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년 6월10일 순종 임금의 국장(國葬)을 전후해 조선 여성들 사이에서는 무명상복인 ‘깃옷’이 유행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그해 봄철 유행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국가적 변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봄이 무르익던 4월26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승하한 것이다.
그러자 평소에는 왕실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던 조선 민중과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사태가 벌어졌다. 순종의 ‘병세 위독’ 소식이 알려진 4월 하순부터 전국적으로 애도와 추모의 분위기가 일더니, 4월27일부터 국장이 치러진 6월까지(국장은 6월10일) 조선 사회는 대단한 신드롬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중은 순종의 죽음을 통해 조선 왕실의 몰락을 보면서 새삼 국가 상실의 회한을 느꼈던 것일까. 국왕에 대한 추모와 민족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는 남녀노소 계급계층을 가리지 않고 크게 번졌다. 언론도 이러한 분위기 확산에 단단히 한몫했다. 각종 매체들은 앞다퉈 왕실과 ‘이왕(李王) 전하’의 사진을 싣고 임종 당시와 임종 후 왕실의 분위기를 상세히 보도했다.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통해 썰물처럼 밀려나가던 ‘봉건’과 밀물처럼 들어오던 ‘근대’가 부딪쳐 해일을 일으켰다. 조선 왕실과 임금은 봉건과 유교적 지배의 마지막 표상이자 망국의 상징이었다. 대다수 민중에게 공화주의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표상은 대단히 민족주의적이며 동시에 대중적이었다.
순종의 승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서울 북촌 상가들은 모두 철시했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구(舊)대한제국의 관료들도 서울로 속속 모여들었다. 화류촌과 요정도 모두 ‘근신’에 들어가 일거에 서울이 ‘적적’해졌는데, 유명한 고급 식당이던 ‘식도원’은 계속 영업을 해서 시민들이 ‘열받기도’ 했다고 한다. 기생들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가 자진 휴업을 결정했으나 총독부 당국은 은행의 휴업만큼은 허가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 시민의 망곡(望哭 : 국상을 당하여 대궐 문 앞에서 백성들이 모여서 곡을 함)은 허락했으나, 오후 6시 이후에는 ‘절대 금지’령을 내렸다.
순종 승하에 화류촌도 ‘근신’
4월28일에 일어난 국수회(國粹會)의 모독사건은 이러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국수회는 일본의 낭인이 만든 보수 우익 조직인데, 이들 회원 10여명이 자동차를 몰고 상중인 경복궁 정문으로 돌진하여 모여 있던 궁궐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도복을 입은 자에 곤봉을 든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경찰의 제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의 자충수로 인해 사건이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더욱 확산된 것이다.
그러자 총독부 경찰은 북촌 일대와 더불어 서울 중심부에 삼엄한 경계망을 펴기 시작했다. 1926년 4월30일자 동아일보 2면의 기사는 매우 고색창연한 문학적 표현을 써서 당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기사의 첫머리에 붙은 제목은 더욱 비장한 분위기를 풍긴다.
“구중 궁외는 경위로 십중, 창일한 누해에 적등이 휘황, 통곡하는 군중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경계하는 경찰대는 밤을 낮으로 새여, 경찰의 패검은 월색과 쟁광 - 터질 것 같은 긴장과 거의 히스테릭한 슬픔의 전염병이 고조되어갔다. 경남 함안군에 살던 김영규와 최봉한은 4월29일에 기생 몇 명을 데리고 요릿집 ‘공주옥’에서 방탕히 놀다가 망곡장으로 모이던 시민들에게 발견되어 구타를 당했다. 충남 공주에서 유림과 노동자들이 연서(連暑)하여 도평의원이며 변호사인 임창수를 고소했다. 임은 29일 술을 먹다가 동석한 기생 초선이 국복 입은 것을 보고 갖은 모욕적인 발언을 하고 왕실에 대해 불경한 언행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