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참여정부 인사시스템의 명암

투명해진 인사절차, 그러나 아직 엉성한 ‘그물망’

  • 김정훈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nghn@donga.com

    입력2005-01-24 1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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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는 만사(萬事)다. 하지만 잘못하면 망사(亡事)다.
    • 2005년 첫 개각에서 불거진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인사파동이 단적인 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출범 3년째를 맞는 참여정부 인사시스템을 짚어봤다.
    참여정부 인사시스템의 명암

    2005년 1월5일 임명장을 받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을 뒤따르고 있는 이기준 신임 교육부총리(왼쪽). 그는 참여정부의 인사시스템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 이틀 만에 자진 사퇴했다.

    2004년 7월, 안주섭 당시 국가보훈처장을 교체하려 던 청와대는 돌연 이 계획을 취소했다. 후임자로 내정된 김진 당시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검증하는 과정에 비리혐의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 전 사장이야말로 국가유공자 예우 업무를 맡는 국가보훈처의 수장으로서 가장 적격인 인물로 보았고, 인사추천회의에서도 큰 이견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 정권에서 대개 군 출신을 배려하던 자리인 국가보훈처장에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기용함으로써 유공자 예우의 의미를 더욱 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 김 전 사장을 0순위 후보로 꼽은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의 지휘로 진행된 마지막 검증단계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당연히 국가보훈처장 내정은 취소됐고, 비리첩보는 검찰에 넘겨졌다. 김 전 사장에겐 장관급인 보훈처장으로 승천할 수 있던 기회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올가미가 되고 만 셈이다. 만일 김 전 사장이 국가보훈처장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면, 검증작업은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고 화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이 일로 인해 이미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던 안주섭 당시 처장은 2개월을 더 재임했다. 한 차례 경을 친 청와대가 새로운 보훈처장 감을 물색하면서 더욱 엄격한 검증작업을 벌이느라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중이던 2004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손자이자 광복군 사령관 박시창 선생의 아들인 박유철 현 처장을 임명함으로써 ‘보훈처장 인사 소동’은 끝맺을 수 있었다.

    최근의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인사파동이 부실검증으로 인한 최악의 실패사례라면, 일반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보훈처장 내정 취소 소동은 인사검증의 진가를 발휘한 성공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2003년 6월 김 전 사장을 주공 사장으로 발탁하는 검증과정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당시 김 전 사장은 무엇보다 청렴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여권 내에서는 2002년 지방선거 때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한이헌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을 주공 사장으로 배려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김 전 사장은 청와대 인사추천회의에서 김구 선생의 손자라는 점과 비리가 만연한 공기업에서 4년 넘게 감사로 재직하면서 깨끗하게 처신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돼 경쟁자인 한 전 수석을 물리쳤다.

    김 전 사장의 구속사유가 된 혐의사실이 2001년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공 사장 발탁 당시 청와대는 제대로 검증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인사는 통치자의 국정 철학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일이다. 그래서 ‘인사는 만사(萬事)이자, 잘못하면 망사(亡事)’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2월 취임 때 ‘행정의 달인’인 고건씨를 삼고초려 끝에 국무총리로 기용한 것은 이른바 ‘개혁 대통령-안정 총리’라는 집권 초반의 국정운영 기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각에 개혁 성향의 인물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함으로써 관료사회에 개혁의 고삐를 죄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김우식 실장 기용은 ‘분권형’ 전주곡

    반면 탄핵사태에서 벗어난 뒤인 2004년 6월 이해찬 국무총리 기용은, 대통령 자신은 정쟁의 대결구도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분권형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들은 내각으로 끌어들여 여권 내 권력투쟁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했고, 동시에 대권 수업의 기회를 주는 효과를 노렸다.

    그에 앞서 2004년 2월 정치인 출신이 아닌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을 권력의 핵인 대통령비서실장에 기용하고 정무수석비서관직을 없앤 것, 2003년 12월 개각에서 관료 출신을 대거 기용한 것 등도 초기의 강렬하던 ‘정치색’을 엷게 하는 분권형 국정운영 기조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그만큼 최고권력자의 용인술은 국정의 풍향을 알리는 바로미터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의 흥망을 가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노무현 정부가 대통령비서실에 인사수석비서관을 별도 신설해 ‘인사업무’를 특화한 것은 인사정책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또한 추천기능과 검증기능을 분리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인사정책에 도입함으로써 고위공직자 인사의 시스템화를 최초로 시도한 것도 눈길을 끈다. 과거 정부에서는 대개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추천과 검증을 도맡았고, 각종 고위공직 인사에서는 권력 실세의 입김이 만만치 않았다.

    노 대통령이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인사파동 후속 대책의 일환으로 인사 검증업무를 부패방지위원회 같은 외부 기관에 맡기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추천’과 ‘검증’의 분리를 더욱 명확하게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사 검증 업무는 민정수석비서관실의 공직기강비서관실이 맡아왔고, 실제 검증은 국가정보원의 사정팀이나 국세청, 경찰 등 사정기관을 손발로 활용해왔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해 실험중인 인사시스템은 대체로 미국 백악관의 시스템을 차용한 것이다. 요직 인선 때 노 대통령이 직접 후보자를 면접하는 것도 백악관의 시스템과 별 다를 바 없다.

    대표적으로 노 대통령은 2003년 가을부터 연세대 김우식 총장을 세 차례나 청와대 관저로 초청해 사실상의 면접을 봤다. 김 총장이 끝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세 번째는 부부동반으로 관저에서 식사를 하면서 비서실장직 수락을 청했다고 한다. 당시 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뒤편의 구중심처에 있는 관저 앞까지 배웅을 나오면서 “여기도 사람이 살 만한 곳입니다”고 호소했고, 결국 김 실장은 대통령의 청을 받아들였다.

    김성호 부패방지위원회 사무처장(차관급)도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경우다. 2004년 1월 대구지검장으로 재임하던 김 처장은 청와대로 불려가 노 대통령이 면전에서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했다. 김 처장이 다시 대구로 내려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라디오에서는 김 처장 내정발표 뉴스가 나왔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봐 곧바로 발표해버린 것이다.

    청와대는 이밖에도 비서관급 이상은 1명씩 공직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게 제도화했다. 과거 청와대에서 사적인 라인을 통해 인사 추천이 이루어져 그로 인해 누가 누구를 밀었다, 누가 누구를 떨어뜨렸다는 식의 뒷말이 나오던 것을 아예 양성화한 것이다. 과거 정권에서 권력 실세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비선(秘線)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인사 추천 라인을 공식적인 인사추천 시스템으로 모두 끌어들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현 정부에서는 인사 로비가 매우 어려워졌다는 것이 공직 예비후보들의 하소연이다. 청와대 인사추천회의의 경우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정책실장, 시민사회·민정·홍보·인사수석비서관 6명으로 구성돼 있고 따라서 청탁을 하더라도 수석비서관 한두 명에게 부탁해서 성사될 것으로 확신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정찬용 인사수석의 ‘한숨’ 사건

    정찬용 전 인사수석비서관의 ‘한숨’ 사건은 인사 결정 시스템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2003년 가을쯤 정 수석의 절친한 친구가 어느 공기업 사장 후보에 올랐고, 정 수석의 친구들은 “찬용이가 인사수석인데, 이건 다 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인사추천회의가 열리는 날에 맞춰 미리 축하연을 준비해놓았다. 그러나 막상 회의에서는 대다수가 “사람은 훌륭하지만 그 자리의 적임자는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냈고, 다른 사람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인사추천회의 의장인 문희상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 수석이 어두운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 실장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묻자 정 수석은 “이제 나는 친구들한테 맞아죽게 생겼습니다. 지금 내 친구들은 축하연을 한다고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가서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난감합니다”라고 했다. 문 실장이 “그럼 진작에 얘기를 하지, 회의가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합니까. 재고해볼까요?”라고 물었지만, 회의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정 전 수석비서관은 나중에 “회의가 끝난 뒤에 친구 얘기를 꺼낸 것은 다른 참석자들에게 일종의 경계의 뜻으로 했던 것이다. 누구라도 친구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과연 노 대통령은 인사추천회의 결과에 어느 정도 개입할까. 노 대통령은 장관급 이상의 요직에 대해선 직접 인선 기준에 관한 지침을 내리고 있지만, 대통령이 임면권을 가진 458개 직위의 대부분은 인사추천회의의 결론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전 수석에 따르면 한번은 인사추천회의가 끝난 뒤 노 대통령에게 “A라는 사람이 가장 낫다는 결론이 났다”고 보고했고, 노 대통령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알았다”고 답했다. 정 전 수석은 곧바로 인선결과를 언론에 발표했다. 다음날 수석비서관 회의가 끝나자마자 노 대통령이 “정 수석, 좀 봅시다” 하며 집무실로 따로 불렀다. 노 대통령은 정 전 수석을 보자마자 “어제 그거 왜 발표했어요?”라고 따져 물었다. 정 전 수석이 “재가하신 거 아닙니까?”라고 하자 노 대통령은 “알았다고 했지, 오케이한 겁니까? 다시 생각해보자는 뜻이었는데, 하여튼 알았어요”라고 했다. 정 전 수석은 “나중에 알아보니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후보에 들어 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대통령도 그 정도 얘기만 할 뿐 더 깊이 관여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인사추천회의에서는 대개 2, 3명의 후보자를 압축해 노 대통령에게 건의한다. 최종 낙점은 대통령의 몫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에 단행된 국가정보원 차장 인사의 경우 각기 2, 3명의 후보자가 추천됐고 노 대통령이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 낙점하는 통상적인 절차로 진행됐다.

    인사추천회의에서는 우선 해외 담당인 1차장의 경우 국정원 내부인사를 발탁할 것인지, 아니면 해외업무에 밝은 외부인사를 기용할 것인지를 놓고 집중토론을 벌였다. 결국 내부 발탁보다는 외교관을 기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대통령외교보좌관 후보에도 올랐던 서대원 당시 외교통상부 본부대사와 유명환 필리핀 대사 2명이 1차장 후보자로 노 대통령에게 올라갔다. 노 대통령은 최종 낙점과정에 서 대사를 선택했다.

    대북 담당인 3차장 후보로는 3명이 올라갔는데 그중 30년 동안 대북파트에서 한 우물을 판 최준택 차장이 평가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고, 고영구 국정원장도 최 차장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만장일치로 최 차장이 1순위에 올랐고, 노 대통령은 인사추천회의의 결과를 그대로 수용했다.

    노무현 정부는 인사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여러 절차를 밟다 보니 인선 도중에 내정자가 노출되는 사례가 많았다. 반면 교육부총리 인사파동을 야기한 이번 1·4 개각은 보안 유지가 가장 잘된 인사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여론의 평판을 사전에 듣지 못한 이번 인사는 대형사고로 이어졌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어떤 면에서 사전 노출이 필요악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대부분의 공직 인사는 언론의 취재활동에 의해 사전에 누설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보안 유지를 위해 당사자에게도 발표 직전에야 통보한다. 2004년 7월 강금실 법무장관의 교체도 사전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채 전격적으로 발표됐는데, 그 과정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문재인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은 개각 발표 하루 전날 강 전 장관을 만났다. 그런데 노 대통령으로부터 다음날 아침 청와대에서 식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은 강 장관이 문 수석에게 “대통령께서 왜 부르시는지 모르겠다. 내일 뭘 보고했으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하더라는 것. 문 수석은 강 장관의 교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보안 유지 때문에 알려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문 수석은 강 장관에게 교체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려 밤늦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께서 장관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한 거다”라고 귀띔을 해줬다고 한다.

    이번 교육부총리 인사파동에 대해 근본적으로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확립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고위공직을 맡으려는 사람은 애초부터 공직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검증절차가 아무리 엄격하더라도 자신의 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조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신상우 전 국회 부의장은 자신의 흠을 스스로 드러내고 판단을 구한 사례로 꼽힌다. 신 전 부의장은 2003년 초 국가정보원장 후보로 거론되자 청와대측에 1960년 군 복무 시절 휴가를 나왔다가 4·19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시위 대열에 합류하느라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던 탈영 전력을 소상하게 밝히고 “나는 이런 흠이 있으니 알아서 판단해달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이번 교육부총리 인사파동의 개선대책으로 재산관계 조사를 위한 공직후보자 본인의 동의서를 받거나, 여러 항목에 걸친 설문을 해 답변서를 사전에 받는 방안을 제안한 것도 공직후보자 본인의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자신의 흠결을 감춘 채 공직을 맡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포기하게끔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제하는 수단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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