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가의 차남인 14대손 송윤진(오른쪽)씨와 종중이사인 11대손 송익순(왼쪽)씨.
대덕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이 고장의 인물 74명 중 송씨가 37명이나 된다. 이곳이 은진 송씨의 본거지임을 짐작케 하는 자료다. 은진 송씨가 이곳의 맹주로 자리매김한 데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72)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89)이 있다. 둘 다 문묘에 오른 성현 18인에 속한다.
송준길의 종가가 있는 곳은 행정지명도 송촌동이요, 주변아파트 단지도 ‘선비마을’이다. 종손이 기거하는 곳으로서 사대부가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정침, 사랑채, 가묘, 별묘 등을 온전하게 갖춘 종택은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송준길의 호 동춘당은 별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먼 숙질간으로 한집안인 데다 두 사람의 할머니가 자매간으로 외척이었다. 그러다 보니 송시열이 어려서부터 이곳에 와 송준길과 동문수학하며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예학(禮學)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둘의 성격은 너무나도 달랐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인물로서 조선 후기 모든 논쟁의 진원지였으며 사후에도 공과(攻過)가 거론될 만큼 ‘화약고’였던 데 반해, 송준길은 그의 호 동춘당(항상 봄과 같다는 뜻) 만큼이나 온화한 성격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예학을 아우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