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인터넷 꼬리말 달기에 목숨건 ‘리플족’, 여자보다 인형이 더 좋은 ‘늙은이애’

  • 장옥경 자유기고가 writerjan@hanmail.net

    입력2005-01-25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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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 또 사도 성이 안 차는 쇼핑광, 테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는 공포증 환자, 휴대전화가 없으면 한시도 견디질 못하는 불안증 환자…. 정신질환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부지불식간에 미쳐가는 현대인의 정신병리학 보고서.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40대 후반의 윤현철(가명)씨는 ‘주침야활(晝寢夜活)’의 생활을 한 지 반년이 넘었다. 밤새 컴퓨터를 켜놓고 인터넷 게시판을 찾아다니며 댓글(리플)을 달다가 아이들이 등교할 무렵에야 퀭한 몰골로 잠자리에 든다. 네댓 시간 수면을 취한 뒤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밥 먹으라는 아내의 부름에도 묵묵부답이다. 그가 컴퓨터 앞을 뜨는 시간은 화장실에 갈 때뿐. 화장실에서 나오면 또 부리나케 컴퓨터 앞으로 달려간다. 꼭 분초를 다투며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 같다.

    보다 못한 아내가 다가가 무얼 하나 들여다보면, 그가 하는 일은 그저 각종 사이트를 돌며 꼬리말을 다는 것. 아내가 “한창 일해도 시원찮을 나이에 모니터 앞에서 겨우 그 짓을 하고 있냐”고 핀잔을 주자 왈칵 짜증을 내며 아내를 거칠게 내몰고는 방문까지 걸어잠갔다.

    그는 식구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건 물론 화장실도 가지 않고 방 안에서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참다 못한 아내가 보조키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빈 깡통들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기업체에 다니다 3년 전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한 윤씨는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재작년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재취업을 했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지난해 봄 다시 실직자가 됐다. 남의 이목도 있어 외출도 삼가고 하는 일 없이 소일하다 인터넷에 취미삼아 댓글을 올리게 됐다. 이 일은 어느새 그가 우울한 세상을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가 돼버렸다. 처음에는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려 글을 남겼으나, 차츰 리플을 통해 자신의 욕구좌절과 열등감을 악의적으로 분출하게 됐다.

    윤씨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인터넷 훌리건들은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대표적 집단 중 하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보다 1초라도 먼저 댓글을 올리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서너 개 이상의 댓글을 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리플족이 게시판과 블로그를 활보하고 있다.



    최병건 정신과 전문의(신경정신과 공감 원장)는 최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을 ‘정체성의 부재’로 파악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냐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는 누구의 아들, 딸로서의 역할, 누릴 수 있는 권위가 저절로 주어졌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릅니다. 가족, 국가 등 어떤 개념도 전처럼 확실하게 한 개인이 누구인지를 규정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게 된 거죠.”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식음을 전폐하며 인터넷 사이트를 전전하는 리플족, 사고 또 사도 성에 안 차는 쇼핑광은 모두 21세기가 낳은 정신질환자들이다.

    리플족은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을 달다가 곧 악의적인 욕설이나 비방을 일삼는 인터넷 훌리건이 된다. 이들의 심리상태는 다양하다.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울분과 피해의식을 못 참아 악성 리플을 다는 유형, 남을 약 올려서 상대가 흥분하는 것을 즐기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그리워서, 혹은 고독감에서 습관적으로 그런 행동에 빠져드는 유형도 있다. 이들의 행동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정체성 혼란이 깔려 있다는 게 최병건 원장의 분석이다.

    ‘선풍기 아줌마’와 ‘늙은이애’

    21세기형 정신병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갖가지 중독증이 많다는 사실이다. 성형 중독증, 쇼핑 중독증, 휴대전화 중독증…. 강한 집착은 현대인에게 드러나는 공통적인 증상이다.

    지난해 12월25일 시청자들은 SBS TV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얼굴이 선풍기만큼 커서 ‘선풍기 아줌마’로 불리는 한모(43)씨의 사연이 방영됐기 때문. 그는 예뻐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불법시술자로부터 실리콘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았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얼굴이 점점 부풀어 올라 나중에는 주입한 실리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심적인 고통으로 정신질환까지 생겼다. 그는 “넣어라”는 환청이 들릴 때마다 얼굴에 직접 파라핀, 콩기름을 주입했고 결국 얼굴이 보통사람의 세 배 정도로 커져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어졌다.

    한씨의 사례는 예뻐지고 싶은 욕망의 말로가 얼마나 참담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예쁜 외모에 집착, 한 차례 성형수술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얼굴을 뜯어고치는 신체이형증(특정 신체부위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여겨 성형수술을 반복하는 증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성형수술을 받은 김진희(가명·32)씨.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는 이별의 원인을 ‘낮은 코’에서 찾았다. 자존심을 상징하는 코가 낮아, 남자친구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코 수술을 했다. 그러자 이번엔 속쌍꺼풀 진 눈이 마음에 안 들었다. 윤곽이 또렷해진 코와 비교하면 흐릿한 인상이었다. 쌍꺼풀 라인이 분명하게 만들어지자 다음엔 입술이 문제였다. 송혜교처럼 도톰하고 귀여운 입술을 갖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지금까지 일곱 번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얼굴에 만족할 수가 없다. 특히 대인관계에서 트러블이 있거나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외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성형외과 상담실의 문을 노크했다. 걸핏하면 병원으로 찾아가 수술한 부위가 마음에 안 든다며 간호사, 의사에게 시비를 걸었다. 병원은 아예 그의 목소리만 들으면 수화기를 내려놓을 정도가 됐다.

    젊음을 고수하려는 ‘늙은이애’들의 출현도 눈여겨볼 부분. 30대 중반의 박영우(가명)씨는 행동이나 취향을 보면 영락없는 10대다. ‘헬로 키티’나 ‘마시마로’ 같은 캐릭터 인형이나 캐릭터 식기를 즐겨 사용한다. 자신이 사는 원룸은 물론 자동차 내부도 캐릭터 장난감으로 도배했다. 만화 ‘풀 하우스’의 캐릭터나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도 즐겨 입는 패션 소품 중 하나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는 곧장 아바타 숍으로 달려가 귀엽고 깜찍하고 앙증맞은 장난감들을 한아름 사 안고 돌아온다. 이미 노총각 꼬리표를 달았지만, 여성과의 교제보다는 ‘레진 킷’ 같은 미소녀 피규어 인형에 더 관심이 많고, 인형과 이야기 나눌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

    박씨가 ‘키덜트(kidult·kid + adult)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면, 45세를 넘긴 민경석(가명)씨는 각박한 현실을 버티기 위해 나이 드는 걸 거부한다. 민씨는 후배나 부하직원들 사이에 나이 얘기만 나오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사오정, 오륙도’(45세 정년, 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뜻) 같은 말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다.

    생존 위해 나이들기 거부

    늦은 결혼으로 이제 겨우 유치원, 초등학교 1학년생 자녀를 둔 그로서는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구만리 같다. 퇴직은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단어다. 그런 말이 들리면 저절로 핏대가 올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이고 싶지만, 그는 다른 전략을 택했다. 희끗희끗한 새치를 감추기 위해 염색도 하고 피부얼룩과 잔주름을 커버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스킨 스케일링을 받는다. 뱃살을 빼기 위해 퇴근 후에는 헬스클럽에 가서 열심히 복근 운동도 한다.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메트로 섹슈얼 룩을 즐겨 입는다.

    그러나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젊어 보이려 처절하게 노력하는 민씨는 밤마다 회사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 거리를 헤매는 악몽에 시달린다.

    현대 사회의 중독 현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쇼핑 중독증이다. 사고 또 사고 반납하는 쇼핑 중독증은 급기야 비극적인 살인 사건을 초래했다.

    3년 전 쇼핑 중독증에 빠진 20대 여성이 물건을 사느라 신용카드로 5000여만원을 결제하고, 3000여만원의 사채까지 썼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딸을 꾸짖었고, 그래도 버릇이 고쳐지지 않자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다. 위기를 느낀 딸은 한 인터넷 카페에 “어머니를 살해하면 아파트를 팔아 9000만원을 주겠다”며 살인을 청부했고, 결국 어머니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하루에 10개의 물건 주문

    40대 중반의 주부 김혜미(가명)씨도 쇼핑 중독증에 시달리고 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하고 나면, 습관적으로 TV 앞에 앉는다. 홈쇼핑을 보며 물건을 주문하는 것이 낙인 그는 하루라도 물건을 사지 않으면 머리가 굳어버릴 것만 같다. 어쩌다 외출할 일이 생겨 홈쇼핑 시청을 건너뛰면 좋은 물건을 할인받아 살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오늘은 무슨 물건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바깥일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초기엔 홈쇼핑을 시청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단 50분 한정 판매”니 “서둘러주세요” 같은 말만 들으면 참지 못하고 전화기 버튼을 누르게 됐다. 옷, 신발, 화장품, 액세서리, 그릇, 장식품, 지역 특산품, 매트, 건강식품, 다이어트 제품…. 그가 사들이는 물건은 종류를 셀 수도 없다.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성형 중독증’에 의한 부작용으로 정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한모씨.

    그는 하루 평균 5~10개의 물건을 주문한다. 필요한 물건도 있지만, 대개는 그대로 쌓아두고 있다. 다달이 수백만원씩 청구되는 카드대금을 갚기 위해 비과세 적금통장을 깨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남편과 싸우기도 여러 차례. 남편의 성화가 빗발치자 물건이 배달되면 포장만 뜯어보고 환불을 요청하기도 했고, 남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몰래 숨겨놓기도 했다. 이젠 공간이 부족해 더 이상 숨길 곳도 없다. 김씨는 ‘절대 사지 말아야지’ 하고 골백번도 더 다짐하지만 물건을 주문할 때 느끼는 행복감과 만족감을 잊을 수 없어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다.

    문명의 이기와 떨어져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현대인도 많다. 휴학생 황정수(가명)씨는 휴대전화가 곧 자신의 분신이다. 잠잘 때나 화장실에 갈 때, 심지어는 목욕할 때도 휴대전화를 옆에 둔다. 한시라도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할 정도다. 휴대전화는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베개 옆에 휴대전화가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고선 잠을 이룰 수도 없다.

    벨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2, 3분마다 한 번씩 전화를 열어 메시지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친구들의 연락처를 휴대전화에 저장해두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게임, 동영상을 즐기는 낙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상실의 아픔에 반쯤 넋이 나간 그는 친구들과 연락이 두절되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자 우울증에 빠졌다.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문 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 며칠 웅크리고 앉아만 있다가, 감전된 사람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벨소리가 울린다며 뛰쳐나가는 증상이 생겨났다.

    불안정한 사회, 퇴행적 문화

    ‘왜 나만 우울한 걸까?’의 저자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김혜남 신경정신과)는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가치 시스템이나 대상이 없어진 데서 21세기형 정신병의 원인을 찾았다. 마약이나 알코올 같은 약물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현상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병원을 찾는 사례도 증가했을 뿐더러, 병원을 찾기 전 단계에 이른 사람도 많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약물이나 쇼핑 중독증의 근저에는 퇴행현상이 도사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퇴행이란 사람이 어떤 장애를 만나 욕구불만 상태에 놓이면 현재 정신발달 수준 이전의 단계로 되돌아가 미숙한 행동을 취하는 심리상태를 일컫는다. 중독증에 빠짐으로써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 안에서 의기양양했던 기분을 맛보게 된다는 것.

    “성형중독자나 ‘늙은이애’가 늘어가는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퇴행 심리가 만연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회 시스템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면서 나이 드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나이 먹는 것을 굉장히 불안하고 우울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여성은 성적매력의 상실로, 남성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 것으로 여기는 거죠. 마치 거세를 당하는 충격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림의대 강동성심병원 신경정신과 한창환 교수는 “휴대전화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 쇼핑 중독 등 중독증에 빠지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 중독자는 충동적이며, 쉽게 흥분하고, 무질서하고, 좌절을 지혜롭게 이겨내기보다는 회피하는 기질이 있다.

    중독증은 좁게는 세로토닌이라는 뇌 신경조절물질의 불균형에서 기인하지만, 나아가 개인의 다양한 중독 증후군은 불안정한 사회, 퇴보적인 문화의 반영이다. 그렇기에 중독 현상은 악순환될 뿐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심각한 수위의 사회문제이지만, 제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중요하고 독특한 것이라 확신하는 절정의 순간들을 경험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개인의 ‘유일성과 중요성’을 발견할 기회를 좀체 주지 않아 중독자를 양산하고 있다.

    ‘1등’ 중심의 사회 풍토는 현대인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타인의 경탄과 찬사를 얻기 위해서는 1등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모두들 1등이 되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1등은 소수의 몫이고 나머지는 좌절을 맛봐야 한다. 1등조차 그 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이다.

    그러다 보니 심한 공허감에 시달리게 되고 남에게 보이는 거짓된 나, 과장된 나를 추구하며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눈을 잃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뚱뚱하고 늙어서 불행하다고 느끼며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고 싶어한다. 현대인이 성형 수술에 집착하고 젊어 보이려 애쓰는 건 바로 이런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점’에 집착하는 건 현대인의 불안 증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일즈맨 강성남(33·가명)씨는 잠에서 깨어나면 제일 먼저 인터넷 점술 사이트에 접속해 ‘오늘의 운세’를 읽는다. 단순한 몇 줄짜리가 아닌, 시간대별로 운의 상황을 알려주는 프리미엄급 운세라야 직성이 풀린다. 그냥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프린트해서 성경 말씀 읽듯 되새기고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막혔던 일이 풀리면서 유쾌해질 수’가 나오면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서지만, ‘움직이면 이득이 적은 날’이라는 괘가 나오면 출근조차 두려워한다. 이런 날엔 겨우 출근을 해도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을 지킨다. ‘도장 찍기 전 한 번 더 생각하라’는 지침이 나오면, 성사 직전의 계약도 미뤄버린다. ‘사고를 조심하고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날까봐 극도로 의기소침해진다.

    점에 의존해 인생을 살기는 50대 초반의 김모 주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에 본 새해 토정비결 운세가 ‘어두운 밤에 길을 가니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 데다, ‘1, 2월에 몸에 질병이 있으니 마음도 괴롭다’고 되어 있어 고민이 깊어졌다. 불안해하다가 아예 몸져누워 결국 병원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어쩜 토정비결 운세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고 무릎을 치며 더욱 철썩같이 믿는다.

    2년 전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 실업자가 된 정용만(45·가명)씨도 점이라면 끔벅 죽는다. 회사가 부도날 무렵 동료 몇 명이 단체로 용하다는 역술인 집을 찾았는데 하나같이 ‘쯧쯧’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있다가 회사가 망해 무더기로 실업자가 되자 정씨는 점을 신봉하게 되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역술인의 말에 때를 기다리며 2년여 이상을 아내에게 생계를 맡긴 채 쉬고 있다.

    사람들이 점에 빨려드는 심리에 대해 정혜신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무엇보다 불안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근원적 불안을 줄이기 위해 자기방어적 욕구에서 점을 보게 된다”고 설명한다. 최병건 원장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선 타인과의 대화가 필요한데, 운세를 건강하게 이용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점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건강한 자립에 방해를 받게 되며, 스스로의 자존을 해친다”고 말한다.

    테러 공포증, 웰빙 강박증

    새로운 문화에 따른 신종 공포증, 강박증 환자들도 생겨났다. 지난해 5월,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피살된 김선일씨의 절규를 TV로 접한 서규철(28·가명)씨는 김씨의 음성이 계속 귓가에 울려 불안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TV 뉴스나 신문을 봐도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는 테러 소식만 귀에 들려왔다. ‘알 카에다’ 조직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벌벌 떨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 생활’에 돌입한 전성태(가명)씨는 ‘로또 대박’이 일생 최대의 소망이다. 용돈이 생기면 끼니는 굶어도 로또는 산다. 온종일 로또 여섯 개의 숫자조합만 생각하고, 로또 추첨일을 앞두고는 마음이 들떠 일상생활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추첨이 끝나고 염원하던 소망이 불발하면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해졌다가 다시 로또를 사러가면서 들뜨기 시작한다. 일주일을 주기로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30대 초반의 주부 성연미(가명)씨는 참살이(웰빙)를 강조하는 매스컴 보도를 접하며 어느덧 시중의 먹을거리는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직접 유기농산물을 사다가 조리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믿을 음식이 하나도 없다고 여긴다. 이웃집에서 잔치를 했다며 음식을 줘도 탐탁지 않게 여겨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시가나 친구, 친척집에서조차 식사 한 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해야 하는 자리에선 억지로 먹긴 하지만,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모두 토해버린다. 자신뿐 아니라 집 식구들에게까지 강요해 불화도 생겨났다.

    테러 공포증, 로또 중독증, 웰빙 강박증 환자 모두 급변하는 시대가 낳은 암울한 초상이다.

    恨의 역사와 노이로제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을 연구하는 한국병리연구소 백상창 소장은 “지난 40년간 우리 사회의 정신병리학적 현상은 더욱 악화되고 위험스러워졌다”고 진단한다.

    “에리히 프롬은 1960년대 미국사회를 보고 ‘100만명의 정신병리현상’이라 표현했는데 오늘날 한국사회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미국보다 더 심화된 지경입니다.”

    그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서양인의 노이로제 밑바탕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원죄의식이, 한국인의 스트레스엔 ‘본능적 욕구를 참아온 한’이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천부경 시대에는 하늘의 뜻을 받들라고 해서 참았고, 불교시대엔 ‘너는 없다’고 해서 참았고, 유교시대에는 삼강오륜이나 삼종지도 같은 가르침을 받들며 참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까지 참고 참았는데, 해방 후 서양에서 자유사상이 유입되며 수천 년 동안 고요하게 참아온 한이 부글부글 끓어 역동적인 한으로 분출된 것이죠.”

    백 소장은 한민족이 쌓아온 본능적인 한을 크게 ‘못 먹고 배고픈 욕구를 풀어보자’는 ‘경제적 한’과 ‘억압된 나를 드러내 보이고 큰소리 쳐보자’는 ‘정치적 한’으로 나눈다. 다음은 그가 시대적으로 분류한 한국의 병리학적 증상이다.

    1960년대 5·16군사쿠데타 이후 18년간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한국은 ‘경제적인 한’은 풀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아버지의 부재 현상’이 나타났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전통정신을 계승할 사람이 없어졌음을 의미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한 세대가 양산됐다는 것. 우리 사회에 속칭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5세 이후 아버지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시기 한국의 아버지는 아침부터 새벽까지 돈 벌러 나가거나 해외로 파견근무를 떠나게 됐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모자(母子)유착 현상이 강화됐고 자녀는 성인으로서 완전한 분리개체가 되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면서는 ‘짓밟힘의 한풀이’로 대변되는 ‘정치적 한풀이’가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서양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이뤄진 민주화가 불과 20여년 사이에 이뤄지면서 부작용이 따랐다는 것. 민주화 투쟁과정에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은 좋았지만,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습성이 생겼다. 그 결과 당장의 욕구에 얽매여 먼 미래를 내다보는 시각이 결여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권 신장으로 가정에 다툼이 빈번히 일어났고, 갈등의 심화로 가정 붕괴가 일어났다.

    헬시 마인드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는 ‘이산가족의 한풀이’가 일어났다. 분단으로 흩어진 가족이 상봉하는 것은 좋았으나, 이 역시 대한민국의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그는 분석한다. 국가인권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 등 수많은 위원회가 생기고 ‘과거에 한 일은 모두 나쁘다’는 식의 인식이 퍼지면서 개인이나 집단이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게 됐다.

    이로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아보자’는 물질중독증이 확산되며 자연스럽게 권력 중독, 금전 중독, 섹스 중독, 인터넷 중독 같은 악성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됐다는 것이 백 소장의 분석이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 중에 2중, 3중 인격자가 많습니다. 오전에 회사에서 아주 얌전한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 퇴근 후 갑자기 성질을 부리고 난폭해지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사고와 감정이 일치해야 하건만, 일관성을 잃고 인격분열 증세를 보이는 사람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아내가 문을 늦게 열어줬다며 때리거나, 회사에 출근한다고 나간 사람이 며칠씩 연락이 없거나, 밤에 주차된 승용차의 타이어에 구멍을 내고 방화를 하거나, 지나가던 행인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하는 행동들이 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징후라고 할 수 있다.

    호박을 썰 때는 식칼을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도끼로 호박을 자르려 하는 무모한 행동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회윤리의식이 저하되고 양심체계, 판단기준이 무너져내리면서 사람들은 스트레스 상황에 처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백 소장의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앞으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동북아 시대를 열고자 한다면 어떤 경제정책이나 목적 없는 개혁보다는 100만의 정신병리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건강한 국가, 건강한 사회, 건강한 가정을 위해 헬시 마인드 구축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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