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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기행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50년 롱런 선거 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내 작품”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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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수경찰서에 복귀한 그는 경찰서 뒤뜰에 널린 시체를 유족에게 인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시신들이 심하게 부패해 마스크를 세 겹이나 해도 역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이후 더욱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1948년 11월1일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려 반란가담자들을 즉결처분했다. 그중 대다수는 가담 의혹만 있을 뿐인 양민들로,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기도 하고 권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회의를 느낀 신 박사는 경찰직을 그만둔다.

법관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변호사시험 자료를 챙겨들고 한산사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했고 1950년 제1회 고등전형고시에 합격한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에서 등용을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피란지 부산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미국 유학파 거물 김우평(金佑枰·외자처장, 국회의원, 부흥부 장관 역임) 선생을 만났다.

“김우평 선생은 아내의 중부(仲父)예요. 나중에 선생이 아내를 양녀로 들였으니 내겐 장인이기도 하지요. 부산에 머물면서 김우평 선생의 개인 심부름을 맡아했어요. 주로 김구, 이시영, 송진우, 조병옥 선생 등에게 서신을 전하는 일이었지요.”

1952년 8월5일은 제2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함태영, 야당에서는 이시영, 조병옥이 후보로 나섰고 김우평 선생은 야당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결과는 자유당의 승리. 신 박사는 여수지구 범야선거대책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아 뛰었다. 그러다 2번이나 경찰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몽둥이로 때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것은 보통이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고문,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 끼우고 누르기 등 정말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이승만 반대자는 죽여도 된다’며 위협하기도 했어요.”

“정말 못살겠다” “다 갈아치우자”

1955년 9월19일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신영길 박사는 창당 준비위원으로 참가했다. 창당 7개월 만에 민주당은 신익희, 장면을 후보로 내세워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치른다. 그는 여수·여천지구 선전부장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에서는 내게 선거와 관련된 표어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음식점이 많이 모여 있던 번화가에 갔다가 식당 주인과 손님 사이에 싸움이 난 걸 봤거든. 그런데 ‘정말 못살겠다’ ‘싹 다 갈아치우자’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못살겠다, 갈아치우자’? 옳지! 이거다. 바로 메모를 했어요.”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선거기간 내내 민초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그 유명한 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타계하고 극심한 선거부정까지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은 3선에 성공하고 만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그는 또 한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민주당은 조병옥,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지만 선거일을 한 달 앞둔 2월15일 미국을 방문중이던 조병옥이 심장마비로 급서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에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고 자유당 역시 이기붕 후보를 부통령에 당선시키겠다는 목표로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지른다.

선거운동을 벌이던 신 박사는 2월29일 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한 사람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는다.

“갑자기 안방에 들어오더니 ‘사찰계에서 당신 사진을 수십 장 복사하는 것을 보았으니 빨리 피신하시오’라고 했어요. 심상치 않아 이틀 후 부산으로 피신했지. 그런데 3월10일자 신문에 ‘여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서 재정부장 김용호씨가 폭한 11명에게 구타당해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민주당 중앙당에서는 ‘단순한 살인이 아닌 불법선거를 강행키 위한 사건’이라고 단정하고 정부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나는 김용호 부장 빈소에 찾아가 한없이 울었어요. 그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나와 김 부장은 인상과 체격이 너무도 닮아 가까운 지인들도 헷갈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

극심한 선거부정에 민심은 흉흉해져갔다.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자 마침내 분노는 폭발했고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승만 치하에서 내가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고문으로 오른쪽 종아리뼈가 부러져서 지금도 장애인 신세죠. 4·19혁명 이후 경찰에서 다시 일해보겠냐고 제의했지만 고문받던 기억이 떠올라 거절했습니다. 얼마 후 외자청에서 주사(主事)를 공개 채용한다는 공고가 났고 곧바로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공무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요.”

‘강제저축 원흉’

1960년 8월25일 신 박사는 외자청 경기사무소에 주사로 발령받았다. 다음해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국세조사 전담국인 통계국 편수과를 지원해 자리를 옮겼다.

1961년 5월28일 ‘증권파동’이 터졌다. 당시 주가 폭등이 계속돼 ‘증권이 봉’이라는 말이 나오던 상황에서 갑자기 폭락세로 급전한 것이다. 신 박사는 고가의 정부 주식이 돌연 폭락한 원인을 밝히는 업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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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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