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성공의 그늘에 있던 양대 공신은 전선군의 총사령관 격인 범려(范?)와 후방을 맡아온 보급 총사령관 격의 문종(文種)이다. 그러나 구천왕은 공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 노후를 보살필 만큼 도량이 크지 못했으며, 의심 또한 많았다. 그래서 범려는 일찌감치 국외로 탈출했고, 문종은 국내에 남아 있다 자살을 강요당하고 말았다.
월나라도 6대 후에는 초나라 군대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만다. 난세를 살아가는 지식인, 처세술과 인생론 내지 진퇴(進退)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한중일 삼국인들은 오늘날도 당시 범려의 거취와 지혜를 거듭 음미하거나 성찰의 자료로 삼곤 한다.
범려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상장군(上將軍)답게 당당한 위세를 누리게 됐으나 이에 연연하는 속물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장래와 자신의 향후 처세에 대해 깊이 숙고했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리막이 따른다. 올라가면 떨어지고, 흥하면 망한다. 이는 하늘의 법칙이다. 개인으로 말하면, 드높은 명성은 오래도록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바가 못 된다. 번성의 영속을 망상하다간 재난에 부닥뜨린다.
게다가 구천이라는 군주를 보아하니, 비록 고생을 같이할 수는 있으나 안락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이래저래 되도록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올라가면 떨어지고, 흥하면 망한다
월군이 본국으로 개선한 후 범려는 탈출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30년에 걸친 군신(君臣)관계의 정을 못 잊어 월왕 구천에게 이별의 서신을 남겼다. 요지는 “이제 군왕께서 설욕을 마치고 패권을 장악하셨으니 소신도 미력이나마 신하된 보좌의 책임을 다하려고 애써온 보람을 느끼게 된 시점입니다. 떠나감을 하량해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구천왕은 그 서신을 읽고 깜짝 놀라 급히 만류하는 답장을 써서 특사를 보냈으나, 범려는 이미 출발한 뒤여서 도로(徒勞)에 그쳤다. 범려는 몸에 지니기 편한 보석 등만 챙기고 모든 가족과 시종을 인솔하고는 배를 타고 해상으로 사라진 것이다.
범려 일행은 산둥반도를 돌아 발해로 북상했다가 제나라에 상륙했다.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해안에 정착한 그는 범려라는 이름을 ‘치이자피(?夷子皮)’라 고쳐 부르며 생업을 농사로 전환했다. ‘치이자피’란 말가죽 자루처럼 자유롭게 여러 모로 쓰일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연구와 노동을 결합한 협동적인 다각 영농이 성공하여 범려는 수년 내에 호부로 대성했다고 한다(史記, 貨殖列傳).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제나라 조정은 범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재직기간 중 치적을 많이 쌓았다. 그러나 뒤늦지 않게 다시 사직했다. 오래도록 고위직에서 존명을 누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성찰의 결과였다. 거의 모든 재산을 여러 사업에 기부하고, 수고를 많이 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사라지듯 정처 없이 떠나간 것이다.