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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인터넷 꼬리말 달기에 목숨건 ‘리플족’, 여자보다 인형이 더 좋은 ‘늙은이애’

  • 장옥경 자유기고가 writerjan@hanmail.net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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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 또 사도 성이 안 차는 쇼핑광, 테러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는 공포증 환자, 휴대전화가 없으면 한시도 견디질 못하는 불안증 환자…. 정신질환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부지불식간에 미쳐가는 현대인의 정신병리학 보고서.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40대 후반의 윤현철(가명)씨는 ‘주침야활(晝寢夜活)’의 생활을 한 지 반년이 넘었다. 밤새 컴퓨터를 켜놓고 인터넷 게시판을 찾아다니며 댓글(리플)을 달다가 아이들이 등교할 무렵에야 퀭한 몰골로 잠자리에 든다. 네댓 시간 수면을 취한 뒤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밥 먹으라는 아내의 부름에도 묵묵부답이다. 그가 컴퓨터 앞을 뜨는 시간은 화장실에 갈 때뿐. 화장실에서 나오면 또 부리나케 컴퓨터 앞으로 달려간다. 꼭 분초를 다투며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 같다.

보다 못한 아내가 다가가 무얼 하나 들여다보면, 그가 하는 일은 그저 각종 사이트를 돌며 꼬리말을 다는 것. 아내가 “한창 일해도 시원찮을 나이에 모니터 앞에서 겨우 그 짓을 하고 있냐”고 핀잔을 주자 왈칵 짜증을 내며 아내를 거칠게 내몰고는 방문까지 걸어잠갔다.

그는 식구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건 물론 화장실도 가지 않고 방 안에서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참다 못한 아내가 보조키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빈 깡통들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기업체에 다니다 3년 전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한 윤씨는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재작년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재취업을 했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지난해 봄 다시 실직자가 됐다. 남의 이목도 있어 외출도 삼가고 하는 일 없이 소일하다 인터넷에 취미삼아 댓글을 올리게 됐다. 이 일은 어느새 그가 우울한 세상을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가 돼버렸다. 처음에는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려 글을 남겼으나, 차츰 리플을 통해 자신의 욕구좌절과 열등감을 악의적으로 분출하게 됐다.

윤씨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인터넷 훌리건들은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대표적 집단 중 하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보다 1초라도 먼저 댓글을 올리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서너 개 이상의 댓글을 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리플족이 게시판과 블로그를 활보하고 있다.



최병건 정신과 전문의(신경정신과 공감 원장)는 최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을 ‘정체성의 부재’로 파악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냐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는 누구의 아들, 딸로서의 역할, 누릴 수 있는 권위가 저절로 주어졌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릅니다. 가족, 국가 등 어떤 개념도 전처럼 확실하게 한 개인이 누구인지를 규정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게 된 거죠.”

21세기형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

식음을 전폐하며 인터넷 사이트를 전전하는 리플족, 사고 또 사도 성에 안 차는 쇼핑광은 모두 21세기가 낳은 정신질환자들이다.

리플족은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을 달다가 곧 악의적인 욕설이나 비방을 일삼는 인터넷 훌리건이 된다. 이들의 심리상태는 다양하다.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울분과 피해의식을 못 참아 악성 리플을 다는 유형, 남을 약 올려서 상대가 흥분하는 것을 즐기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그리워서, 혹은 고독감에서 습관적으로 그런 행동에 빠져드는 유형도 있다. 이들의 행동 기저에는 공통적으로 정체성 혼란이 깔려 있다는 게 최병건 원장의 분석이다.

‘선풍기 아줌마’와 ‘늙은이애’

21세기형 정신병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는 갖가지 중독증이 많다는 사실이다. 성형 중독증, 쇼핑 중독증, 휴대전화 중독증…. 강한 집착은 현대인에게 드러나는 공통적인 증상이다.

지난해 12월25일 시청자들은 SBS TV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얼굴이 선풍기만큼 커서 ‘선풍기 아줌마’로 불리는 한모(43)씨의 사연이 방영됐기 때문. 그는 예뻐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불법시술자로부터 실리콘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았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얼굴이 점점 부풀어 올라 나중에는 주입한 실리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심적인 고통으로 정신질환까지 생겼다. 그는 “넣어라”는 환청이 들릴 때마다 얼굴에 직접 파라핀, 콩기름을 주입했고 결국 얼굴이 보통사람의 세 배 정도로 커져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어졌다.

한씨의 사례는 예뻐지고 싶은 욕망의 말로가 얼마나 참담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예쁜 외모에 집착, 한 차례 성형수술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얼굴을 뜯어고치는 신체이형증(특정 신체부위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여겨 성형수술을 반복하는 증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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