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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발굴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을사늑약 직전 옛 제용감 관아 4개월간 사용

  •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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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당시 민족지 황성신문은 장지연이 피를 토하며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온 백성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황성신문 관련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최근 구한말 민족지들의 사옥 터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한 언론학자가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 위치했던 곳의 사진을 발견했다.
  • 이 사진의 사료적 의미를 살펴본다.[편집자]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던 제용감 건물.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신문의 역사는 통리아문(統理衙門) 산하 박문국(博文局)이 1883년 10월1일 ‘한성순보’를 발간하면서 시작됐다. 관보적 성격이 강하던 한성순보는 1884년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문국이 불타 폐간되고 말았다. 그 뒤 1886년 1월 한성순보의 복간 형식으로 한성주보가 발간됐으나 재정 사정으로 1888년 7월 다시 폐간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96년 4월7일 ‘독립신문’이 발간됨으로써 국내 민간신문의 역사가 열렸다. 독립신문 발간을 계기로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민족진영계의 주요 신문들이 잇따라 발간됐다. 이들 민족지는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 침탈 야욕에 맞서 구국언론의 기치를 올렸으나,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거쳐 1910년 8월28일 불법적인 합병조치를 통해 일본에 국권을 완전히 빼앗김으로써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활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성순보 발간 이래 우리 근대 언론이 겪어온 활약상과 수난·영욕의 역사는 그간 몇몇 뜻있는 언론사학자의 집념에 찬 연구 덕분에 많은 사항이 정리돼 있다. 다만 근대언론 초기에 관한 연구 가운데 아직 본격적으로 자료수집이 이뤄지지 않은 분야 중 하나가 언론과 관련한 사진을 통한 연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의 관심사는 바로 이런 ‘틈새’와 관련돼 있다. 필자는 3년여 전부터 우리나라 초기 신문인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사옥 위치를 보다 정확히 알아보고 사옥 사진을 찾는 작업을 벌여왔고, 그간 부분적 성공을 거둬 이를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독립신문사 사옥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을 찾았고, 대한매일신보사의 창간사옥 사진과 두 번째 사옥 사진도 찾아낼 수 있었다. 황성신문에 관해서는 사옥이 있던 4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있었으나 사옥 사진은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최근 세 번째 사옥인 옛 제용감(濟用監) 관아 건물의 사진을 찾게 됐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은 구한말 제용감 관아가 오래 사용하다 관리서(管理署)라는 관아가 잠깐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는 최근 이 제용감 건물의 사진을 발견했다. 황성신문은 1904년 4월 중순에 이 건물로 옮겨와서 세 번째 사옥으로 약 4개월간 사용하다 새로 개설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에 건물을 넘겨주고 네 번째 사옥으로 떠난 바 있다.

황성신문의 첫 사옥은 현재의 서울 세종로 사거리 교보문고 앞 기념비전(紀念碑殿) 자리에 있었고, 두 번째 사옥은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 부근에 있었으며 1904년 4월 중순에 세 번째 사옥인 ‘중서 수진방 수동 전(前) 관리서’ 건물로 옮겨 약 4개월간 신문을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성신문은 1904년 8월 초순 네 번째 사옥인 현재의 서린동 영풍빌딩의 종로 사거리 쪽 입구 근처로 옮겨 1910년 8월 하순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할 때까지 신문을 발행했다(‘신동아’ 2003년 12월호 ‘황성신문 옛터를 찾아서 : 현 세종로 네거리 → 조선호텔 인근 → 국세청 본청 → 영풍문고 입구로 네 차례 이사’ 기사 참조).

지금의 국세청 본청 자리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황성신문이 세 번째 사옥인 제용감 터를 떠나게 된 것은 그 자리에 관립 농상공학교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1899년에 설립된 상공학교에 농학과를 통합해 1904년 6월에 새로 설립이 공포되고 8월에 제용감 건물로 들어가 9월 초에 신입생을 모집, 본격적인 실업교육을 시작한 관립학교였다. 이 학교는 1906년에 공업전습소, 수원농림학교, 선린상업학교로 분리된다. 이 3개 학교의 후신이 각각 현재의 서울공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전 농과대학), 선린정보산업고(전 선린중·선린상고)다. 이 3개 학교의 교사(校史) 속에 첫 교사(校舍)인 제용감의 한옥 사진이 나와 있다.

서울공고, 선린상고, 서울대 농대의 교사(校史)에는 각기 자기 학교의 모태인 농상공학교가 옛 제용감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서울공고백년사’에는 “처음에 농업과는 서울 중구 훈동에 설치하였다가 뒤에 상공학교와 합하여 중구 수송동 제용감 자리로 옮겼다”(29쪽)고 되어 있고, ‘선린백년사’에는 “농과는 처음부터 상과 및 공과와 교사(校舍)를 같이 쓰지 않고 따로 사대문 안의 북부 훈동(勳洞)에 소옥(小屋)을 두었다가 그 후 중부 수진동(壽進洞) 제용감(지금의 수송동 중동전기공고 구내) 자리로 옮겼다”(63쪽)고 적고 있다.

‘서울공고백년사’(34쪽)와 ‘선린백년사’(58쪽)에 옛 제용감의 사진과 함께 농상공학교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농상공학교. 기존의 상공학교에다 농과를 추가하여 농상공학교(1904년)가 개설되어, 당시…제용감 자리에 교정을 마련했다. 이곳은 과거 숙명여자중학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의 종로소방서 뒤편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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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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