이더라. 천장에 매달린 전구에 불이 켜져 있었고 남자 한 명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끌려온 김씨는 공포심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이기철과 붙어다니면서 일본과 이북을 몇 번 드나들었는지 불라’고 하는데 기가 막혔다. ‘그런 적 없다’고 했더니 대뜸 머리채를 잡아 방바닥에 패대기치면서 고문을 했다.”

    밥을 먹은 기억도 없고 24시간 켜져 있는 전구 불 때문에 밤인지 낮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는 김씨. 그때 일을 다시 겪기라도 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그가 갑자기 가슴께 옷자락을 움켜쥐더니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던 김씨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문당하는 동안 수십 번도 더 까무러쳤다. 어느 날은 깨보니까 알몸인 채로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팬티까지도. 조사관이 다가오더니 막대기로 양쪽 가슴을 쿡쿡 찌르면서 히죽거렸다. ‘이기철이 간첩이라고 하면 옷 주지’ ‘이북 갔다왔다고 불면 몸 가리게 수건이라도 한 장 줄텐데’라면서.”

    김씨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한참 후 다시 이어진 대화에서 김씨가 옮긴 조사관의 말은 잔혹하기 짝이 없다.

    “네가 그러고도 살아서 나갈 것 같으냐? 그깟 몸뚱이 발가벗겨진 게 뭐 그리 대단하냐. 이북 몇 번 갔다왔어? 말 안 해? 작대기로 밑구멍을 쑤셔 목구멍으로 빼낼 년아. 바른대로 불지 못해? 이 젖통을 도려낼 년. 여기서 너 하나 죽이는 건 쥐새끼를 죽여 없애는 것보다 쉬워.”

    일주일 넘게 온갖 회유와 협박, 고문이 이어졌지만 김씨는 끝내 간첩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땐 순진해서 거짓말도 할 줄 몰랐다고 했다.

    발설 않겠다는 각서 쓰고 풀려나

    김씨와 강씨에 이어 김익환씨가 관사로 끌려왔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돼 면사무소에서 연락을 받고 급히 여천군청 군수실로 갔다.

    “군수실로 올라가니까 군수와 군청 내무과장인 이교상, 행정계장 임신택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또 강성준(가명)과 차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두 사람과 함께 군청 관사로 갔다. 강성준은 경찰관이었는데 아마도 정보원이었던 것 같다. 차씨는 조사받을 때 함께 있었는데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당시 군수실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틀 뒤 내무과장과 행정계장이 관사로 찾아와서 조사관들에게 ‘김익환은 대한민국 모범공무원으로 상도 받은 사람이니까 좀 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간첩 누명 쓰고 혹독한 고문받은 두 여인의 ‘잃어버린 30년’

    1971년 당시 전남 여천군 화정면 백아리 마을 앞 선착장. 김정례, 강덕례씨는 이곳에서 경비정에 태워진 채 여천군청 관사로 끌려가 고문에 시달렸다.

    김씨가 관사에 들어가 의자에 앉자마자 몽둥이찜질이 쏟아졌다. 영문도 모른 채 맞으면서 김씨는 “법치국가에서 이런 일이 어딨나, 나 국가공무원이다”라고 소리쳤다. 김씨는 연행되기 나흘 전 대구시민회관에서 모범공무원에게 주는 ‘상록수공무원’ 표창장을 받은 터였다.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씨는 조사받는 동안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듣고 가족들이 잡혀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와 가족들은 이기철씨가 보낸 편지 한 통으로 간신히 간첩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모진 고문을 받던 중 김익환씨 머리에 갑자기 편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조사관들이 편지 겉봉의 주소를 추적해 이기철을 잡아왔다. 곧 이씨의 행적이 밝혀졌는데, 그는 우리 집에서 사라진 뒤 바로 경찰에 가서 인민위원회에서 부역한 일을 자수하고 통영으로 동생을 찾으러 갔다고 한다. 동생은 못 찾았지만 그는 그냥 그곳에 눌러 앉았다. 편지에도 통영에서 결혼해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썼다. 당시 이씨 동생이 통영경찰서에 있다고 들었는데 조사관들이 왜 사전에 이씨를 찾아내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고문당한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으며 황○○씨 등에게 시비를 따지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관사를 나오던 김씨는 복도에서 이기철씨와 잠시 마주쳤다. 이때 김씨는 이씨가 고춧가룻물로 고문당한 걸 알았다고 한다. 김씨는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이기철씨에게 차비로 줬다.

    “그 사람도 안된 사람이다. 배운 것도 없이 우직하기만 한 사람이었는데, 우리처럼 아무 죄도 없이 끌려와서 고초를 당한 것 아닌가” 하며 김씨는 씁쓸해했다.

    일단 풀려나기는 했지만 아무런 잘못 없이 자신의 아내와 제수(강덕례), 조카(김정례)까지 끌려가 고문당한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분노했다.

    “나는 물론이고 제수씨나 정례도 지금까지 고문당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어올라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30년 넘게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았다. 이렇게 비참한 현실이 어디 또 있겠는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우리집에 와 딸처럼 키운 정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미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이들이 입은 상처는 너무도 깊다. 제보자 김기웅씨는 특히 사촌누나인 김정례씨의 처지에 가슴 아파했다.

    “황○○씨 여동생이 사촌누나와 동갑으로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다.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우리 집 사정을 살펴서 경찰이던 남편과 친오빠한테 일러준 것 같다(이에 대해 황씨는 ‘내 동생은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정례 누나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큰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큰아버지나 어머니는 그래도 아내와 남편, 자식이라도 있었지만 누나는 정말 혼자였다. 그런데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겠는가.”

    김정례씨는 “처녀 몸으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을 겪고 난 후 수치심에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고문 후유증이 심했다. 하도 맞아서 온몸에 멍이 들었는데 손으로 누르면 살이 쑥 들어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멍만 가시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고향마을을 찾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실제로 김씨는 관사에서 풀려난 뒤 채 한 달도 안 돼 고향마을을 무작정 떠나 서울로 왔다. 겨우 차비만 손에 쥐고 가족을 떠나온 김씨의 서울 생활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식구들에겐 비밀로 하고 서울 육촌오빠 집에서 얼마간 살았다. 거기서 식당, 공사판 등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다했다. 몸이 아파서 한 가지 일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혼자 살아야했던 그 서러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나. 신문지를 깔고 다리 밑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험한 육체노동보다 더 김씨를 괴롭힌 것은 떨쳐지지 않는 수치심과 모멸감, 불안과 극도의 공포심이었다.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음 직전까지 갔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지금도 항상 방문을 열어놓는다. 밤에 잘 때도 안 닫는다. 갇혀서 고문당할 때 느꼈던 공포심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가다 황○○ 비슷한 사람만 봐도 놀라고, 그때 나를 고문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이 눈에 띄거나 비슷한 목소리만 들려도 그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혹시 누가 날 다시 잡아가지나 않을까 무섭다. 길거리를 다녀도 불안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고 두렵다.”

    간첩 누명 쓰고 혹독한 고문받은 두 여인의 ‘잃어버린 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은 강덕례씨. 그는 며칠 후 또다시 척추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강덕례씨는 고문 이후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또 한 번 척추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또 한 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 ‘6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다음은 아들 김씨의 말.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병원을 드나드셨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통증에 시달리신다. 그동안 나는 어머니와 누나가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유 없이 몇십 년 동안이나 병치레를 하는 게 이상해 꼬치꼬치 물었더니 그제서야 고문당한 일을 털어놓았다.”

    공소시효 지났다는 대답뿐

    어머니와 사촌누나가 당한 일을 알게 된 김씨는 2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관련 자료를 모았다. 수차례 고향을 드나들며 동네 사람 21명의 증언과 서명을 받아냈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정부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허탈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청와대 인터넷신문고에 글을 올리고 법률구조공단과 국가인권위원회에도 제보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이었다. 아무 죄도 없이 국가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치욕을 당하고 이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어 두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가해자 처벌은커녕 진상조사조차 할 수 없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피해자는 30년 넘게 고통당하면서 입도 벙긋 못하고 살아왔는데 가해자는 보란 듯 버젓이 활개치며 살고 있다. 자유민주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인터넷신문고에 올린 김씨의 민원은 청와대 비서실장 명의로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한법률구조공단 광주지부로 이첩됐다. 다섯 차례에 걸친 전화상담 후 인권위에서 김씨에게 보낸 최종처리 결과의 요지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것. 즉 인권위법도 형법에서 정한 법률시효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고문당한 피해자들이 관련 사실을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 풀려났고, 그 때문에 민원을 제기한 김기웅씨가 사건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3년 전이다.

    김씨가 민원을 뒤늦게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적하자 관계자는 “어떤 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새로운 후유증이 밝혀지면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년 이내에 진정해야 한다. 그 기간이 경과하면 각하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수지 김 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16년 만에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유족이 국가로부터 42억원의 배상판결을 받았다. 국가에 승소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당시 피고측인 국가는 “권리자가 권리행사를 하지 않은 채 10년 이상 지난 만큼 손해배상에 대한 권리가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서울지법 민사합의 41부·재판장 지대운 부장판사)는 판결문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원고는 (수지 김의 남편) 윤태식씨가 기소된 2001년 11월에야 진실이 조작됐음을 알게 됐으므로 피고의 주장은 이유가 없다.”

    지난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의문의 죽임을 당한 최종길 교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재판부는 수지 김 사건과 달리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두 사례를 두고 김기웅씨는 할말이 많다.

    “똑같이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누구는 재판에서 이기고, 누구는 하다못해 법정에라도 갈 수 있지 않나. 우리는 피해 당사자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데도 상담원으로부터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백 번 소송해봤자 질 게 뻔하다’는 소리만 들었다. 진상조사만이라도 해달라고 했지만 권한이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억울하고 분해도 입 다물고 살란 말인가.”

    진상조사만이라도 해달라

    2002년 8월 16대 국회의원 21명은 ‘공소시효 조항이 인권침해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전용될 수 있는 만큼, 죄에 대해선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비할 것’을 촉구하는 건의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건의안이 상정되지 못한 채 16대 국회가 막을 내렸다. 최근 17대 국회 여당을 중심으로 공소시효와 관련한 인권위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국가인권위원회측은 “특별법 제정에 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김씨 가족은 과거사 진상규명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이 최근 자체 조사 의지를 밝힌 사건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미친 것들에 한정돼 있다.

    이에 대해 김기웅씨는 “사건 관련 피해자 가족들, 가해자, 증인 등이 더 나이 들어 죽기 전에 국가기관이 나서서 진상조사만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취재를 끝내자 마치 돌덩어리를 매단 듯 마음이 무거웠다. 김씨와 그 가족들의 한 가닥 희망마저 짓밟히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황씨와 통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겨우 통화가 이뤄져도 필자가 신분을 밝히면 황씨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8월31일 오전 어렵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90분 동안 이어진 취재 내내 황씨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1971년 9월 김익환씨 가족들이 간첩 혐의로 끌려가 조사받은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

    -김씨 가족들은 당신을 간첩 신고자로 알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때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달라.

    “내가 스물아홉 살 때 일이었다. 면장님(황씨는 김익환씨를 꼬박꼬박 ‘면장님’이라고 불렀다) 가족도 나도 피해자다. 아버지가 그때 일로 일찍 돌아가셨다. 자식이 간첩신고자로 지목받는데 부모 심정이 편했겠나. 큰 불효를 저질렀다. 다만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면장님 가족이 고통을 당한 것은 죄스럽고 미안하다.”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니 무슨 뜻인가.

    “당시 나는 갓 결혼해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김두영(가명)이란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김두영과 함께 여수 부둣가에 있는 다방에서 김유덕(가명)이라는 사람과 차를 마셨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던 시기라 그와 관련된 얘기를 한참 했는데, 김유덕이 지나가는 말로 ‘주변에 전쟁 때 부역했던 사람 없냐’고 물었다. 별 생각 없이 이기철 얘기를 했다.”

    -이기철은 이미 10여년 전 마을을 떠난 사람인데 어떻게 그를 생각해냈나. 더구나 여수에 나와서 살았다면 그를 잊고 있었을 텐데.

    “식구들이 고향에 살고 있어 자주 드나들었다. 마을 아래 샘터에서 한 아주머니가 이기철 얘기를 하면서 ‘풍수지리를 봐주고 갔다’고 한 적이 있어 이 말을 김유덕에게 전한 것이다. 2~3일 뒤쯤 김유덕이 보자고 해서 김두영과 함께 다시 만났다. 그때 김유덕이 ‘내 매제가 중정(중앙정보부) 여수소장’이라고 하면서 이기철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괜한 말을 했다 싶어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는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시절이니까 별 수 없었다. 고향마을로 가서 여조카(김정례 지칭)를 만나 이기철의 행방을 물었더니 ‘오빠, 그 사람 이북으로 가버렸어요’라고 했다. 이 말을 안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들은 이상 김유덕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정례씨에게 확인한 결과 “절대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낸 적이 없고, 더구나 황씨에게 직접 얘기한 사실도 기억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집 떠난 지 10여년도 더 된 이기철씨가 이북으로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며칠 뒤 중앙정보부 사무실로 오라는 말을 듣고 갔더니 방 한가운데 있는 문을 열었다. 거기서 잡혀온 여조카와 제수(강덕례 지칭)씨를 봤다. 일부러 나를 보여주려 한 것 같았다. ‘황○○가 다 말했다’는 식으로 미리 각본을 짠 게 아닌가 싶었다.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하소연하다가 구둣발에 걷어채이기도 했다. 이기철의 행방을 김정례한테 들었다는 말을 한 뒤 풀려났다.”

    이에 대해 김정례씨와 강덕례씨는 관사에서 황씨를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김익환씨만이 관사에서 조사받을 때 황씨를 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익환씨는 관사가 중앙정보부 임시 사무실인 걸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여수지부인지 알았나. 당시 소장 이름을 기억하나.

    “임시 사무실이 아니라 중정 여수지부인 게 맞다.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그곳이 중정 사무실인 줄을 알겠나. 중정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김유덕을 따라갔을 뿐이고, 그곳 사람들이 ‘천 소장’이라고 부르길래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군 보안대를 거쳐 1971년 당시 중앙 언론사 여수 주재기자로 있던 이모(60)씨는 당시 군청 관사가 중앙정보부 여수지부 사무실이었고, 책임자가 ‘천 소장’임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이씨도 그의 이름까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앞서 말한 김두영씨나 김유덕씨는 지금도 연락이 닿나.

    “사건 와중에 김유덕을 찾아가 따진 적이 있다. ‘면장님 가족이 간첩이라고 신고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당신이 이기철의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해서 그런 것뿐인데 왜 나를 신고자로 만들었냐’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나중에 김두영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한 20년 전쯤 일이다. 사건 직후 김유덕을 죽여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여수를 뒤졌는데 이미 서울로 도망갔다는 얘기만 들었다.

    당시 여수 중앙동에 남도여관이 있었는데, 천 소장이 그곳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사건 초기 김유덕한테 따지고 나서 곧바로 남도여관으로 천 소장을 찾아갔다. ‘중정에서 이기철 행방을 알아보면 금방 알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 찾지 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고통을 주냐,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했다. 나도 기가 막히고 죄스러웠다.”

    -김익환씨 가족을 간첩으로 지목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기철의 행방을 수소문해줬는데 그후로 김씨 가족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 적이 있나.

    “면장님께 사죄하진 못했다. 대신 형님(김기웅씨의 아버지 김인환씨) 집으로 한번 찾아가 용서를 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 받아주시더라. 그래서 세상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도 고통을 많이 받았다. 여수든 고향마을이든 좁은 시골마을인데 소문이 안 퍼졌겠나. 어찌됐든 내 잘못이다. 믿어주든 아니든 면장님 집안에 진작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오해를 풀었어야 했는데….”

    -그때 사건과 관련해 억울한 심정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정말 정부가 야속하다. 제보를 받았으면 자신들이 철저히 조사를 해봐야지 무턱대고 사람을 끌어다 고문하는 법이 어디 있나. 한때는 면장님과 함께 법정문제로 만들어서 정부를 상대로 소를 제기해 사실을 밝힐까도 생각했지만 그땐 변호사를 살 돈도 없었고, 또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면장님 가족이 있는데 내가 나서는 것도 뭣하고 해서 그만뒀다.”

    -김익환씨도 여수에 살고 있고, 고향마을을 드나들다 보면 그 가족들과도 부딪칠 때가 있을 것 같다.

    “면장님은 여수에서 지금도 가끔 마주치는데 인사하면 그냥 지나치신다. 참 가슴이 아프다. 면장님은 우리 마을에서 지방공무원으로 녹을 먹던 분이고, 그에 비하면 나는 한참 저 밑의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작정하고 그분께 해될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그분 가족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다 내 잘못이다.”

    -당시 간첩을 신고하면 포상금이 수천만원이었다고 하는데 보상금은 어떻게 됐나.

    “나는 공연히 말 한마디 잘못해서 뒤집어썼다. 포상금을 받았다면 김유덕이 받았겠지. 게다가 면장님 댁이 간첩과 전혀 관련 없고 이기철도 무죄로 풀려났는데 포상금이 나왔겠나.”

    인터뷰 내내 얼굴이 굳어 있던 황씨가 착잡한 표정으로 “평소 내가 형님이라 부르고 날 친동생처럼 예뻐해주었는데…. 내가 기구한 운명인가 보다”라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며칠 뒤 황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면장님 가족을 간첩이라고 신고한 것은 아니지만 내 말 한 마디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고통을 드렸다. 절대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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