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일본 지식인이 본 ‘한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의 파격, 日 역사인식 뒤따라야 완숙

  • 다메다 에이이치로(爲田英一郞) 일본 오비린대 교수

    입력2005-01-25 19: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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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 ‘겨울 연가’의 일본방영 이후 촉발된 일본내 한류 열기는 한일 교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놨다.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친밀도는 유례없이 높아졌다. 한국 방문도 이어진다. 왜 일본이 달라졌을까. 그리고 한류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의 대학교수가 일본 지식인의 시각으로 한류의 미래를 전망했다.[편집자]
    일본 지식인이 본 ‘한류’
    마치 둑이 무너진 것 같다. 일본의 중년여성들이 광란에 가까운 열기로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동안 일본 정부기관과 업자들이 ‘꽹과리’와 ‘북’을 쳐대며 한국과의 우호친선 기획에 참여해달라고 꼬드겨도 한반도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이다. 2004년에 일어난 이 같은 이변을 일본의 매스컴은 ‘후유(冬) 소나 현상’이라고 부른다 ‘후유 소나’는 ‘후유노 소나타(冬のソナタ, 겨울의 소나타·KBS TV 드라마 ‘겨울 연가’의 일본식 제목)’를 줄인 말이다.

    200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한일협정) 40주년이 되는 해다. 양국 정부는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명명하고, 각종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축제는 지난해 이미 시작돼 ‘피크’를 이뤘고, 민간 레벨의 교류는 새로운 차원으로 치닫고 있다. ‘한류(韓流)’의 빠름과 강함, 즉 한국 대중문화의 격렬함에는 확실히 일본 국민이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그칠 날이 없었다. 1970년대 전반 일본 신문사의 서울 특파원이던 필자는 양국 국민의 반목과 상호 불신의 충돌을 현장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 때문인지 필자는 솔직히 ‘후유 소나 현상’을 접하면서 ‘믿기 어려운 것을 보았다’는 당혹감을 숨길 수 없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 높은 불신의 벽을 이토록 가볍게 넘어섰을까. 밀월처럼 여겨지는 현재의 상황은 과연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과거와 같은 심각한 마찰이 또다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인가. ‘우정의 해’ 초입에 몇 가지 사안에 대해 검증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용사마’ 첫 입국은 ‘사회적 사건’

    일본 공영방송 NHK는 2004년 봄 한국 KBS의 드라마 ‘겨울 연가’를 ‘후유노 소나타’라는 제목으로 내보냈다. 이것이 엄청나게 히트해 주연 남자배우인 배용준은 일약 일본인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열기의 막이 오른 것은 지난해 4월. 배용준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 도쿄 하네다(羽田) 공항에 내려섰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입국터미널을 메우고 그를 기다리던 무리는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일본 주부들이었다. 그 수가 무려 4000명에 달했는데, 이는 할리우드의 대스타나 유럽의 축구 귀공자, 이미 전설이 된 영국 황태자비 다이애나를 마중 나갔던 팬의 수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그들은 절규하듯 ‘용사마’를 외치며 디지털카메라를 들이댔고, 떨어져나갈 듯 손을 흔들었다.

    일본 지식인이 본 ‘한류’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도카이(東海)대 오쿠라 기조(小倉紀藏) 교수는 신문 인터뷰에서 “일본 여성이 한국인 남성에게 이처럼 열광한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필자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공항의 광경은 그날 저녁 TV뉴스에 보도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모든 방송국이 간단한 연예뉴스가 아닌 ‘사회적 사건’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후유 소나’라는 말이 ‘시사용어’가 된 것은 상당히 나중의 일이다. “배용준의 인기나 드라마 ‘후유노 소나타’가 기록한 높은 시청률은 결국 일과성(一過性)이고, 쉽게 물리는 성격의 일본 여성들은 곧 다른 꽃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 분명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유행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렇게 내다봤다.

    그러나 7개월이 지난 2004년 11월 ‘용사마’가 다시 일본에 왔을 때 나리타(成田) 공항에는 3000명 가까운 팬이 몰려와 공항 로비를 가득 메웠다. 다음날 아침 그가 팬 사인회에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서는 순간, 기다리던 여성들이 ‘용사마’가 탄 차로 몰려들며 서로 밀치는 바람에 여러 명이 넘어져 구급차에 실려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며칠 후 부산에서 열린 배용준 사진전에는 약 500명의 일본 여성이 찾아와 하네다 공항에서 보여준 ‘광란’을 재연했다. ‘후유 소나 현상’은 TV방영이 끝나면 곧바로 시들어버리는 일과성의 ‘장식화’가 아니라 지속되는 인기로 싹트는 새로운 교류의 싹이라는 사실을 일본 여성들이 증명해 보인 것이다.

    ‘후유 소나’ 현상이 한일교류사에 있어 신기원을 이루는 중대사건임은 사람의 왕래라는 극적 변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지난해 11월 부산 거리에서 보았듯 ‘용사마’의 인기에 들뜬 일본 여성들은 가볍게 현해탄을 뛰어넘었다. 필자는 그 점에 주목한다.

    40년 전 국교가 정상화가 될 즈음 한일간 왕래는 연간 2만명에 불과했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이후 한일 양국의 상대국가 방문객은 비약적으로 늘어나 하루 1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유 소나’ 현상으로 이젠 그 숫자마저 갱신될 참이다. 일본항공(JAL)에 따르면, 2004년 5월 현재 항공기 이용 방문객(일본→한국)은 전년 같은 기간의 198%를 기록했다. ‘후유 소나’의 인기가 높아지자 2, 3주도 채 안 되어 일본 여성들이 드라마 로케현장 방문에 나섰다. 같은 해 6월에는 267%, 7월에는 219%로 늘어났다. ‘겨울 연가’의 로케 현장에 일본 아줌마들이 대거 몰려든 광경은 한국의 강원도 주민들도 관찰했을 터이다.

    일본 지식인이 본 ‘한류’

    2004년 11월25일 ‘한류의 코어(Core)’배용준씨가 일본 나리타 공항에 모습을 나타내자 수많은 일본 팬이 환호했다.

    일본의 방송국들은 2004년 여름 이후 한국 드라마를 사들이는 데 분주하다. 어떤 민방에서는 재일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했다. 민족문제 같은 심각한 주제에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트렌디 드라마로 시청률을 올리는 데 급급했던 프로듀서들까지 입맛을 다시며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중국 베이징, 상하이에서 일어난 한국 TV 드라마 붐, 소위 ‘한류’는 서울에서 만든 영화, 팝음악, 패션까지 포함해 대만 및 홍콩까지 세력을 넓혀가며 중화권에서 대폭발한 바 있다. 일본 아줌마들의 ‘용사마’ 절규로 본격화한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상륙은 그보다 거의 5년이 뒤진 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열병의 핵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붐의 버팀목에 관한 한, 중국과 일본의 한류는 사정이 다르다. 필자는 여기에서 한일 문화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난해 봄 하네다 공항의 광경을 살펴보면, 열기에 싸여 격렬하게 움직인 사람은 30대 후반부터 70대 전후에 이르는 중년층 일본 여성들이었다. 지금까지 이들은 일본 내에서 문화상황을 바꿀 만한 역할로 기대를 모은 일이 드물다. 또한 주체성을 발휘해 사회 변화를 가져오려고 일어선 적도 없었다. 그런 계층이 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본의 젊은 여성층은 이 드라마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젊은 여성의 상당수는 이 드라마를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 옛날풍의 지루한 드라마’ ‘있을 수 없는 일을 아무 생각 없이 집어넣은, 황당무계한 심심풀이 이야기’라고 혹평하며 끝까지 배용준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젊은 여성은 한국 드라마 외면’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일본 주간지도 있다. 배용준은 어디까지나 ‘일본 중년 여성의 우상’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런 대조적인 현상에서도 새로운 문화교류의 가능성을 예감할 수 있다.

    결국은 이런 것이 아닐까. 일본에서 (한국도 다를 바 없겠지만) 젊은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TV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방송국은 필사적으로 젊은이의 기호에 맞춰 작품을 만든다. 눈이 부실 정도로 꿈 같은 성공 이야기, 아슬아슬한 섹스 묘사, 스피디한 대화, 과장된 악인 행세와 무법자 폼잡기, 최첨단을 걷는 패션 등이 드라마 곳곳에 배치돼 있다. 빠르게 사랑을 성취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랑을 버린다. 대부분은 울지 않고, 울부짖는다.

    전통적인 작품에 익숙한 중년층은 당연히 새로운 조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욕구불만에 빠져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 ‘애달픈 사랑’만을 기다리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까지나 갈증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젊음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꿈과는 너무나도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공상적이고 달콤한 러브 스토리에 애를 태우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때 이웃나라에서 ‘겨울 연가’가 왔고, 그들은 앞뒤 볼 것 없이 달려들게 된 것이다.

    또 이런 것일 수도 있다. 고도정보사회가 도래하고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상황에서 현해탄의 이쪽과 반대편, 한일 양국민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문화선택권을 얻었다. 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장(마켓)의 출현이라고 해도 좋고, 한일 양국민이 다극 다층의 채널선택권을 대등하게 얻었다고 해석해도 좋다. 어쨌든 일본의 아줌마들은 그간 일본 시장에선 구매할 수 없던 것을 현해탄 반대편 한국에서 발견했다. 그렇다면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된다. 국경은 낮아졌고, 언어의 장벽마저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그야말로 21세기형 문화 상황이 바로 눈앞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더 한류를 원한다

    지난해 11월, 한국의 ‘동아일보’ 사설은 배용준을 “조선통신사 이래 최대의 대일문화상품”이라고 평가하고, “국보급 연예인”이라고 추켜세웠다. ‘한국경제신문’은 같은 시기에 “배용준 혼자서 연간 7000억원의 관광수입을 올렸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보도는 곧바로 일본에 전해져 배용준 붐을 가열시켰다. 한국민이 득의만면하리란 사실을 일본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해 벽두, 일본 신문에도 ‘후유 소나’ 현상의 손익계산서가 실렸다. ‘후유 소나’는 일본에서 20% 이상의 시청률을 보인 데 반해, 한국에서 방영된 일본 TV드라마는 ‘고쿠센’(니혼TV·일본 내에서 최고시청률 기록)마저 시청률이 겨우 1.2%였다.

    영화의 경우 한국은 ‘실미도’ 한 편으로 일본에서 300만달러를 벌어들였으나 일본 영화의 대한 수출액은 10분의 1에 불과했다. CD도 일본에서 ‘후유 소나’의 사운드트랙 앨범 3장 세트만 100만개가 팔린 데 비해 한국에선 그나마 최고로 많이 팔렸다는 나카지마 미카(中島美嘉)의 ‘러브’가 겨우 3만5000장 팔렸을 뿐이다. “따라서 ‘한류’에 필적할 만한 ‘일류(日流)’는 보이지 않았다”고, 일본측의 억울함을 감추지 않는 내용이었다(‘요미우리신문’ 1월4일자 조간).

    그러나 양국 교류는 이미 이런 정도의 숫자에 안달복달하는 시대를 넘어섰다. 이번 붐은 일시적 붐에 그치지 않고, 한일 문화교류 분야에 새로운 마켓을 창출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장기적인 대책이 중요하다.

    ‘문화’ 영역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일본의 프로들은 그 같은 사실에 주목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보다 시장 규모가 큰 일본에서는 장사가 될 기미만 있으면 관련 업체들이 활기를 띤다. 적게 버는 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지 않다. 간단히 말해 일본 업자들은 ‘휴유 소나’ 현상을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돈을 벌어 불황기의 적자를 빠르게 만회했다.

    일본의 제일생명경제연구소는 2004년 11월 초, ‘후유 소나’ 붐에 따른 경제파급효과가 한일 양국에서 총 2297억엔(2조297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겨울 연가’로 1072억엔을 벌어들였다. 촬영지 투어 등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약 18만7000명이나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배용준 광고효과 및 항공권 매출증대 등으로 1225억엔의 경제파급효과를 봤다고 한다.

    ‘후유 소나’의 인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데에는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업자들이 새로운 ‘한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분발했고, 한류 붐이 지속되도록 군불을 땠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는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모습이다.

    이 붐이 단기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한 최대 공로자인 일본의 ‘아줌마’들도 너무나 건강하게 ‘그 후’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필자는 학생들을 통해 ‘후유 소나’에 빠져버린 어머니들(40대 후반에서 50대 전반)의 감상을 들을 수 있다. 그 모니터 장치에서는 이런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폼잡을 것 없잖아”

    “꿈이 있는 도시임에 틀림없을 거야. 용사마처럼 부드러움이 넘쳐흐르는 도시 말야.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서울로 날아간 거야.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은 명동의 번화가에서 카악하고 소리를 내며 가래를 뱉는 남자들뿐. 실망했어. 환멸을 느꼈지. 하지만 그런 모습은 일본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 그렇다면 안심이다. 꿈도 없고, 깨끗하지도 않지만 친밀감을 주는 도시였어. 봄에 또 갈 생각이야, 친구들과. 평상복을 입고 쉽게 갈 수 있다는 느낌이야.”

    “우리 여자들끼리 만나면 언제나 수다 떠느라 날 새는 줄 모르지. 하지만 화제라고 해봤자, 아이들 교육문제니 노후문제가 다야.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 빠져드는 일은 없지. 용사마 정말 멋지네, 한번 가볼까, 그래서 여자들끼리 여행을 떠나는 거지. 멋진 경험이잖아. 이웃나라에 우리들끼리 놀러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니, 고마운 일이지. 앞으로도 몇 번쯤 더 갈 생각이야. 솔직하고 행동적인, 같은 또래의 한국 여자들과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용사마’에 광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한국에 대해 환상만 갖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의 아줌마들은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고, 이웃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침을 뱉는 신사들에게 시선을 보내면서도, “그런 사람은 일본에도 있지”라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고 그렇지, 뭐”라며 고개도 끄덕인다.

    한국 주재 일본 특파원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몰려드는 여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차츰 그들의 광란에 이마를 찡그리기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또한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일 것이다. 한일 양쪽 국민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에 대해 “폼잡을 것 없잖아”라며 납득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런 관계는 과거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보화의 진전과 국경의 문턱이 낮아진 덕분에 양국 사회가 거기까지는 성숙한 것이다.

    필자는 ‘거기까지는 성숙’이라고 썼다. ‘성숙했다’고는 쓸 수 없다. 한일 양국이 모두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은 오는 6월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는다. 자국의 역사를 이웃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배우는 훈련을 충분히 하지 못한 일본 학생들은 이웃 한국과의 ‘공식적인 교류’가 극히 최근에야 시작됐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양국 모두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상한 정상화’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일본 지식인이 본 ‘한류’

    해외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들.

    한국에서 한일국교정상화조약 반대 데모가 격화하자 곤경에 빠진 당시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모든 대학과 고교를 강제 휴교조치하고, 여당 단독으로 조약비준안을 가결시켰다. 그래도 정정(政情)불안이 계속되자 결국 위수령을 발동해 학교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무력으로 반대운동을 억압했다.

    일본에서도 조약비준에 반대하는 10만여명이 국회를 포위하고 데모를 벌였다. 일본은 학생 다수를 검거한 가운데 자민·민사 양당만의 찬성으로 조약비준을 강행처리했다. 한국과 일본 모두 국민 전체가 국교 수립에 기뻐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것.

    그런 기억은 제쳐두고라도, ‘후유 소나’ 현상에 취해 ‘우정의 해’를 즐기고 거창한 행사를 치르는 데만 만족한다면 선린우호의 길을 생각해야할 현시점에서 뭔가 중요한 과제를 못 보고 지나칠 우려가 있다. 국민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이상한 국교정상화’와 ‘후유 소나’ 현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안 사이에 존재하는 40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그렇게까지 조약체결을 서두른 배경에는 동아시아에 반공 교두보를 구축함으로써 자국의 군사전략을 완성하려는 미국의 압력이 있었지만, 그런 정치 경제 군사적 분석은 여기서는 피하도록 하자. 양국 국민이 이웃나라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문제에 대해선 많은 말이 필요없다.

    필자는 서울 특파원 시절 다음과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당시 한일 양국의 일반 국민 사이에 상호불신이 매우 깊었으며, 그것이 양국민의 일반적 정서였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국교정상화 시절 에피소드 2話

    필자가 서울에 부임한 것은 1973년 새해 벽두였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인은 대사관 직원, 상사 은행 합자기업의 주재원 등을 합쳐 1000명이 채 안 됐다. 험악한 양국관계를 걱정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사람이 적어 서울의 일본인학교 재학생은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합해 60명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일본인회가 충청도에 있는 어느 고찰(古刹)로 소풍 갔을 때의 일이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발한 봄이었다. 대열의 앞에 서서 경내의 긴 돌계단을 내려오던 젊은 상사주재원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뒤에서 틈을 노리고 있던 초로의 한국인 남자에게 카메라를 날치기당한 것이었다. 범인은 달아났지만, 젊은이의 빠른 발을 이길 수는 없었다. 곧 붙잡혀 길바닥에 엎어졌고, 카메라는 도로 찾았다.

    하지만 곤경에 빠진 것은 오히려 일본인 젊은이였다. 그는 주위에 있던 한국인들의 적의에 찬 시선을 받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엎드려 있던 날치기범은 재빨리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불같이 화를 냈다. 바지의 흙을 털고 일어서더니 일본인 청년에게 얼굴을 내밀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도 다름아닌 일본어였다. “이 자식들, 너희들은 나라를 훔쳐먹었잖아. 그까짓 사진기 한두 대 도둑맞았다고 불만을 얘기할 수 있어?”

    돌아오는 길의 전세버스가 침묵에 싸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너나없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라는 역사의 짐을 지고, 출구도 없는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시대의 일본민족에게 고통을 받은 피학자(被虐者)들이 살고 있는 땅에 몸을 두고 있는 자신의 불행과 불운을 저주하고 있는 듯 보였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필자가 지금도 존경하는 한국 언론인 고(故) 홍승면씨의 증언이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장이던 홍씨는 ‘신동아’ 1974년 11월호에 어느 젊은 일본인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홍씨가 그 청년과 우연히 만난 곳은 태국 방콕이었다. 때는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겨울.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신문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방콕의 입국심사대에서 홍씨는 자기 앞에 서 있던 한 일본인 청년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입국심사관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이를 보다 못한 홍씨가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통역을 해줬다. 무사히 공항을 나온 청년은 택시운전사에게 가는 곳을 말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던 듯, 홍씨에게 동승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 태도와 말씨는 매우 정중했다고 홍씨는 쓰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택시 안에서 명함을 건네며,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한 청년은 대개의 일본인이 그렇듯 상대방의 근무처를 물었다. 이 청년은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이 신사가 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노련한 이 언론인은 청년의 침묵이 뭔가 할말이 있는데,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택시에서 내리기 직전,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한국인은 어째서 죄다 나쁜 사람뿐입니까.”

    이번에는 자신이 깜짝 놀랐다고 홍씨는 쓰고 있다. 홍씨는 한국과 국교정상화 조약을 맺은 일본 국민 대다수가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을 거라며 개탄해 마지않았다. 아마 폭력단이나 사기, 강도 등 일본 국내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재일 한국인들이 관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청년이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지 않은 채 서둘러 체결한 조약은 양국의 장래에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라고 홍씨는 걱정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

    지금은 이 말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소수파에 속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한일불협화음의 시대에 한국 지식인들은 이 경구를 자주 사용했다. 그들은 한일협정의 허점을 지적하고, 일본과 일본인이 전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한 뒤, 예외 없이 이 말로 대화를 마무리지음으로써 자신들을 스스로 납득시켰다. 중국인들이 일본의 전쟁책임을 논할 때 사용하는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옛일을 잊지 않고, 뒷일의 스승으로 삼는다)’와 거의 같은 뜻이지만, 중국의 그것에는 ‘용서한다’는 말이 없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말은 건국 직후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경구”라고 말한 사람도 앞서의 홍승면씨다. 나치가 저지른 가학행위를 이유로 신생독일(서독)에 보복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선 자자손손 수난의 체험을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이 말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층도 한일관계의 장래를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음을 이 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런 이성과 관용의 말로 억지로라도 자신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아무래도 배일감정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솔직함 또한 담겨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지났다. 한일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운동 과정서 널리 퍼진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문구는 이제 용도폐기됐다고 봐도 좋을 것인가. 그 점을 한국인들에게 묻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지난해 6월 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서울발 일본 신문의 기사로, 한국 국가보훈처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교생까지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였다. 이 조사에서 ‘가장 친근감을 느끼는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본 결과, 북한이 26.4%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미국 17.8%, 일본 13.7%, 중국 7.1% 순으로 나타났다. 기사는 “고교생 이하에서 일본에 대한 친근감이 10%를 넘은 것은 이례적인 일로, 대중문화를 비롯한 오늘날의 일본 정보가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결과로 보여진다”고 썼다.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반일감정이 엷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였다(‘산케이신문’ 2004년 6월11일자 조간).

    일본 ‘아사히신문’과 한국 ‘동아일보’는 1984년 이후 11차례 한일공동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월드컵 공동개최를 1년 반 앞둔 2000년 11월의 조사에서는 반일감정의 약화 경향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 젊은이(20대 전반)의 23%가 ‘일본이 좋다’고 답한 것이다(‘싫다’는 36%). 20대 후반은 ‘좋다’가 21%, ‘싫다’가 37%였다. 조사결과를 더 소개하면 ‘일본이 싫다’는 대답은 70대 67%, 60대 57%, 50대와 40대가 각각 45%, 30대 후반 43%, 30대 전반 41%였다. 어린 세대일수록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한국측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런 결과에 만족하고만 있을 것인가. 필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성의 마음으로 눈을 감게 된다. 숨이 막힐 듯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밝은 곳이 조금 보였다고 해서 일본인들까지 손뼉을 치며 기뻐해도 좋을 일은 아니다.

    역사에서 깊이 배워야 할 일본

    역사를 직시하고 역사에서 깊이 배워야 하는 것은 일본인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상대국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 일본은 자국민의 가학행위를 꼼꼼하고 엄정하게 검증하고, 두 번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다듬으면서, 역사에 대한 성실성으로 아시아 각국의 신뢰를 얻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인은 선조가 저지르고 현 세대가 청산하지 않은 채 남겨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일본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도록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인에게도 암울한 과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싶다.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 공동여론조사의 ‘역사인식’에 관한 응답을 보자(‘아사히신문’ 1999년 10월15일자 조간). ‘일본이 싫다’고 응답한 한국인의 97%가 ‘일본은 과거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단정했다. ‘일본이 좋다’고 응답한 사람들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80%가 ‘미해결’이라고 답했다. 일본인 중에서 ‘미해결’이라고 답한 사람도 70%나 됐다. 한일간 진짜 밀월은 일본인들이 ‘역사인식’이라는 숙제를 끝낸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 역사인식과 과거청산에 관한 한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의 40년은 일본측의 ‘망언’과 한국측의 규탄, 일본측의 ‘발뺌’과 한국측의 ‘탄식’으로 이어져왔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건 보수파가 버티고 있는 일본 지도층에 전쟁 책임이나 전후 처리 등 역사를 직시하는 정신구조가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뒤만 쳐다보면서 귀찮은 말만 하는 패거리들이잖아. 항의를 하면 사과하면 되는 거고. 그 패거리들도 끝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이것이 일본 지도층의 속내일 것이다.

    여기서 ‘패거리들’은 한국 지도층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도층은 어떠했는가. “일을 어렵게 만들어 근본적인 관계에까지 금가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항의를 하면 상대방은 타격을 입을 테고, 그 점을 물고 늘어져 실리를 취하면 되지 않나.” 한국의 위정자들이 그런 계산을 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한일 국교정상화 40년간 양측 지도층 사이에는 이렇듯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선호한 분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정부간 공식문서로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도쿄에서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이 있다.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제창한 내용으로, 김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후 한국이 보여준 대응 중에는 일본인인 필자가 봐도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김대중 정부는 일본이 ‘망언’을 해도 그것이 정부 요인이 아니라면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2003년 2월 방일한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과거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기대하는 한국내 여론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어른들이 ‘과거의 짐’ 정리 나서야

    ‘용사마’사건으로 다시 돌아가자. 하네다 공항에서 일본 아줌마들이 지른 ‘교성’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한국 문화가 일본인에게 준 자극은 ‘후유 소나’가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 먼저 일본의 젊은이들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에 마음을 빼앗겼다. 두 작품은 일본에서 상영된 한국 영화로는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거뒀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한일 문화교류의 폭이 넓어졌으며, 2004년의 ‘후유 소나’ 현상을 통해 일거에 정점에 도달했다. 일본의 ‘한류’는 그런 궤적을 거쳐왔음을 지적해두고 싶다.

    필자의 관심에 맞춰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의 중년층 여성은 ‘후유 소나’에 기울고, 젊은이들은 강제규 감독의 영화나 보아의 앨범으로 몰려가고, 필자 같은 고령자는 ‘서편제’의 판소리에서 향수를 느낀다. 지금은 이처럼 멀티 채널의 문화선택이 가능한 시대다. 그러므로 양국 국민의 등에 지워진 과거의 무거운 짐을 양국의 ‘어른’들이 노력해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빚도 없고, 주고받을 일도 없는 민중은 자유다. 한국인은 ‘망언은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이라며 혹독하게 반성을 촉구하는 뚝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대중도 스스로의 예지와 양식을 갖고 ‘역사에 대한 속임수와 왜곡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주체적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 멀티 시대의 출현은 대중시대의 도래이기도 하다.

    소위 ‘한류’의 비밀을, 그 발신지인 서울에서 찾으려고 할 때 일본인도 틀림없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고뇌에 찬 과거사를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자기해방의 역사’라고 바꿔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국 영화는 일본 식민지의 멍에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50년대에 걸쳐 (불행한 한국전쟁을 포함해) 매우 융성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이은 박정희 정권의 등장으로 암흑기에 들어섰고, 이듬해 영화법이 제정된 뒤 민주화가 실현될 때까지 국책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시대가 계속됐다. 영화법은 1985년 전면 개정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인들이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벌이 영화제작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지배하려는 재벌의 속셈은 계열사가 생산하는 비디오플레이어나 비디오테이프의 매상을 올리려는 것이어서, 예산을 잡아먹지 않는 B, C급 영화제작에만 몰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제작이 진정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돌아온 것은 1997~98년 외환위기 이후 재벌들이 힘을 잃고 나서부터다. 자유를 원치 않는 군인정치인이나 돈을 버는 데만 급급하던 재벌 밑에서 신음하던 영화인들은 해방의 공기를 만끽하며 개성 있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냈다.

    드라마, 영화, 음악 등 ‘한류’가 탄탄한 이야기 구조, 격렬함, 다이내믹함으로 아시아 민중의 마음을 빼앗고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예술분야에서 교류가 가장 어렵다고 간주돼온 것이 연극이다. 신국립국장(일본)의 기획으로 2002년에 공연된 ‘저 강을 넘어, 5월’은 히라타 오리자와 김명화가 공동집필한 희곡을 히라타와 이병훈이 공동연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양국 수도에서 공연돼 성공을 거뒀고, 아사히무대예술상을 받았다. 그들이 시도한 것은 공통의 메시지를 갖고 같은 차에 올라 타 양국의 대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합승형’이었다.

    ‘후유 소나’현상이 만들어낸 스타와 팬의 상호 기쁨도 앞으로 더 큰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를 히라타 일행이 시도했던 새로운 도전과 같은 것으로 보고, 교류의 전체구상을 고려해가며 발전시켜 나가면 좋을 것이다. 깊고 폭넓게, 그리고 ‘개인’의 참가까지 시야에 넣고 한일 문화교류를 창조해나가면 어떨까.



    지금까지 민간 차원의 한일관계는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것이 우호적 열기에 휩싸여 있다. 역사인식이라는 껄끄러운 과제를 끌어안고만 있어서도 안 되지만, 이를 외면해서도 교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역사 문제의 부족한 부분을 해결해나가면서 현재의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상호교류에 새로운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일 양국의 대중이 함께 이뤄내야 하는 일이다.

    ※이 글은 2004년 10월 서울 명지대에서 열린 한일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를 근간으로 그 후의 상황을 추가해 개고(改稿)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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