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던 제용감 건물.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96년 4월7일 ‘독립신문’이 발간됨으로써 국내 민간신문의 역사가 열렸다. 독립신문 발간을 계기로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민족진영계의 주요 신문들이 잇따라 발간됐다. 이들 민족지는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 침탈 야욕에 맞서 구국언론의 기치를 올렸으나,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거쳐 1910년 8월28일 불법적인 합병조치를 통해 일본에 국권을 완전히 빼앗김으로써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활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성순보 발간 이래 우리 근대 언론이 겪어온 활약상과 수난·영욕의 역사는 그간 몇몇 뜻있는 언론사학자의 집념에 찬 연구 덕분에 많은 사항이 정리돼 있다. 다만 근대언론 초기에 관한 연구 가운데 아직 본격적으로 자료수집이 이뤄지지 않은 분야 중 하나가 언론과 관련한 사진을 통한 연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의 관심사는 바로 이런 ‘틈새’와 관련돼 있다. 필자는 3년여 전부터 우리나라 초기 신문인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사옥 위치를 보다 정확히 알아보고 사옥 사진을 찾는 작업을 벌여왔고, 그간 부분적 성공을 거둬 이를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독립신문사 사옥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을 찾았고, 대한매일신보사의 창간사옥 사진과 두 번째 사옥 사진도 찾아낼 수 있었다. 황성신문에 관해서는 사옥이 있던 4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있었으나 사옥 사진은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최근 세 번째 사옥인 옛 제용감(濟用監) 관아 건물의 사진을 찾게 됐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은 구한말 제용감 관아가 오래 사용하다 관리서(管理署)라는 관아가 잠깐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는 최근 이 제용감 건물의 사진을 발견했다. 황성신문은 1904년 4월 중순에 이 건물로 옮겨와서 세 번째 사옥으로 약 4개월간 사용하다 새로 개설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에 건물을 넘겨주고 네 번째 사옥으로 떠난 바 있다.
황성신문의 첫 사옥은 현재의 서울 세종로 사거리 교보문고 앞 기념비전(紀念碑殿) 자리에 있었고, 두 번째 사옥은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 부근에 있었으며 1904년 4월 중순에 세 번째 사옥인 ‘중서 수진방 수동 전(前) 관리서’ 건물로 옮겨 약 4개월간 신문을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성신문은 1904년 8월 초순 네 번째 사옥인 현재의 서린동 영풍빌딩의 종로 사거리 쪽 입구 근처로 옮겨 1910년 8월 하순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할 때까지 신문을 발행했다(‘신동아’ 2003년 12월호 ‘황성신문 옛터를 찾아서 : 현 세종로 네거리 → 조선호텔 인근 → 국세청 본청 → 영풍문고 입구로 네 차례 이사’ 기사 참조).
지금의 국세청 본청 자리

서울공고, 선린상고, 서울대 농대의 교사(校史)에는 각기 자기 학교의 모태인 농상공학교가 옛 제용감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서울공고백년사’에는 “처음에 농업과는 서울 중구 훈동에 설치하였다가 뒤에 상공학교와 합하여 중구 수송동 제용감 자리로 옮겼다”(29쪽)고 되어 있고, ‘선린백년사’에는 “농과는 처음부터 상과 및 공과와 교사(校舍)를 같이 쓰지 않고 따로 사대문 안의 북부 훈동(勳洞)에 소옥(小屋)을 두었다가 그 후 중부 수진동(壽進洞) 제용감(지금의 수송동 중동전기공고 구내) 자리로 옮겼다”(63쪽)고 적고 있다.
‘서울공고백년사’(34쪽)와 ‘선린백년사’(58쪽)에 옛 제용감의 사진과 함께 농상공학교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농상공학교. 기존의 상공학교에다 농과를 추가하여 농상공학교(1904년)가 개설되어, 당시…제용감 자리에 교정을 마련했다. 이곳은 과거 숙명여자중학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의 종로소방서 뒤편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