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는 전제용 선장(오른쪽)과 피터 누엔씨가 LA 공항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다.
전 선장이 귀항길에 오른 건 그해 11월14일. 식료품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느라 싱가포르항에 정박해 하루를 쉬었다가 출항한 참이었다. 해가 막 넘어가는 오후 5시30분경, 싱가포르 동북쪽 200마일 지점의 남중국해상을 지날 무렵이었다.
“선장님, 저게 뭡니까?”
당직 항해사가 선박 좌측으로 떠내려가는 작은 목선 한 척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날따라 파도가 무척 높았다. 목선은 파도가 내려가면 보였다가 파도가 올라오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보트피플임이 분명했다. 광명호가 목선에 다가가자 배 위의 사람들이 손과 옷을 벗어 흔들어댔다. 구조해달라는 신호였다. 베트남이 패망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당시만 해도 공산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피플이 줄을 잇고 있었다.
‘구조냐’ ‘무시냐’ 격론
전 선장은 즉시 간부선원들을 소집했다. 광명호의 속력은 전속에서 중속으로 낮춰진 상태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긴급회의에선 ‘못 본 척할 것이냐’ 아니면 ‘구조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출항 전 회사의 지시사항은 ‘보트피플을 보더라도 무시하라’는 것이었다.
토의가 벌어지는 10분 남짓한 사이 전 선장의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 본사의 지시에 따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전 선장은 고민 끝에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기로 하고 간부들의 동의하에 ‘구조’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광명호의 뱃머리가 보트피플 쪽으로 향했다. 전 선장은 그 순간까지도 고뇌에 빠져 있었다. ‘난민들을 구조한들 표창받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목선 위에는 10여명 정도의 사람이 나와 있었다. 전 선장은 우선 1등 항해사와 1등 기관사를 목선에 내려보냈다. 식수나 식량, 기름 등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경우 부족한 식품이나 연료만 제공해주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난민들이 자신의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된다면 굳이 본사의 지시를 어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낡은 목선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엔진은 가동이 중지된 채 아예 수리가 불가능했다. 식량도 바닥이 났다. 표류상태로 나흘이나 지나면서 배는 이미 반 침수상태였다. 바다에는 벌써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항해사와 기관사의 보고를 받은 전 선장은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파도는 계속 몰아쳤고, 목선은 침몰 직전이었다. 구조가 시작됐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끌어올려졌다. 10여명 정도인 줄 알았는데 선창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힘들게 난민들을 모두 구조하고나자 사방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전 선장과 선원들은 난민들을 안정시킨 다음 인원점검에 들어갔다. 난민은 총 96명. 그중엔 임신 8개월째인 임부도 있었다. 그 다음엔 광명호의 식량과 식수 등 재고 파악에 나섰다. 우선 남녀노소와 환자를 구분했다. 조리사는 수일간 굶은 난민들에게 갑자기 밥을 먹일 수 없어 우선 따뜻한 우유와 잼을 바른 식빵을 나눠주었다.
난민을 부산에 입항시키지 말라
광명호 선원들은 이어 자신의 침실을 난민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비워줬다. 전 선장은 보트피플의 리더 격인 피터 누엔씨와 가톨릭 신부를 꿈꾸는 신학생에게만 부녀자들 구역 출입을 허용하고 다른 선원들에게는 일체 출입을 금지했다. 그 바람에 선원 24명은 기관사 침실 4곳과 통신실에서 단체숙박을 해야 했다. 난민 중 남자들은 갑판에 천막을 치고 지내게 했다.
갑자기 승선인원이 120여명으로 불어나 음식을 준비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난민 여성 중 2명이 부식준비 등 주방 일을 도왔다. 샤워실은 한번에 서너 명만 들어갈 수 있어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사용하도록 하고 남자들은 갑판에서 호스로 샤워를 했다. 전원이 모두 샤워를 하려면 꼬박 이틀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